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너는 저만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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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너는 저만치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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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12> 김광섭 “산”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不動)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神)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 와룡산산은 신경질이 나면 젖빛 안개 속에 몸을 슬쩍 감추기도 한다
ⓒ 경상남도^^^
 
 

내가 살던 고향에는 동서남북으로 500미터 남짓한 산들이 어깨에 어깨를 걸고 우리 마을을 마치 새둥지처럼 푸근하게 감싸안고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사방팔방을 둘러보아도 하늘처럼 끝간데 없이 환하게 열린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간혹 우리 마을에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그 높은 산과 산들이 서로 우쭐대며 키재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빈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산봉우리를 이마에 덩그러니 매단 산들은, 어느새 우리 마을을 향해 황소처럼 음메, 하며 납작하게 엎드리곤 했습니다.

우리 마을 산들은 아침이면 긴 그림자를 끌고 어김없이 우리 마을로 내려와 아직 잠에 취한 사람들을 깨우다가 대낮이면 어느새 제 자리에 얌전하게 앉아 봄이 온다고, 봄이 온다고, 뻐꾹 뻐꾹 울곤 했습니다. 또 그렇게 울다 지치면 어느새 바알간 노을을 물고 우리 마을로 다가와서는 포근한 어둠의 이불을 깃털처럼 덮어주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마을에 있던 남산과 북산은 무엇을 했을까요? 동산은 해가 뜰 때마다 열심히 우리 마을로 내려와 따사로운 햇살을 걸어놓고, 서산은 해가 질 때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을 편안하게 잠재우고 있을 때, 남산과 북산은 그냥 빈둥빈둥 놀고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남산은 한낮이면 아지랑이를 일렁거려 들판의 곡식을 기르기도 하고, 밤이면 미리내에 무수한 별들을 띄워놓고 우리들의 꿈을 환하게 피워 주었습니다. 북산은 대낮이면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 농민들의 땀방울을 훔쳐주다가, 밤이면 북두칠성을 하늘 높이 띄워 캄캄한 밤길을 걷는 사람들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산은 늘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다가오지도 또한 너무 멀리 떠나지도 않고 늘 저만치에 서서 우리 마을과 우리 마을사람들을 사계절 내내 지켜주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지켜 주었고, 우리 자식들의 자식들을 또 그렇게 지켜줄 것입니다.

이산 김광섭 시인이 바라본 그 산처럼 우리가 바라보는 산들은 그렇게 말없이 서서 오늘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또한 산 스스로도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되듯이 그렇게 사람을 다스리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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