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수광의 “지봉유설” 서문에서 -
지봉 이수광(芝峰 李睟光 1563-1628)은 한 인물로서 험 잡을 데가 없다. 존경받는 성인군자도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안티(anti-)가 가능한데, 지봉의 인격은 마치 때 안타는 테프론 코팅으로 마감한 것 같이 투명하다. 그래서 그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세간의 입방아에 잘 오르지 않는다. 오늘날 대선주자 중에는 약간의 흠집이 있기에 오히려 인기가 좋은 것과 대비된다.
지봉의 부계는 태종으로 올라간다. 왕족의 후손이란 이유로 4대동안 출세가 막혔다가, 아버지 대에 이르러 부친이 문과에 급제하여 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또 지봉의 모계는 세종 대에 역시 청백리로 이름을 떨친 재상 유관(柳寬)이었다. 한번은 장마로 집에 비가 새자 우산을 받쳐 들었다.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하지?, 부인에게 물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이수광은 어릴 때 동대문 밖 낙산 동쪽 자락의 초가에서 지냈다. 바로 비새는 그 외갓집이었다. 나중에 왜란 이후 주춧돌마저 사라진 그 옛터에, 그는 작은 집을 짓고 비우(庇雨)란 편액을 붙였다. 겨우 비나 막자는 뜻을 담은 것인데, 부모의 거룩한 유지를 계승하겠다는 의지였다. 지봉이란 아호 역시 겸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낙봉의 한 봉우리 모습에서 따온 것이다.
지봉은 13세까지 홀로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바로 관학을 통해 성균관에 입학했다. 16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다음해 부친상을 당해 학업을 중단했다. 20세에 다시 진사시를 거쳐 23세에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어 관리의 정통코스인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청직은 관리의 비위를 조사하는 언론의 역할이며, 요직은 인사나 재무를 담당하는 관직이었다.
1590년(28세) 지봉이 첫 번째 북경을 다녀왔다. 성절사(聖節使) 일행으로 발탁되어 6개월에 걸친 투어였는데, 그의 일생에서 시야를 넓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는 물론 외교관으로서 공무를 수행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책에서 익혔던 중국의 문물을 현장에서 체득할 수 있는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특별히 중국 밖의 여러 나라가 서로 돕고 있음을 깨달았다.
29세에 지봉은 문관의 인사추천권을 쥔 이조좌랑에 제수되었다. 바로 동인과 서인이 갈라서게 된 문제의 요직이다. 이것은 왕과 신료 모두 지봉의 올바른 능력을 높이 평가했음을 의미한다. 이듬해 왜란이 터지자, 조정은 지봉을 병조 쪽으로 돌려 활용했다. 지봉은 처음부터 유명학자의 문하에 들지 않았고, 자신의 승진을 위하여 어느 파당에 줄서거나 기웃거리지도 않았다.
35세 되던 해 비록 정유재란 중이었지만, 지봉은 진위사(進慰使)의 직책을 띠고 두 번째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역시 기간은 6개월 동안이었는데, 북경에 온 외국사신들이 매우 많아 숙소마다 초만원이었다. 특히 안남(베트남) 사신 풍극관(馮克寬)과 친숙하여 필담(筆談)을 나누었다. 이때 이수광이 그에게 써준 시(詩)가 안남의 고관과 유생들에게 필사되어 유행했다고 한다.
세 번째 북경 길은 그가 49세 때(1611)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갈린 후였다. 주청사(奏請使)의 부사로 명나라와 교섭했는데, 이번에는 11개월 동안 주재했다. 당시 명은 신종(神宗)이 통치했고, 마침 마테오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서학(西學)의 종교와 과학 분야의 여러 가지 문물을 남겨놓았던 시점이었다. 지봉은 북경 너머로 펼쳐진 너른 세계를 내다보고 있었다.
북경은 이수광에게 더 이상 세계의 배꼽이 아니라 다만 세계로 향한 창문이었다. 인목대비 폐위사건으로 알려진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로 지봉은 관직을 사임하고, 비우당에 칩거하며 이듬해까지 지봉유설(芝峯類說) 20권을 탈고했다. 아이템이 천문, 지리, 역사로부터 경제, 시문, 기예로 이르기까지 사례와 고증을 붙인“문화백과사전”으로 우리나라 초유의 과업이었다.
지봉은 이미 17세기 초에 다가올 세계화를 대비하여 지식정보화 시대를 개척한 선각자였다. 내외적으로 난세에 살면서 인품의 향기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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