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청택, 남구새마을회 남,녀 지도자 농어촌 체험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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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청택, 남구새마을회 남,녀 지도자 농어촌 체험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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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청택, 남구새마을회 남,녀 지도자 농어촌 체험 특강

▲ 우청택/ 전 제주병무청장. 대구천사후원회 회장. 대한민국 순직소방관추모회 고문.     ⓒ 뉴스타운
▲ 통영 한려수도 미륵산 ‘그린 케이블카’   ⓒ 뉴스타운
남구청(청장 임병헌) 남구새마을회( 회장 서상기. 협의회장 김동원. 부녀회장 서금례)는 지난 22(화)일 남구새마을 서상기 회장을 비롯한 남여 지도자 40명은 새마을 운동의 근본 바탕이 되는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함양하기위해 2011년도 새마을 지도자 농어촌 체험 연수를 떠났다.

이날 아침 8시 정각 새마을 지도자 40명은 대명1동 동신점보멘션 앞에서 집결-경남 통영 농어촌 체험 연수에 필자도 참여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기회로 남구새마을회 지도자 연수에 기꺼이 함께했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시작, 새마을 정신을 바탕으로 농,어촌 생활환경의 개선과 소득 증대를 도모한 지역 사회 개발 운동으로 이날 지도자 연수에 참가한 내빈으로는 남구새마을회 서상기 회장을 비롯한 남구의회 김현철의장, 김동원 협의회장, 서금례 부녀회장이 참여했다.

남구새마을 지도자들은 농어촌 체험과 평소 공직자로 준비된 특별 강의에는 우청택 전 제주병무청장의 새마을과 관련된 주옥 같은 한국의 현대 경제 발전사를 주제로 유익한 강의을 경청하고, 지도자들은 섬세하고 알뜰하게 서금례 부녀회장을 비롯한 부녀회장들이 손수 마련한 점심 식사를 겸해 한국의 나폴리로 지칭된 통영의 청정‘그린 케이블카’로 한려수도를 한눈에 즐기는 자유시간을 가젔다

통영‘그린 케이블카’는 지난 2008년 4월 국내 최장의 한려수도 케이블카가 개장된 이래 현재까지 누적 탑승객 400만 명을 돌파한 통영관광개발공사(사장 신경철, www.ttdc.co.kr)가 친환경 관광시설 조성을 통해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관광용으로는 국내 최장 길이인 1,975m를 자랑하는 한려수도 케이블카는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명산인 통영의 미륵산에 위치. 케이블카 상부정류장 아래로는 한려수도의 보석 같은 섬들과 통영항의 깨끗한 자태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 같은 풍경이 눈아래로 펼쳐젔다.

청명한 날에는 망원경으로 대마도, 지리산 천왕봉까지 내다보일 정도로 탁월한 조망을 자랑했다. 뿐만 아니라, 전망대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왕래하고 머무는 모든 구간에 나무 데크를 깨끗하게 설치해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고 편안한 휴식공간을 제공하였다.

또, 상부 정류장의 명물로 떠오른 인공폭포, 야생화 꽃길 조성, 산불 초동진화를 위한 소화기의 현장 배치, 주기적인 자연보호 활동 전개를 통해 '그린 케이블카'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앞장서고 있었다. 이에 남구 새마을회 지도자들은 전망대 주위에서 나딩굴고 있는 쓰레기는 새마을 지도자들이 청결과 환경의 파수꾼이라며 주위의 청소 정화에도 한몫했다.

다음은 우청택 전 제주병무청장의 남구새마을회 지도자 초청 연수 특강 내용을 소개한다.

한국의 현대 경제 발전사

○ 우리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살펴보면 1910.8.22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조선통감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毅)가 한일합병조약을 채결하고 1910.8.29일 공포하여 일본의 식민지가 됩니다.

1939년에 독일.이태리.일본 3국이 동맹하여 세계 제2차대전을 일어켜 1945년에 항복하였으나 전쟁중 1945.2.4-2.11(8일간) 소련령의 우크라이나 크레미아 반도의 얄타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이 우리나라를 북한은 소련이, 남한은 미국이 점령 관리 하도록 비밀협정에서 이미 결정했다.

그 뒤 전쟁이 종식되면서 우리나라는 36년간 식민지에서 벗어났으나 1945.8.15일 광복이 되어 3년간의 미군정(군정장관: 아놀드 소장)을 거처 1948.8.15일 초대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 간접선거에 의거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형을 각각 선출하고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탄생을 선포했다.

○ 불행하게도 2년뒤인 1950.6.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이 되자 유엔결의에 의거 유엔군으로 군대를 보내준 나라가 16개국, 구호물자 등 간접지원을 한 나라가 51개국 총 67개 국가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특히 맥아더 장군은 유엔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950.9.15일 06:00에 인천상륙작전(미군 1개사단, 한국군 1개연대)을 성공하는등 혁혁한 공적을 세웠으며 그 뒤 미의회의 한국전 회고증언에서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질 뿐이다”(old soliders never die. they only fade away)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3년간의 전쟁으로 이하여 국토는 초토화되고 1953.7.27일 휴전협정을 조인(그때 국민소득이 1인당 67달러) 하였다.

○ 이승만 대통령이 3대 까지 대통령을 역임하고 1960.3.15일 전국적 부정선거에 의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총선을 실시하여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대통령에 윤보선.국무총리에 장면 박사를 탄생시켰으나 정국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 1961.5.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부에 의거 군사혁명을 단행하여 성공함으로써 혁명공약 6개항을 을 발표하였다.(그때 국민소득이 1인당 87달러)

1. 반공을 국시의 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한다.
3.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수 있는 실력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같이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 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한다.

1961.11월에 박정희 국가재건 회고회의 의장은 경제개발을 위하여 미국의 경제원조와 차관을 기대하고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려 백악관에 갔으나 케네디 대통령은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았고 미국은 결국 그때까지 주던 경제원조와 잉여농산물도 끊고 주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은 박정희 정권은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공식 정부로 인정할수 없다는 취지였다.

미국에서 빈손으로 돌아와서 박정희 의장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1962-1966년 까지 제1차 경제개발에서 수출만이 우리나라가 살길이다, 하여 가발(영화:삭발의 모정) 강아지 인형등을 수출하여 1964.11.30일 1억불 수출을 달성하여 수출의 날로 지정하고 그 뒤 무역의 날로 바꾸었다.(지금도 무역의날로 기념행사를 하고 있음)

박정희 의장은 대통령선거에 의거 1963.12.7일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그 다음해인 1964년에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지금의 독일인 서독에 국빈초청을 받고 1964.12.7일 서독을 방문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상업차관 4천만 달러를 지원 받았다.

* 그 상업차관은 1960년부터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의 인력수출로 2천명의 몸을 담보로 고용계약서에 이들이 일한 3년간의 월급을 몽땅 서독은행에 예금한다는 각서를 쓴 덕분이다.

서독방문시 친한파인 에르하르트 수상과 박정희 대통령간 경제관계에 대하여 2시간 동안 나눈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내가 경제장관할때 한국을 2번다녀왔다.
한국은 산이 많아서 경제발전하기가 매우 어렵다.
독일을 보라 히틀러가 고속도로를 깔았는데 한국에서도 고속도로를 닦아야 한다.

그리고 그 길을 달리는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폴크스 바겐은 히틀러때 만든 자동차 회사다.
자동차가 다니면 고용이 늘고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고 세금이 들어온다.

자동차를 만들려면 철이 필요한데 제철공장을 지어라.
그리고 정유공장도 필요하다.
정유공장은 자동차 연료로도 필요하지만 앞으로는 석유.화학공업시대로서 나일론, 플라스틱공업등 연관산업이 일어난다.

또한 서독은 마이스터라고하는 기능장제도가 있다. 한국도 공업이 발전할려면 기술인력을 육성하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가 안정되려면 중산층이 탄탄해야 하는데 그렇게 할려면 중소기업을 육성해야한다.

한국이 이런 경제개발을 하게 된다면 이를 돕기 위하여 우리서독에서 경제고문단을 보내주겠다(실제 서독은 5명의 경제고문단을 보냈다).

- 마지막으로 저가 부탁을 드리는데 일본과 손을 잡아라. 이것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중요한 일이다.
독일은 프랑스와 32번 전쟁에서 독일이 한 번도 진일이 없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이 끝나자 서독의 아데나워 수상은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찾아가서 사과하고 악수했다.

○ 이와 같이 지도자는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2시간의 대화를 마쳤다.

- 다음날 박정희 대통령은 뤼브케 서독대통령의 안내로 한국의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으로 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다리고 있던 500명의 광부얼굴에 석탄이 묻고 탄가루와 때에 찌든 작업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본 대통령은 그들을 부둥켜안고 대성통곡을 하며 땅을치고 울었다,

이게 무슨 꼴 입니까, 내 가슴에 피눈물이 나요, 우린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에게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우리 모두 열심히 합시다. 나도 열심히 할께요 라고 연설을 하고 마지막으로 모두 애국가를 불렀고 서로가 서로를 부등겨 안고 눈물을 흘렸다.

- 같이 간 서독대통령도 울고, 육영수 여사도 울고해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또한 광부들은 대통령이 떠나올 때 대통령이 탄차 창문을 붙잡고 대성통곡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은 서독을 다녀와서 에르하르트 수상이 조언한 내용의 경제 개발내용을 참고하여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1)에 적극 반영했다.

이듬해인 1965년에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김종필 의원에게 전권을 주어 1965.6.22일 한일협정을 조인하고 그 해 12.18일 국교가 성립되어 역사적인 한일간 국교가 정상화가 되었다.

- 한일협정시 대일청구자금으로 무상원조 3억불, 차관 2억불, 민간차관 1억불, 계 6억불과 한국에 제철공장을 짓기로 하고 일본의 제철기술 지원을 해주기로 협정을 보았다.

- 경부고속도로는 1958년 월남전이 발발하여 미국의 요청으로1965년부터 파병(최고 많을 때 5만명, 5,000명사망)하여 미국으로 부터는 파병군인의 봉급과 수당을 달러로 받고 국가에서는 파병군인에게 한국돈으로 지급하여 그 외화로 경부고속도로와 경제개발에 사용함에 따라 1968년 2월에 착공하여 2년 6개월뒤인 1970년 7월에 완공하였다(428키로,429억원의 예산소요).

- 박 대통령은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게는 현대자동차공장 설립오더를 주고 미국의 포드회사와 기술제휴하여 1967년에 공장을 설립하여 1968.11월에 완공, 처음으로 한국자동차 코티나를 생산하였다.

- 박태준에게 포항제철 공장을 설립토록 하여 자금은 대일청구자금 기술은 신일본제철에서 지원받아 1968.4.1일 시작하여 5년후인 1973.7.3일 제 1호기를 준공했다(1억 1948만불투자)

- 호남정유공장을 1967년에 설립하고 미국의 칼텍스사와 기술제휴하여 1969.6월에 완공 1일 6만배럴의 정유를 생산했다.

-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과 기능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과대학과 기술계 고등학교를 많이 신설하였고 특히 1967년에는 부산에 국립부산한독 직업학교(고등학교 과정)를 개교하였으며, 박정희대통령이 친필로 학교명 현판을 쓰다(74년부터는 부산기계공고로 개명).

- 중소기업 육성을 위하여 중소기업 기본법을 1966.12.6일 제정 공포하였다.

○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제2차 경제개발기간(1967-1971)중인 1968년에 뒤돌아 보니까 경제성장의 부작용인 국민의식이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는 물질만능 사고가 팽배해 있어서 윤리와 도덕이 땅에 떨어져 물질문명은 발달하였으나 정신문화가 뒤떨어져서 같이 성장해야 겠다는 것을 실감하고 국민정신 교육을 위하여 국민교육헌장을 1968.12.5일 공포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는 인류공영에 이바지 할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여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정신을 기른다.

○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정신을 북돋운다.

○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정신을 더 높인다.

○ 반공민주 정신이 투철한 애국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역사를 창조하자.

1968. 12. 5. 대통령 박 정 희

- 이 국민교육헌장은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고 매년 12월5일 기념행사도 하였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군인, 학생, 공무원등에게 이 헌장을 통체로 외우도록 했다(박 대통령도 직접 외웠다는 일화가 있다).

- 국민교육헌장은 1993년 까지 25년간 유지하다가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천황의 절대권력을 정당화 하고, 무조건적인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일본의 교육칙어를 그대로 본뜬것이라는 비판 때문이었다.

○ 1973년에 국민소득이 1인당 404달러로
그 당시 세계최빈국 기준이 국민1인당 365달러 미만이므로 이때 한국이 최빈국에서 제외되였으며, 1977년 수출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하여 급속성장의 드라이버에 들어갔다. 그 2년뒤인 1979.10.26일 박정희대통령은 김재규에 의해 서거 당했다.

* 위와 같이 박 대통령은 국민의 자유와 인권에 관한한 많은 제약이 있었으나 경제개발과 국민이 먹고사는 민생문제를 해결한 지도자로써 그리고 경제성장의 기반을 다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추앙받는 대통령이다.

○ 그 기반위에 1995년에 국민소득 1만불로 상승하다가 1997년 IMF를 당하여 7,000불로 격감되었으나 2007년 다시 소득 2만불을 달성하여 2009년부터 한국이 외국에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해주는 나라로 다시 태어났다.

○ 특히 2010년에는 제5회 G20개국 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의장국이 되었으며 지금 우리나라 경제는 세계수출 10위권, 경제13위권의 신흥경제대국을 이룩하고 있다. 또한 2차대전후 독립한 147개국중 유일하게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국가로서 세계속에 대한민국이 우뚝서게 되었다.

○ 앞으로 우리는 후손에게 세계의 많은 국가로부터 대한민국이 존경받는 나라, 사랑받는 나라, 친근한 나라, 한번가보고 싶은 나라, 가까운 나라로 만들어 주어야 한다.

우리모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시다.

지금까지 장시간 잘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의 가정과 직장에 행운과 건강이 늘 함께하기를 기원드립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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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문 2011-11-29 01:29:58
새마을 특강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 공약과 교육헌장 새마을 비사를 줄줄 외우는 우청택 전 제주병무청장님의 주옥 같은 새마을 관련 명 강의를 박 대표님이 한번 기회가 계신다면 청강하시길 기원하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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