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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만원 박사 | ||
59년 왕십리 거리는 검은 흙먼지와 미나리 밭으로 상징될 것이다. 백목으로 문질러 빤 흰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은 고교생들의 작은 멋이기도 했다. 발을 디딜 때마다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검은 먼지 때문에 운동화는 이틀에 한번씩 빨아야 했다.
59년 왕십리는 유행가의 한 구절이지만 그 때 필자는 야간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왕십리 미나리 밭 한 가운데, 당시 가난했던 한영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울퉁불퉁하지만 딱딱하게 다져진 교실 바닥에 검은 색이 칠해진 책상들이 있었고, 한 책상에는 두 사람씩 앉았다.
문과 1개 반, 이과 1개 반, 나는 이과에서 1등을 했고, 내 짝쿵은 2등을 했다. 소위 주경야독을 하는 처지라 61년 봄 서울대학 입시에 두 사람 다 낙방을 했다.
나는 용케도 신당동 시의원집 아들의 가정교사가 됐다. 그 아들은 서울사대부고 3학년생이었다. 그리고 내 짝쿵은 시골에 가서 조용하게 공부하고 싶다며 문과출신 친구 2명과 함께 시골 나의 집으로 내려갔다. 늙으신 어머니, 나를 업어서 키운 형수, 누나는 이 3사람을 가족처럼 생각하며 밥을 지어주었지만, 진작 나는 낯선 서울 거리에서 향수병을 앓고 있었다.
1962년, 나는 천신만고(?) 끝에 신체검사에 합격하여 육사를 갔고, 짝쿵은 공사를 갔고, 내 제자(?)는 서울공대 건축과에 합격했다. 짝쿵은 그 후 장군으로 예편하여 외국 방위산업체에 근무하면서 높은 연봉에 골프와 술자리로 상징되는 화려한 인생을 살고 있지만, 나는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지지리도 어려운 삶만 고집하고 있다.
내가 중앙정보부와 연구소 등에서 잘 나가고 있을 때는 여러 사람들이 친구가 돼 주었고, 그들은 수십 년 동안 아주 가까운 친구사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감옥에 가고 이런 운동을 하고부터 이들 친구들은 아주 멀어져 갔다. 아마도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할까, 또는 나로 인해 어떤 불이익을 받을까 그런 것도 염려됐을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 보면 만난다 해도 공유할 대화거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 같다. 더구나 내 짝쿵은 “내가 죽었을 때 줄 수 있는 부조금을 지금 좀 주라”는 취중에 한 전화 한마디에,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의 말을 남겼다. “너 하는 일에 돈 줄 수 없어” 아마 나는 죽기 전에 이 말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생각을 않으려 해도 이따금씩 이 말이 떠오를 때면 가슴 속에 찬 바람이 인다.
오랜 친분으로 사귀어 온 사람들 중에도 먼 사람들은 많다. 이들 중에는 시국진단을 읽지만 분석 내용보다는 주위 사람들의 여론을 더 믿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데 혼자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독불장군이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고, 혼자만 잘났다는 거냐” 이명박은 이래서 싫고, 손학규는 저래서 싫고 그럼 누가 대통령 하느냐, 이런 뜻으로 하는 말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과 손학규를 괜찮은 인물로 생각하는데 아무런 명함도 가져보지 못한 무명인이 혼자서 잘난 체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함께 우익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런 식이면 질투와 질시에서 그렇다 치면서, 마음 편하게 생각하겠지만, 70을 훨씬 넘은 장군출신들, 대령 출신들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리 마음 편한 현상은 아니다. 조용히 한나라당 후보자를 찍어주면 될 일을 지만원이 쑤셔서 시끄럽게 한다는 생각들인 것이다.
나는 내가 하는 지금의 일을 남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이 지나칠 수 있는 위험의 씨앗을 찾아 보여주고 경고하려는 단순한 생각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다.
세상을 계산으로 살아왔다면 이런 일은 백번 천번 손해 보는 길이다. 그래도 나는 이 외롭고 괴로운 길을 가는 데까지 갈 것이다. "왜 그렇게 어렵게만 사느냐" 이렇게 묻는다면 나는 “그게 내 천성이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다.
때로는 김구의 새로운 면을 발굴해냄으로써, 그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했고, 광주사태에 대한 자료를 탐구하여, 민주화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떠나게 했고, 때로는 교인들의 못 마땅한 면을 꼬집어 교인들을 떠나게 했고, 한승조 교수를 지원하면서 친일파라는 욕도 들었다.
엊그제까지도 필자에게 안부전화를 하면서 우의를 다져온 사람들이 내가 당을 만든다는 소식에 침묵들을 하고 있다. 이명박이나 손학규가 나보다 더 좋다는 뜻이다.
이렇듯 나는 사람들을 떠나게 만드는 사람이다. 계산이 중요했다면 이런 무모한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좁은 길에도 끝까지 남아주는 길동무들이 있다. 내 얼굴을 직접 대면하지 못한 수많은 인생들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나는 이들로 인해 내 길을 조금은 더 갈 수 있을 것이다.
끝까지 남아주는 길동무가 없어지는 그날, 욕먹고, 의심받는 이 외로운 길도 기억 속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그날까지 나는 '끝까지 가까웠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지지 않는 향기를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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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이 갖춰진 새로운 한국의 정당문화가 자리잡아지면 다시 그들은 수구초심처럼 다가올것입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70년대 까지 홀로 외롭게 밤늦게 "농수산부장관""건설부장관>"오원철 수석" 장덕진장관"등 국가를위해 생산성의 고도화에 앞장설 참모들 집을 예고없이 찾아 막걸리 한잔하며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며 희망을 찾아 외로웠으면서도 즐거워했다 합니다.원래 큰일을하려면 당연히 외롭다는 것입니다.시스템이 정착되어지는 한국의 정치문화가 되어지길 기대합니다.오늘 동아일보 5단광고 잘봤습니다...시골농부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