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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 ||
테크노크라트의 견해
일본정부의 조사단장인 아카사와(赤澤) 중공업국장은 사석에서 "현 단계에서 한국이 기계공업을 획기적으로 육성한다는 것은 사막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고 했다고 한다. 여기서 아카사와 국장은 일본 통상성의 엘리트 테크노크라트이고 이 때 동석했던 인사는 경제기획원의 에코노크라트였다.
테크노크라트의 코멘트 요지는 「기계공업이란 장기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것이지 의욕만 갖는다고 해서 일시에 이룩되는 것은 아니다. 섬유공업과 다르다는 뜻이다. 심지어 석유화학이나 종합제철도 공장준공 후에 제반 준수사항만 잘 지키면 제품은 생산되게 마련인데 기계제품은 시설이 있다고 해서 제품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주 조잡하고 간단히 설명해서 기술(제작도면)과 가공기술(기능사), 그리고 오랜 경험과 실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여기에 한국의 테크노크라트의 견해를 보탠다면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리고 「4대 핵공장」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장이 「중기계 종합공장」인데 이 공장은 현재 우리나라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장」과 똑같은 성격의 공장이고 규모도 거의 동일하다.
그렇다면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는 것보다는 국영기업체인 한국기계공장의 시설을 최신 기계로 보완해서 활용하는 것이 시간면, 기술면, 자금 · 경영면, 경험 · 실적면 등에서 유리하다. 현재 우리나라가 병기를 생산 못하고 있는 것은 기술과 가공능력이 없기 때문이지 시설문제는 아닌 것이다. 시설이 부족하다면 병기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시설을 약간만 보완하면 된다. 「한국기계공장」에는 일정 말기 잠수함까지 건조한 실적이 있다.
상공부, 자동차 부품공업과 조선공업 육성에 주력키로
다음에는 테크노크라트가 취한 기계공업 육성 발상을 알아보기로 한다.
김학렬 부총리가 상공부 소관 업무인 기계공업을 직접 다루기 시작했으니 상공부로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더욱이 필자는 1970년 1월 광공전 차관보로 부임했으니 기계공업 육성에도 총책임을 져야 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모든 기계공업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가장 파급효과가 크고 단시간에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업종 몇 개를 선정해서 집중 육성한다. 소위 「임팩트 폴리시」의 적용이다.
둘째, 수요전망이 커서 전문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업종이어야 하고 수출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피라미드식 CEOI 전략이다.
셋째, 출발단계로는 정밀기계 업종에서 하나, 철구조물 업종에서 하나를 선정한다.
이상과 같은 기준에서 대상에 떠오른 것이 정밀기계 업종에서 자동차 부품공업, 철구조물 업종에서 조선공업이었다. 업종 선정 기준 자체가 테크노크라트의 입장에서 엔지니어링 어프로치를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즉, 처음부터 사업 추진의 경제성을 하나하나 면밀히 따졌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 두 가지 업종 육성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업체(業體)가 아니고 업종(業種) 단위로 한 것이다.
해방될 때까지의 자동차공업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최초로 도입된 해는 1903년. 고종황제가 즉위 40주년을 맞아 미국 포드차를 수입했다.
1908년 포드 T형의 출현은 전 세계의 자동차업계와 자동차시장에 혁명을 일으켰다. T형 포드는 간결하고 신뢰성이 높은 설계와 새로운 합금강(合金鋼)의 사용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대량생산방식이기 때문에 값도 쌌다. 그래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1927년에는 최염가형인 "로드스터"의 값이 260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 T형 포드는 미국 외에 영국, 독일 등 세계 각지에서 조립되었다. 1908년 10월 1일의 발표부터 1927년 5월 26일 생산중지까지의 18년 반 사이에 기본적으로 같은 모델을 1,500만 7,033대를 생산하였다.
이렇게 되니 일본과 같은 후발국가는 미국의 자동차산업과 대항할 길이 없었고, 미국 차를 수입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용자동차의 활약상을 본 일본은 포성이 그치기도 전인 1918년 부랴부랴 「군용자동차 보조법」을 제정 공포했다. 그 골자는 군이 자동차 제조업자에게 막대한 보조금을 주어 군용차를 만들게 했다. 적재량 1톤 이상의 화물차 한대를 제조하는 데 3,000원의 보조금을 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구입하는 민간인에게는 별도로 한 대당 1,000원을 지급했고 1년에 600원의 유지보조금까지 주었다. 그리고 민간업자 마음대로 쓰라는 것이다. 다만 일단 전쟁이 나면 군이 징발하겠다는 취지였다.
다시 말하면 화물자동차 한대를 만들어서 파는 데 4,000원의 국가 보조를 하고 1년에 600원씩 보조하겠다는 것이니, 당시의 쌀값으로 계산하면 자동차 한 대에 대해 쌀 800가마를 보조하고 별도로 1년에 쌀 120가마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본 초기의 자동차공업육성책이었다. 군에서 필요해서 이루어진 조치이고, 그 대상은 승용차가 아니라 화물차였다. 이것이 일본의 자동차공업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1936년에 「자동차제조 사업법」을 제정했는데, 이 법은 자동차산업에 대한 강력한 보호육성책이었다. 이 법에 의해서 허가 된 회사가 도요타, 닛산, 이스즈의 3사이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자동차산업도 영향을 받아 승용차 생산은 중지되고 화물차만 만들게 되었다. 194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자동차 생산을 하려 해도 자재부족 상태가 발생하였다. 일본 군부는 항공기 제조에 열을 올리고 지상병기(자동차 포함)는 소홀히 했다.
전쟁 중 자동차 생산은 줄어만 갔다. 1941년에 4만 3천여대를 생산했는데, 다음 해인 1942년에는 3만 9천대, 1943년에는 2만 5천대, 1944년에는 2만 1천대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미군이 일본을 폭격하기 시작한 1944년말부터 1945년까지, 자동차공장을 지방에 이전(疎開라고 칭함)시키느라고 법석을 떨다가 1945년 8월 15일 종전을 맞게 되었다.
이상이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까지의 일본 자동차업계의 실상이다. 일본조차 이러한 상태이니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이란 존립할 수가 없었다. 다만 새차(新車)가 나오지 않으니, 수리해서 쓰고 고장나면 또 수리를 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고장이 잦으니 운전사는 누구나 자동차 수리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어떤 의미에선 운전사라기보다는 자동차 수리공이 운전을 부업으로 하는 격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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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되어 우리나라에는 자동차 수리 숙련공이 어느 정도 양성되었고 자동차 수리에 필요한 부품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표 9-3>이 해방 당시의 자동차관련 공장들의 일람도표이다. 이외에 보디공장이라는 것이 몇 개 있었다. 즉 차체(車體)를 수리하거나 제작하는 곳인데 완전히 수공업적 수준이었다.
이상이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 당시 갖고 있던 자동차공업의 전부였다. 일본 사람이 남기고 간 자동차공업은 완전히 황무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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