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파천국 라틴아메리카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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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파천국 라틴아메리카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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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여 울지마오' <에비타>의 신화(29)

^^^▲ 5월 혁명이 일어났던 광장
ⓒ 뉴스타운^^^
탱고, 탱고

햇볕이 인정 사정없이 쏟아지는 남미대륙은 어디를 가나 한가롭고 낙천적이다. 못생긴 고구마처럼 파나마 운하 이남으로 기다랗게 뻗친 이 대륙은 11개국의 인구 2천 435만 명이 살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지대.

물가가 1년 동안 곱절씩 뛰는 인플레, 극심한 빈부의 격차 속에서도 남미 사람들은 여자를 몹시나 사랑한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마냥 휘파람을 불어대며 노상 음악을 벗삼아 산다. 돈이 만능이거나 전부가 아니고 삶을 즐기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관인 것처럼, 남미대륙의 기질에는 어느 나라와도 통하는 데가 있다.

탱고로 이름났으나 마라도나를 영웅으로 받드는 축구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흡사 팜파(초원)천국이다. 호화롭고 겉치레가 많은 중, 북미의 각 국 공항에 비해 '에세이사' 공항은 남미 최대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관문 치고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비행장은 초원에 그대로 두어 가락 활주로를 깔아놓은 듯 했으며, 공항의 청사 규모도 우리들 시골의 정거장 같은 모습이었다. 꾸밈없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기질 탓일까. 입국수속도 하는 둥 마는 둥 간소하기 짝이 없었다.

도심에 들어서 본 아르헨티나의 첫 모습은 인도에조차 한자 높이의 잡초가 무성해 있는 풍경이었다. 역시 초원국가이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도심에 파헤쳐 놓은 하수도관을 몇 달째 방치해 놓기 예사라는 말을 듣고 또 한번 이 나라 사람들의 기질을 엿볼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는 '은의 왕'이란 말뜻대로 남미에서 일찍이 개발되고 최초로 독립을 누린 나라. 전 인구 2천만명 중에 98퍼센트가 백인인 데다가 적어도 지난 백년동안 '제2의 파리'라고 자부할 만큼 유럽의 문화권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도 퇴색된 빌딩을 전통처럼 아끼며 허물지 않은 채 지니고 있다. 1920년대 식 포드 승용차의 몸체를 개조해서 그대로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오히려 본 바닥인 유럽보다 문화에 대한 집착이 강해 보였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이웃인 브라질이나 볼리비아에 여행할 때는 라틴아메리카에 간다고 말한다는 것.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낙천적인 모습은 주말이면 쉽게 엿볼 수 있다. 인구 7백만의 남반구 제일의 도시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매주 금요일 밤부터 주말까지 마치 온 시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듯한 인파를 이룬다. 특히 토요일 밤은 데이트의 극치.

일류 레스토랑은 밤 8시에 분을 열며 영화의 최종편도 새벽 1시 짜리가 있는 극장을 보았다. 시내 버스나 지하철도 철야운행, 거리의 모퉁이마다 스탠드 꽃집이 많아 카네이션, 장미 등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젊은이는 오랭캐 꽃이나 카네이션 한 송이를 옷깃에 꽂고, 번쩍번쩍 닦은 구두를 신고 멋을 부린다. 그것이 전형적인 아르헨티나 멋쟁이들의 자랑.

밤이면 젊은 쌍쌍들이 무릎을 서로 맞대다시피 껴안고 선 채 속삭이는 모습은 한 블록마다 한 쌍씩 으레 눈에 띈다. 기자가 탄 택시를 몰던 어느 나이든 운전사는 한 쌍의 '젊은 포응'을 보고, "저것들을 우루과이로 내쫓아 버리지"하며 혀를 끌끌 찼다. 나이 든 운전사의 눈에는 요즈음 젊은이들의 포옹자세가 무척 눈살 찌푸려지게 보였던 모양이다.

"어르신에게도 저런 젊음이 있었을 텐데요....."했더니 게면쩍은 듯 씨익 웃고 만다. 그런 모습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기자의 뇌리를 스쳤다.
주말이면 교통순경조차 아예 일찌감치 뺑소니친다. 그래서 네거리에서 마주친 자동차들은 서로 적당히 비켜 가기가 예사. 반면에 낮에는 서울만큼이나 교통순경이 많은 것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보통 20 미터에 한 사람씩은 서 있는 듯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징병제도는 있어도 전쟁이라곤 없는 이 나라에서는 경찰에 1년 동안 복역하면 병역의무를 마친 것으로 해준다는 것. 월급이 1만5천 원 꼴 되는 이들 경찰관은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잡담이나 하며 지내다가 정오만 되면 슬그머니 새버리기 일쑤라고 한 택시 운전사가 핀잔을 했다.

^^^▲ 코리엔테스 대로와 시 제정 400주년을 기념하는 탑
ⓒ 뉴스타운^^^
팜파의 대지

독재자 페론 당시의 노동자 우대정책으로 아르헨티나는 노는 날도 숱하게 많다. 매주 토, 일요일은 연휴. 국가의 축제일이 연중 17일에다 법정 유급휴가가 연 20일, 그 뿐만이 아니라 '지방 수호신의 날', '은행의 날', '스승의 날', '비서의 날' 등 걸핏하면 하루 놀만큼 노동자 천국이다.

또 아르헨티나 사람만큼 쇠고기를 좋아하는 육식인도 드물다. 국민들의 1인당 쇠고기 소비량은 50킬로, 하루 섭취하는 평균 칼로리는 7천~8천으로 한국의 도시민 하루 평균 권장량 2천3백 칼로리의 3배가 넘는다. 기자는 일행을 안내해준 현지인의 안내로 라플라타 강가의 거리에 즐비한 불고기 집을 보고 놀랐다.

넘버를 쭉 붙여 60여 개소나 되어 보이는 불고기 집은 풀무집 같은 연통을 세우고 사방 5미터는 족히 되는 큰 화덕에 숯불을 피우고 각종 불고기를 굽고 있었다. 식탁의 메뉴는 무려 64가지에 1인분이 90페소(한화 3,600원) 에서 980페소(39,200원)에 이르는 것도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불고기는 아사도, 이 고기에 포도주나 남부지방 특산인 애플와인을 마시면서 정담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여긴다. 그래서 직장의 점심시간도 두 시간씩 걸린다. 아르헨티나에서 팜파를 가보지 않거선 아르헨티나의 본질을 실감하지 못한다.

기자는 한국개발공사가 경영하는 남부 리오네그로 주의 라마르케 농장까지 1천 300킬로를 고속버스를 타고 팜파를 지나가 보았다. 언덕하나 없는 질펀한 초원은 흡사 '풀밭의 바다'라는 느낌. 이 같은 팜파는 남북한을 합친 국토 넓이의 3배에 가까운 60만 평방킬로라니 얼마나 넓은 초원지대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 초원에는 크고 작은 16만개의 목장이 있어 사방 어디를 둘러보나 소나 양을 기르는 목장이 눈에 띈다. 특히 리오네그로 주의 리오콜로라도에서 초일레초일레 시에 이르는 22번 고속도로는 전장 136킬로가 먹줄을 한 줄로 튕겨놓은 듯한 직선도로로 돼 있었다. 이 고속도로 가에는 차에 치인 타조나 소의 시체가 나뒹굴어져 있기도 했다.

'팜파여 잘 있거라 나는 간다. 드넓은 대지 위를 달려서 나는 간다.' 유명한 탱고에서도 표현된 것처럼 끝없는 대지의 바탕은 가우쵸(牧童)의 남만과 낙천적인 인생관을 싹트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잘 먹고 잘 마시고, 탱고나 들으며, 여인과 더불어 인생을 즐기자'는 아르헨티나의 어머니로 여기는 팜파의 평원성(平原性)에 연유됐는지도 모른다.

수와 포르테뇨스의 우수

일종의 향수와 착잠한 기분, 이것이야말로 아르헨티나의 코스모폴리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푸는 열쇄다. 주민은 대대로 '포르테뇨스(항구의 사람들)'라고 불리어 왔다. 라플라타강 하구에 발달한 이 도시의 사람들은 고향에 대하 애틋한 감정을 품고 유럽에서 건너 온 사람들의 후예들이다.

조상들이 이 땅에 들여온 향수와 고독은 지금도 이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 인이란, 나폴리 엑센트로 스페인어를 말하고 자신을 영국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탈리아인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아르헨티나인보다 피부가 희지 못한 라틴아메리카의 이웃 국민들이, 그들에 대하여 아르헨티나인이 우월감을 표시할 때에 내 뱉는 말이다. 이민국가라는 점에서는 미국이나 브라질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나라에서는 다른 나라보다도 이주자 의식이 아직도 강한 것일까?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주자의 대다수가 이탈리아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자손들도 이탈리아가 제1의 조국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가진, 딴 곳과는 격리된 응집작용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국가 속의 국가, 이를테면 그 자체가 도시 공화국이다. 이 도시는 환상고속도로에 의해 외부와 차단돼 있기 때문에 향수가 그대로 보존돼 있었던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민들에게 있어서 마지막 항구이자 최후의 목적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공간에 저항하는 것이 그들의 존재이유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와 같이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사이에서 특이한 직위를 차지하고 있다. 평범하고 아무 매력도 없어 보이는 도시이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알고 나면 참으로 흥미 있는 도시이기도 하다.

^^^▲ 에바페론
ⓒ 뉴스타운^^^
'아르헨티나여 울지마오' <에비타>의 신화

지난 1997년 전세계는 한 여자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죽음을 그린 영화 <에비타>에 주목했다. 이미 그녀에 대한 전설적인 삶과 사랑은 <아르헨티나여 울지 마오>라는 노래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아 온 지 오래이다. 한마디로 이 노래 덕분에 아르헨티나라는 국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정도로 이 노래는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세기의 가수 마돈나의 얼굴로 스크린 위에 그려진 여인, 에바 페론.
미국이나 유럽도 아닌 남미의 개발 도상국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안주인이었던 그녀가 죽은 지 45년 만에 다시 우리들 가슴 속에서 부활한 것이다.

그녀의 인기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필리핀의 이멜다와 버마의 아우산 수지, 그리고 지나치게 총명한 미국의 힐러리가 있지만, 이들은 에바 페론이라는 한 여자의 인생 역정을 따라 올 수가 없다.

거리의 부나비에서 대통령의 부인으로

그녀는 1919년 아르헨티나의 대초원 로스 톨도스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이 일하던 농장 주인과의 상이에서 다섯 명의 사생아를 낳았는데 그 가운데 넷째로 에바가 태어났다. 이런 이력과 계급성은 그녀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들을 발판 삼아 권력의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 출발점이 됐다.

아무도 기뻐하거나 돌보지 않았던 사생아 시절에서부터 대통령의 안주인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어야 했던 인생 역정은 그래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그녀의 입지전적인 삶을 통해 오늘날의 우리는 일종의 대리 만족을 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

그녀는 열네 살이 되자 간단한 옷을 넣은 가방 하나만을 들고는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도시 생활이라는 것이 모든 게 낯설고 어려운 삶이었지만, 타고난 미모 덕택에 그녀의 삶은 공장 노공자의 그것과는 처음부터 달랐다.

낮에는 삼류 배우로 활동하면서 밤이면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날아다녔다. 때로는 하룻밤의 열정으로, 때로는 짧은 동거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불나비처럼 떠돌던 그녀가 후안 페론이라는 육군 대령과 만나 긴 동거 생활에 들어가게 된 것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됐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넷이었고, 후안의 나이는 마흔여덟이었다.

정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후안 페론은 히틀러의 사회주의를 내걸고 선거를 치러 당선됐다. 페론이 대통령이 된 것은 앞 뒤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며 선거운동을 했던 그녀의 절대적인 역할 때문이었다.
그녀의 존재가 페론에게 얼마나 절대적인가를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은 무수히 많다.

페론이 자유민주주의 성향이 큰 '반페론 주위자들'에게 감금 됐을 때, 그녀는 미모와 정열과 수류탄과 돈으로 밤낮 가리지 않고 노동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매수하고 사주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이뤄졌고 그 덕택에 후안 페론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에바 신화'에 감동한 노동자들이 후안 페론을 지지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후안은 에바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니지 못한 하층 계급의 지지율을 그녀는 갖고 있었다.

"에바. 우리 결혼합시다."

후안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직전 장기적인 동거 생활을 청산하고 떳떳하게 결혼하자며 에바에게 제의를 했다. 에바가 하층 계급을 단결시키면 그 힘이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집결된다는 것을 후안은 이미 알고 있었다.

페론주의를 내걸고 선거에서 승리한 것은 후안이었지만 페론주의를 추동하고 선봉에서 이끈 것은 에바였다. 페론주의는 애국자본주의를 우선 아르헨티나에서 몰아냈다 그 위험하고도 과감한 조치를 그들은 페론주의에 입각해 거침없이 취해 나갔다.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노동장들의 생활과 권익을 위해 법을 만들고 실행에 옮겼다. 한순간에 노동자들의 생활이 신장됐다.

남녀 노동 임금에 대한 차별도 거의 사라져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90%에 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처럼 근접한 임금은 사실상 힘든 일이었다. 또한 여성들의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평등을 입법화했다. 여성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등 여성들의 활동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에바와 후안을 환호하며 그 동안 고통받고 억압당하며 살아왔던 자신들의 운명을 바꿔 줄 인물로 믿고 광적인 지지와 열광을 보냈다.

^^^▲ 팔레르모 공원
ⓒ 뉴스타운^^^

독재자의 면모

대통령의 아내가 된 후 그녀는 자신이 마음대로 정권을 주무를 수 있도록 교묘히 자기 사람들을 내각에 임명했다. 또한 자신과 남편에 대한 우상화 작업에 들어갔다. 한마디로 김일성 우상화 작업과 다를 게 없었다.

초등학교에서는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는 글짓기 숙제를 해야 했으며, 에바를 차양한 자서전 <내 인생의 사명>을 배웠다.

우상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그녀의 독선을 염려한 나머지 반대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은 소리 없이 잡혀가 고문 당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당하는 일도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이제 그녀 때문에 흘린 눈물이 그 여자가 닦아 준 눈물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녀가 도움을 준 사람들로부터는 성녀로 통했지만, 고통을 당한 사람들은 악녀라 불렀다. 따라서 그녀는 거룩한 악녀였고, 천한 성녀로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에바의 생활은 나날이 사치스러워졌고, 군부의 권력은 하늘을 찔렀다. 대통령의 안주인에게 내맡겨진 아르헨티나 정부는 나눠먹기 식으로 이권을 챙기는 등 부패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국가의 기간산업을 확충한다는 미명 아래 무리한 중공업 계획이 추진돼 경제가 기우뚱거리고 혼란이 가중됐다.

이런 와중에 에바는 척수백혈병과 자궁암 선고를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남은 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노동자와 빈민들을 만나고, 여성들 정치적인 기반을 잡을 수 있도록 조직을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말없이 저 세상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줬으며 또 한편으로 고통의 눈물을 흘리게 했던 에바. 장례는 아르헨티나 국장으로 치러졌다. 한달간 아르헨티나는 에바라는 한 여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뻐하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에바 페론이 없는 아르헨티나는 곧 혼돈 그 자체였다. 더 이상 후안 페론은 대통령에 머물 수가 없었다. 후안 페론에 대한 카톨릭의 반대가 심해지자 그는 권력을 이용해 카톨릭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페론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었던 군부에게 쫓겨나 1955년 해외로 망명하는 불운을 겪게 됐다.

20년간 떠돈 에바의 시신

정권을 잡은 새 군부는 제일 먼저 '페론주의'를 없앴다. 그리고 아직 에바 페론의 노동자와 여성을 중심으로 뿌리 깊게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의 시신을 비밀리에 이탈리아로 빼돌리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에바 페론의 시신을 당장 돌려 보내라."

페론주의를 지지하는 일부 국민의 거센 반발과 압력에 의해 1971년 이탈리아에 있던 그녀의 시신은 후안 페론이 망명가 있던 스페인의 마드리드로 넘겨졌다. 여기서 에바의 시신은 또 한번 후안 페론을 위해 기적을 일으킨다.

그 당시 아르헨티나는 잦은 정권 교체와 악성 인플레이션, 엄청난 실업률로 인해 혼란과 빈곤, 그 자체였다. 노동자와 빈민들은 당연히 그 옛날 '에바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에바를 정신적 지주로 삼아 좌경 세력을 결성하고 투쟁의 기치를 내세우는 집단들이 늘어났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총파업이 이어지며 유혈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에바는 소원대로 죽어서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후광을 보내고 있었다. 정국의 혼란을 수습할 기력이 없는 군부는 망명 상태였던 '후안 페론'의 귀국을 허용했으며, 뒤이어 선거를 실시했다.

197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에바의 후광을 업고 후보로 나온 일흔여덟의 후안 페론은 아르헨티나 선거사상 가장 높은 지지율인 61.85%를 얻어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는 기적을 보여줬다.

노동자와 여성들은 에바가 저승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르헨티나를 도와줬다고 말했다. 그러나 페론 대통령은 노령에다 심장마비로 권자에 오른 지 열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망명지에서 결혼한 이사벨 페론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이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에바의 관을 자신의 관저로 옮겨 놓는 일이었다. 비록 죽었지만 에바가 있는 한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 에비타'의 효험은 그녀에게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남편을 가로챈 여인을 죽은 사람인들 좋아할 리가 있을까. 결국 세계 최초의 이 여자 대통령은 21개월 만에 군부의 쿠데타로 물러나고 말았다.

대통령의 관저에 극진히 모셔져 있던 에바의 관도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에 안치됐다. 죽은 지 24년만에 비로소 그녀는 정열을 바쳐 일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의 흙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누가 그녀로 하여금 깊은 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였는가?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조국 아르헨티나에 묻혔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가 이룩한 전설적인 신화를 들으며 지금도 열광하고 있다.

지난 1997년 영화 <에비타>로 그녀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다시 한번 복원됐고 세계인들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거리의 창녀에서 대통령의 안주인으로, 독재자로, 그리고 노동자와 여성을 사랑한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입지적인 여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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