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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길위에 떨어진 은행잎을 하나 보았다. '벌써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지나치려다 문득 큰아이 숙제중에 '낙엽 주워오기'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곤 낙엽을 주워 책갈피 속에 꼽아 넣었다. 꼭 읽어 보려고 오래전 장만해 놓았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긴 전철 여행속에서 읽으려고 마음먹고 골라온 이아무개님의 '아직도 쓸쓸하냐' 이다.

서가에 주르르 꼽힌 꼭 읽어야만 하는 책들에게 늘 밀리기만 하던 그 책이 왜 갑자기 손에 들리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아마도 가을이라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내 이성은 '아직 가을은 멀었어'라고 생각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을이 이미 내 가슴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는가 보다. 그래 오늘은 어쩐지 쓸쓸하다.

지하철로 바로 향하려다 낙엽이 불어온 반대 방향을 향해 바라보았다. 약간은 오르막인 그 길은 오늘따라 통행량이 적어 한적해 보였다. 그 조용한 길에서 느껴지는 알수없는 고즈녁함이 또한 나를 유혹했다. 나는 애써 그것을 뿌리치지 않고 한번 유혹에 따라보기로 했다. 나는 요즘 이렇게 내 속에서 바라는 것들에 대해 솔직해지는 경향이 있다. 굳이 굳센 나무처럼 우뚝서보려고 애쓰지 않고 그저 바람부는 대로 밀려다니는 떨어진 잎처럼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에 굳이 저항하려 하지 않는다.

길가에는 은행나무가 줄을지어 늘어서 있었다. 나는 이런 길을 걷기를 좋아한다. 아직도 젊지만 지금보다 조금만 나이가 덜 먹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길을 걷기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특히 깊어진 가을에 낙엽이 무수히 흩날리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다니는 것은 해마다 되풀이 되는 내 삶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걷고나면 속에서 들끓어오르던 무엇이 조금은 진정되곤 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내가 좋아하는 그 깊은 가을. 만추가 아니다. 길가의 나무들은 아직 푸른 잎으로 싱싱하게 바람을 앉고 있다. 도대체 저 나무의 어디에서 이렇게 잘 익은 잎새 하나가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내 속에서도 하나 둘씩 낙옆이 생기고 있는지 모른다. 싱싱하게 끓어오르던 욕망과 열정이 하나씩 숙성되어가면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누렇게 익어가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오늘처럼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길을 걸어보려는 유혹에 순순히 응하는 것은 아닌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나는 은행나무가 익은 잎들을 하나씩 떨구어 내듯이 내 몸에 붙어있던 수많은 조각들을 하나씩 없애고 있는 중이다. 명예도, 부에 대한 욕심도, 너무 많은 것을 성취하려는 마음도 버려가고 있다. 심지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열정마저도 나는 요즘 조금씩 줄여가고 있는 중이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열의가 사라진게 아니라 그 열정 자체가 순수한 사랑보다는 나 자신의 교만함에서 나오는 것만 같아서이다.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더 많은 것들이 떠어져 나간 나에게 남아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 것인지 궁금하다. 아니 내가 과연 벌거벗은 은행나무처럼 모든 것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리 길지 않았던 가을 산책을 마치고 길을 돌아서며 우선 떨칠수 있는 것부터 떨쳐내기로 했다. 일부러 잘라내지도 않고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지도 않으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더 자세히 갈고 닦고, 그리고 다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왠지 조금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