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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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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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안창호 선생 순국 68주기

연일 TV에서 흘러나오는 정치권의 상호 비난과 대통령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이 나라의 평안을 바라는 민초들의 가슴을 자꾸만 울적하게 하고 있다. 상생의 정치는 그야말로 국어사전에만 있는 것이고, 국회의원들은 무늬만 국민의 대변자이지 실상은 그럴듯하게 포장된 고급 잡배들인 양 계산된 자기 정파의 이익을 위해 수준 이하의 헐뜯기에 안달인 욕나오는 짓거리들에 빠져 국민의 분노와 아픔을 망각하고 있다.

언제부터 그네들이 그리 정의와 국민을 위했다고 이리도 설치고 다니는지, 다들 나라를 위한다는데 진정 나라를 위하는 지도자가 보이지 않으니 자꾸만 초야와 같이 목숨을 내놓고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진정한 지도자가 마음 사무치게 그리울수가 없다.

마침 10일은 평생을 조국 해방과 민족의 번영을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순국 68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를 추모하는 추모식이 10일 오전 10시, 강남구 도산공원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는데 이번 순국 68주기 추모식에는 최근 혼란한 정국 속에 위대한 지도자의 정신과 가르침을 되새기려는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헌화가 줄을 이었다.

정근모 도산기념사업회 회장과 박유철 국가보훈처장, 김국주 광복회 회장, 구치모 흥사단 이사장의 추모사와 추념사가 이어지고 시인 문형렬이 도산 선생에게 바치는 헌시를 낭독한 이번 추모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그리움에 차게 했다. 왜 이미 70여년전에 서거한 도산과 같은 지도자가 이리도 그립고 애타는 마음으로 탄식이 나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작금의 정치판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1878년 11월 9일 평안남도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사를 짓는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2살 때 노남리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김현진이라는 선비에게 글다운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이 무렵 같은 서당에 다니던 서너 살 위의 필대은과 친분을 맺으면서 신학문에 접하게 되었다 전해진다.

19세 때 도산 선생은 서재필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 독립협회 관서지부를 결성하였으며, 쾌재정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첫 연설을 함으로써 탁월한 웅변가로 명성을 떨친다. 이후로 독립협회 활동을 계속하면서 약관의 나이 21세에 점진학교를 설립하여 민중에게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다.

1905년 미국에서 조직한 공립협회는 2년도 채 안돼는 단기간에 600여명의 회원을 모을 정도로 힘있는 단체로 성장한다. 공립협회가 자리를 잡고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게 되자 도산 선생은 1907년 국내로 돌아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애국지사들의 구국운동을 뒤에서 총 지휘하였다. 이 무렵 일본 총독 이토가 약관의 나이 29세의 도산 선생을 만나 소위 도산 내각을 만들자는 제의를 해왔으나 이를 일축한 후로 일경의 요주의 인물로 주목을 받는 처지가 된다.

1909년 도산 선생은 국내 최초의 청년운동단체 청년학우회를 창설하는 등 전 국민을 상대로 조직화 운동에 착수하던 중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서울 용산의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2달 만에 석방된다. 1910년 한일합병이라는 역사적인 국치를 눈앞에 두고 해외 망명길에 오른 도산 선생은 북경, 상해, 블라디보스톡 등지를 유랑하면서 해외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과 합동으로 청도회담을 개최하였으나 그 결과는 암담했다. 하여 도산 선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를 조직하여 이끌었고, 1913년에 드디어 흥사단을 창립하게 된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도산 선생은 중국으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기초를 확립하고 국민대표회의를 여는 데 힘썼으며, 한국독립당을 만든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본격적인 반일 투쟁을 위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려고 노력하던 중 선생은 불행하게도 이듬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끌려오게 되었다. 결국 국내에서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도산 선생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3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난다.

도산 선생은 말 그대로 오로지 나라와 겨레를 위한 삶을 살았다. 도산 선생의 육십평생 가운데 그 전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두어졌으며, 후반은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바쳐졌다. 선생은 실제로 평생을 자신과 가정의 편안함을 돌볼 겨를도 없이 오로지 위기에 처한 나라와 겨레를 구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마침내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른 끝에 타계한 선생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앞장 서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 진정한 애국적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도산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반세기가 지났다. 하지만 도산 선생은 아직도 우리들 가슴속 깊이 살아 있다. 진정한 나라 사랑의 그 한길을 가는 우리의 정치인, 지도자는 진정 없는 것인가. 지금의 정치인들이 도산 선생과 같은 선열들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반이라도 따라가려고 노력한다면 지금과 같은 작금의 나라꼴이 조금은 나아질텐데..

다 들 자기가 다 옳다고 목청 높여 삿대질을 해대는 역겨운 정치인들, 마치 자기네들만 나라를 걱정하고 자신들의 나라 걱정 방법이 최고인 양 겸손의 자세를 망각하고 상대편의 말을 존중할 줄 모르는 사이비 정치 집단들, 삼일절날 국가 최고의 지도자 반열에 있는 국무총리가 선열의 정신을 기리며 보내지는 못할망정 시정 잡배들과 골프질을 하고서도 스스로 책임질줄 모르고 그 자리에 계속 버티고 있는 실망스런 모습, 술취해 여기자를 성추행을 하고서도 스스로 반성하여 국민에게 사죄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져 눈치를 보는 기막힌 서커스같은 모습들...

참으로 도산 선생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사무치는 날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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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2006-03-10 23:45:05
누가 이 나라를 언제부터 이렇게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 양분되게 양극화로 만들었나요? 지들끼리 코드 맞춰 안맞으면 분노의 굿판을 벌리자들이 누군냐고요. 상생 좋은 것이죠 누구는 하기싫어서 안하나요. 고노무시끼들이 지들끼리 질랄발광하니까 문제지요.

도산공원 2006-03-12 13: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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