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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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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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동산부락

 
   
  ^^^▲ 내가 살던 마을 앞에는 맑은 시내가 흘렀다
ⓒ 사진/창원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향수' 모두

"니는 나중에 커서 유명한 글쟁이가 될끼다. 하지만 우리 같은 형편에 글쟁이로 하모 딱 굶어죽기 십상일낀데 이 일로 우짜것노. 예로부터 글쟁이는 배 부르고 등 따신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하는 짓거리 아이가. 그래도 한가지 기대는 거는 니가 저녁나절에 태어났다 카는 거 아이가. 그 시간에는 돼지가 저녁을 먹고 편안하게 잠자리에 누워있을 때거든. 하모. 니 사주팔자로 보모 큰 돈은 못 벌어도 평생을 먹고 사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꼬 나온다 아이가"

나는 1959년 12월 4일 저녁나절(유시), 경상남도 창원군 상남면 사파정리 동산부락에서 태어났다. 기해(己亥)년 돼지 해 마지막 달 초 나흘날에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으앙'하고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 그러니까 그해 춘삼월쯤 내 어머니는 푸르른 하늘에서 책비가 내리는 그런 희한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난 동네는 마을 한가운데 동그마한 야산이 있는 '동산'이라는 마을이었다. 당시 내가 태어난 동산부락에는 모두 60여호가 마치 장독대처럼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마을 앞, 들판이 독수리처럼 날개를 펴고 있는 남쪽으로는 비음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내가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시냇물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시내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40여호, 동쪽으로 10여호가 살았고, 시내 건너 남서쪽에 10여호가 살았다. 돌다리가 놓인 시내 건너 서쪽으로는 산머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랑이 밭이 된 '앞산가새'(앞산 비탈)라고 부르는 야산이 있었고, 그 앞산가새 아래 동산처럼 또 하나의 야트막한 야산이 있었다. 시내 건너 10여호는 이 야산을 중심으로 짚더미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내가 태어난 집은 동산부락의 한가운데 있는 일자형 초가집이었다. 정 남쪽으로 난 삽짝문은 싸리나무로 엮어져 있었고, 일자형 집은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마루는 정 남쪽으로 나 있었다. 담은 틈틈이 돌이 박힌 전형적인 황토담이었고, 마당에는 감나무 한그루와 가죽나무 두 그루, 그리고 봄이면 예쁜 연분홍 꽃이 아카시아처럼 조롱조롱 피어나는 그런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건평은 대략 40여평 정도였고, 대지는 모두 80여평 정도였다. 방은 큰방을 포함하여 모두 세 개가 있었고, 두개의 방은 남쪽에, 나머지 한 개의 방은 북쪽에 창고와 함께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방과 방 사이에 부엌과 창고가 있었다. 큰방은 부모님이 쓰는 방이었고, 큰방 옆의 작은 방은 우리들의 방이었다. 그리고 부엌과 창고가 있는 북쪽의 방은 외할아버지가 쓰는 방이었다.

큰방의 방문은 남쪽으로 나 있었고, 북쪽으로는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작은 방 또한 남쪽으로 문이 나 있었고, 작은 문이 하나 서쪽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가 쓰는 방의 방문은 서쪽으로 나 있었고, 남쪽으로는 부엌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하나 달려 있었다.

마당도 세 개가 있었다. 그 마당은 해마다 봄이 오면 아버지께서 붉은 황토를 깔아 마치 신작로처럼 잘 다져져 있었다. 그중 마당 하나는 삽짝문이 달린 남쪽으로 나 있었고, 서쪽으로는 제법 넓찍한 마당, 가을이면 타작을 주로 하는 그런 마당이 있었다. 서쪽으로 난 마당의 북쪽 한 켠에는 장독대와 절구통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북쪽으로 난 뒷마당도 하나 있었는데, 그 뒷마당에는 주로 풋고추와 고구마, 배추, 참깨 등을 심는 밭이었다. 그리고 그 밭에는 앞집의 감나무가 우리들 손이 닿을 정도로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마당은 나 있지 않았으나 골목길처럼 좁은 길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었다.

내가 태어난 동산부락은 오씨들의 동네였다. 시내 건너 마을 앞에 있는 널찍한 마당산인 '마당뫼'와 우리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논과 밭들이 그 오씨들의 소유였다. 말하자면 오씨들이 우리 마을의 대지주였던 셈이었다. 그래서 이 마을로 들어와 정착한 40여호 가까이 되는 마을 사람들은 그 오씨들의 논과 밭에서 주로 '갈라먹기'(소작)농사를 지었다.

아버지 역시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갈라먹기 농사를 지었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께서 붙이시던 갈라먹기 농사는 대략 2~3000평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창원 말로 '시근'(철)이 날 무렵까지도 아버지께서는 그 갈라먹기 농사를 계속 지었다. 그리고 내가 제법 어른이 되어 서울로 올라갈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땀으로 일구어 낸 우리 논과 밭은 약 5000평정도 되었다.

언제부터 경주 이가가 오씨들의 마을인 이 동산부락에 정착하게 된 것인지는 나도 아직까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언뜻 듣기로는 할아버지 때부터였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자랄 때까지만 해도 우리 마을에 있는 일가라고는 큰집 한집뿐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하다. 추측건데 아마도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와 결혼과 동시에 분가를 하면서 이 마을로 들어오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창원에 있는 경주 이가들은 봉림산 아래 '퇴촌'이라는 마을과 불모산 아래 '삼정자' 마을, 그리고 단감으로 유명한 진영과 진해, 거제도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 내가 아주 어릴 때, 한번은 아버지를 따라 그 퇴촌마을과 삼정자마을에 있는 경주이가 선산에 성묘를 하러 갔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게 떠오른다.

아버지의 형제는 2남2녀였다. 하지만 큰 고모(이수자) 한 분은 결혼을 한 뒤, 사할린으로 가신 이후부터 깜깜 무소식이라고 했다. 지금 만약 살아 계신다면 구순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담 하나를 경계로 살고 있었던 백부님, 그리고 진해에서 살고 있는 고모님이 아버지 형제의 모두였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직계 핏줄은 형님 한 분과 여동생 한 분뿐이었다.

또한 그렇게 동산부락에 정착하신 할아버지께서는 제대로 살림기반을 닦기도 전에 그만 그 지독한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다. 1946년 당시 호열자가 전국을 휩쓸어 수천 명이 죽었다고 했다. 그때 당국에서는 호열자로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끌어모아 지금의 봉림산 아래 솔밭에서 밤낮으로 태웠다고 했다. 나의 할아버지께서도 그 솔밭에서 태워진 뒤 뼛가루 한줌만 달랑 돌아왔다고 했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자, 둘째인 아버지에게 돌아올 유산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은 백부님이 내주신 찐쌀 한말이 전부였다고 했다. 그것도 어머니와 결혼을 하실 때 특별히 내주신 것이라고 했다.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버지께서는 고생을 덤으로 하셨다.

언뜻 듣기로는 결혼을 하시기 전의 우리 아버지는 우리 마을의 지주였던 그 오씨네 집에서 머슴살이까지 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고달픈 삶을 살다가 어머니와 결혼을 하신 우리 아버지. 그래, 아버지께서는 그 머슴살이를 했던 인연으로 마을 사람들보다 더 많은 갈라먹기 농사를 지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허리띠 졸라가며 쪼끔씩 모은 돈으로 5000여평이나 되는 논과 밭을 장만했던 것이었다. 말 그대로 육체를 바쳐 땅을 사들였던 셈이었다.

또한 아버지께서 오씨들의 땅을 구입할 때 어머니의 공도 몹시 컸다고 했다. 어머니의 가계는 우리 마을의 그 오씨들과 가까운 친척지간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오씨들의 집안 잔치가 있을 때마다 우리들을 데리고 다니며 일일이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씨들의 피와 같은 그 땅을 아버지께서는 보다 쉬이 구입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금도 우리 4남1녀의 형제들은 그 오씨들과 몹시 가까이 지내고 있다. 그리고 만나면 서로 서로 집안의 어른들에서부터 아이들까지에 대해 일일이 안부를 묻고 있다. 그리고 뒤에 알게 된 일었지만 우리 마을의 그 오씨들은 지금 마산에서 <도서출판 경남>이라는 출판사를 하고 있는 시인 오하룡 선생의 일가들이었다.

나는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전후에는 나라 안에서 여러 가지 큰 일들이 무척 많이 일어났다. 내가 태어나기 불과 3개월 전인 1959년 9월 17일에는 초대형 태풍 사라호가 영호남지역을 강타했다. 이때 죽은 사람만 해도 832명이었으며, 실종자가 302명이었다. 1천여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사라호란 그 얄궂은 태풍의 이름 아래 스러져 갔다. 그리고 부상자가 2천218명이었으며 이재민은 39만 여명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그 이듬해,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 채 4개월을 갓 넘겼을 무렵, 마산 앞바다에서 한 어부의 그물에 의해 그동안 사라졌던 김주열의 시체가 떠올랐다. 얼굴에는 최루탄이 박힌 채로. 마산과 창원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마침내 3.15의거가 일어났고, 그 의거가 기폭제가 되어 그 유명한 4.19혁명이 일어났다. 내가 태어난지 불과 5개월을 갓 넘겼을 무렵이었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태어났다. 사라호가 우리나라를 마구 할퀼 때 나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7개월쯤 된 태아로 있었다. 그리고 태어나 4개월 남짓 되었을 때, 옹아리 속에서 마산의 3.15의거를 지켜보았으며, 5개월 남짓 되었을 때 역시 옹아리 속에서 4.19혁명을 지켜보며 그렇게 자랐다.

그리고 이듬해, 내가 마악 걸음마를 시작한 세 살 때인 1961년 5월 16일에는 박정희 소장이 중심이 된 이른바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나는 불과 세 살 때부터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군사정권 아래서 그렇게 철저하게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라날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 나는 머리에 뿔이 달리고 얼굴이 새빨갛게 칠해진 그 공산당이라는 도깨비가 그려진 그런 포스터를 바라보며 자랐고,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이라고 전봇대마다 붙여진 그런 표어를 바라보며 자랐다. 그리고 해마다 오뉴월이면 그 무시무시한 '보릿고개'를 겪어야만 했으며, 해마다 겨울방학이 다가오면 해와 달이 떠오르는 그 비음산을 넘어 나무를 하러 다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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