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공짜 술이 제일이고 다음은 외상 술이다. 옛 말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적어도 80년대까지 만 하더라도 술집 치고 외상장부 없는 곳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외상장부가 출근부나 다름없는 시대가 아니었는가 싶다. 지금의 청년들이야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술 실컷 마시고도 돈 없으면 시계 하나 풀어주면 그만이었다. 술집마다 외상 대용으로 풀어 주고 간 시계가 책상 서랍을 가득 메울 정도였다. 주머니 돈 십원 없어도 시계 찬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어깨 힘주고 마셨다. 그만큼 시계와 주당사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그런데 요즘이야 어디 그런가. 술 마시고 돈 없다며 시계 풀어놓았다가는 귀때기 왕복으로 맞고도 꿇어앉아 손이야 발이야 싹싹 빌어야 한다. 시계를 받아 줄 술집도 없을 뿐더러 시계가 땅바닥에 떨어져도 허리 아파 줍지 않는 시대가 됐다.
지나간 80년대 일이지만 시계 때문에 일어난 재미난 사건 하나를 추억 삼아 예기해 볼까 한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학창시절 별정 맞게 술을 좋아하는 녀석이 있었다. 이름하야 '황말통'이다. 성이 황씨인데다 막걸리 한말정도는 우습게 해치우는 남다른 배를 가졌다.
자기 딴엔 풍류를 즐긴다면서 다른 사람 밥그릇으로 마시면 이 녀석은 꼭 우동 대접으로 막걸리를 마신다. 군복처럼 생긴 옷엔 항시 몇 방울의 막걸리 자국이 남아 있어야 정상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숙생 시절 다 그랬듯이 입은 옷 또 입고 빨아야지 하다가는 또 입고 그러다 보면 계절이 바뀔 때가 돼야 겨우 한번 정도 세탁하는 표본이었다고 할까.
하여간 이 녀석이 겨울방학을 끝내고 돌아 왔는데 몇 번 잡혀 먹었던 지난 시계가 어디 가고 왼쪽 팔목에 처음 보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시침과 분침이 돌아가는 시계가 아니라 검은 판에 녹색 형광 숫자가 표시되는 그런 시계였다. 이른바 전자시계(솔라)였다. 친구들의 광기 어린 시선은 그의 왼팔을 가만두지 않았다. 획책과 꼬득임으로 술판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대여섯 명이 평소 잘 가지 않던 막걸리 집으로 향했다(자주 가는 집에는 외상값 종용 때문에 술맛이 떨어지기 때문).
그러나 서로간의 속마음은 달랐다. 황말통은 시계를 풀지 않고 갹출로 술값을 해결한다는 전략이었고, 나머지는 그 시계에 기대어 코가 삐뚤어지게 마실 심상이었다. 당시 가격으로 4만원을 넘어가는 고품격 시계였기 때문에 이런 기대는 가능했다.
술을 꽤나 마셨을까, 도연명 선생의 '만가시'(오직 살아 생전의 한은 마냥 술을 마시지 못한 것이라 했다...)가 나오고, 정철 선생의 '장진주'(한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가 흘러 나왔다. 분위기가 상승곡선을 타고 있을 무렵 전자시계를 찬 황말통이 화장실에 갔다 온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항말통이 돌아오지 않으면 우리는 꼼짝없이 도망을 감행해야 하는 현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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