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결국 삶이 해결해 주었다. 살아가면서 서서히 나는 내가 어떻게 살고 싶어 하는가에 대한 욕구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어갔다. ‘성실하기’, ‘바르게살기’, ‘진하게 살기’, ‘후회하지 않기’ 등등의 목표들이 정해져갔다. 거기에 또 하나 추가된 목표가 있다. 바로 ‘엉뚱하기’였다.
‘엉뚱하게 살기!’ 내가 생각해도 이건 정말 엉뚱한 목표라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엉뚱하게 받아들이는 건 나의 머리일 뿐. 나의 감정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앞서 열거한 모든 목표보다 더 강렬한 당김으로 느껴져 오는 것이 바로 ‘엉뚱하게 살고 싶은 것에 대한 욕구’이다.
워낙 범생이 체질이어서 그랬는가? 나의 엉뚱하기는 아마도 고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다. 당시 나는 번번히 지각을 잘했다. 아주 우수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성적으로만 따지자면 그런대로 모범생의 대열에 근근이 낄 수는 있었던 내가, 또 거의 항상 지각생의 대열에 끼는 것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 약 100미터 거리에 교문이 있었다. 그것을 지나 학교건물 출입구에 서 계신 체육선생님 앞을 통과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가 버스를 내릴 즈음이면 거의 항상 호루라기가 울렸다. 호루라기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그 소리가 울린 뒤 1분 안에 체육선생님 앞을 통과하면 지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뛰면 충분히 1분 안에 통과할 수 있는 그 거리를 나는 ‘뛰는 척’만 하다가, 번번이 지각생으로 잡히곤 했다.
숙제 안 해가기, 수업시간에 소설책 읽기 등, 당시 학교 안에서 범생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다른 유형의 엉뚱한 짓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남들이 다 하는 짓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때로는 오히려 범생이답게 더욱 범생이 짓을 하는 것도 ‘엉뚱하기’로 느껴지기도 했다.
요즘 유행하는 ‘튀어보기’ 혹은 ‘개성적으로 살기’와는 조금 유형이 달랐던 나의 엉뚱하기에 대한 욕구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되풀이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범생이의 일종의 ‘소박한 일탈행위’가 아니었던가 싶다.
문제는 나이가 어느 정도 지긋해진 지금도 그런 엉뚱함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엉뚱하기만 한 ‘엉뚱하고 싶은’ 욕구는 아직도 내 안에 상당히 강렬한 힘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남들에게 상당히 ‘젊잖게’ 보이는 내 고매한 인격에 때론 먹칠을 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좋다. 내 속의 무엇인가가 그 짓굳은 장난질을 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이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짓굳음도 나의 일부일진데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속의 엉뚱함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번씩 나의 엉뚱함을 발견해버린 사람들이 내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실실 웃을 때, 나 역시 가볍게 바보스런 웃음을 지어줌으로서 자연스럽게 반응할줄 아는 기술까지도 이젠 조금씩 터득하고 있는 터이다. 그래. 어쩌면 그것이 내 ‘얼굴’ 혹은 ‘인격’이란 것 아래에 숨어있었던 나의 진짜 모습의 한 부분이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나는 요즘 마음이 많이 편해져간다. 생활을 위한 수고로움이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겠지만,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갇혀 있어온 또 하나의 나를 풀어주고, 그것을 나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이제 한결 편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 다시 한번 찾아보자. 또 다른 나의 모습. 지금도 놓여나기를 원하며 발버둥치는 또 다른 ‘내속에 갇혀 있는 또 다른 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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