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7)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 (7)
  • 김동문 논설위원
  • 승인 2010.05.2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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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당시 서울대 대자보에 실린 북한말 구호

 
   
     
 

광주사태의 한 절정이었던 1980년 5월 21일 오후 2시경부터 북한군이 광주시내 몇몇 장소들을 무기 분배 장소로 정하고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누어 주며 무장단체 편성을 하던 중 한번은 실수로 북한말을 쓴 사건이 있었다.  전 조선작가동맹 작가는 자기가 전해들은 대로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한번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나눠주는 장소에서 광주시민 한 사람한테 정체가 노출될 뻔한 위험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20대 중반의 여성(대학생 정도로 생각했음)에게 무기를들라고 하자 그 여성은 무기를 받을 생각을 안 하고 복면하고 있는 자기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만 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쌍간나새끼 괴뢰군 새끼들 몰려오는데 총안잡고 뭐하고 서있니?" 총을 넘겨받을 생각도 안 하고 자기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여성이 그에게 "아저씨 광주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나요?  순간 그는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고 했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330). 

자신이 실수한 것을 알아챈 북한군은 그녀를 미행하여 그녀가 다른 시민에게 "오늘 복면을 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분명히 아니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 같아보였어요" (상게서. p. 331)라고 말하는 순간 두 명을 모두 총으로 쏴 죽였다.  그래서 북한군이 광주에서 북한말 쓴 흔적은 남아있지 않으나 위의 증언을 부분적으로 입증해 주는 사실들이 있다.  탈북자들은 광주사태 때 몇몇 광주시민들은 간첩의 침투 낌새를 알아차렸다고 증언하는 것인데, 그것은 사실이다. 

지난 3월 26일 천안함이 침몰한 이래 많은 이들이 북한의 개입 낌새를 알아차리고 있다.  광주사태 때도 광주시민들이 느낀 간첩 침투의 낌새가 있었다.  그해 1980년 5월 19일 광주에 온 지 하루만에 80만 광주시민을 대표 자격으로 광주시장과 협상하였으며, 이틀 만에 전남지사와 협상하였던 광주의 영웅 전옥주를 어째서 바로 그 다음날이었던 22일 광주시민들 스스로 체포하여 계엄군에게 인계하였던가?  간첩은 전옥주에게 쪽지를 주며 선무방송을 시켰던 자들 중에 끼어 있었다.  따라서 22일의 궐기대회 도중 광주시민들이 전옥주를 가리키며 "저 여자다 간첩이다!"라고 외쳤을 때 광주시민들이 약간 실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었다.  분명 전옥주를 배후조정하는 불순세력이 있었다.

광주사태 당시 간첩들이 침투하여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는 대자보로 남아있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아무리 몇 달간 서울말을 연습한 후에 침투하였어도 자기로 모르는 사이 입에서 "쌍간나 새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실수를 한 북한군이 있었다.  그런 실수를 간첩은 1980년 5월 2일자의 저 유명한 서울대 운동권 대자보 "維新殘黨 打倒에 總力을!!"에서도 하였다.  그해 5월의 전국 대학가 대규모 시위는 그 대자보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대자보에 북한말들이 박혀있다.  그러면 서울대 운동권이 서울말을 몰라 북한말을 골라 썼던 것인가?  도대체 어떤 북한말이었으며, 어찌된 영문이었는지 살펴보자.

북한 온라인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지난 2010년 4월 5일 '산 송장의 역겨운 행각 놀음'이란 제목의 논평을 내고 "황가놈이 도적고양이처럼 숨어 다니지만, 결코 무사치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여기서 황장엽씨를 '황가놈'이라고 부르는 것은 북한식 표현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북한말들이 30년 전의 서울대 대자보에 그대로 담겨있는 것이다.  1982년에 출판된 북한판 5.18 도서 "주체의 기치따라 나아가는 남조선인민들의 투쟁" 560쪽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발췌 인용한다:<박가의 양자인 전가는 애비가 준 보안사령관직에 중앙정보부장서리직까지를 두팔에 감싸안고있었다.

애비의 뒤를 이어받아 유신잔당을 옹호하고 나아가 애비의 직위를 되찾아 독재자가 될 스스로의 모습을 꿈꾸며 비상계엄령을 그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전가가 틀어쥐고있는 포고령의 역할은 과거 유신하의 긴급조치와 무엇이 다른단 말인가, 비상계엄령해제는 유신하의 구악의 청산과 국민투표헌법개정을 위한 선결조건이다. 반격을 위한 유신잔당의 준동이 명백한 이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학우여 유신잔당타도에 우리의 모든 력량을 총집결하라.>>

위의 인용구에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계속 '전가'라고 부르는데, 당시 남한 학생들은 읽어도 전가가 누군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남한에서는 그런 말을 쓰지 않는다.  이 대자보는 신현확 국무총리를 '申家'라, 최규하 대통령을 '崔家'라 부르는바, 그 단락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申家는 어떠한가.1
강물을 흐리는 미꾸라지처럼, 진작없어져야 할 日帝의 잔재가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3·15 不正선거를 자행하더니 아직도 까딱거리며 유신의 찌꺼기가 되어 「유신체제를 필요한 것이었다.」라는 따위의 망언을 되풀이 하고 있구나! 日帝의 황민화 교육에 종사하던 전직 「선세이」 崔家는 李·朴 兩 독재정권하에서 外務部 要職을 거쳐 次官 및 국무총리를 지내더니 이제는 全家의 꼭둑각기사 되어 극가 두드리는 장단에 맞쳐 춤추고 있다.>>

이런 문구의 대자보가 서울대 학생이 쓴 대자보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서울대 운동권 대자보에 조예가 깊은 한홍구에게 물어보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아니, 유시민에게 물어보아도 그 사실은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남한 말에서는 황장엽씨를 황가놈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1980년 봄에도 우리는 신현확 총리를 '신가'라고, 최규하 대통령을 '최가'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1980년 5월 2일자의 서울대 대자보에 북한말들이 박혀 있던 것인지 한홍구의 해명을 들어보아야 하지 아니하겠느가. 

한홍구의 해명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잠정적으로 추적해 본다면 이 대자보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관에서 작성하여 광주운동권 윤한봉이 남한말로 조금 다듬어 서울 운동권 문국주와 조성우를 시켜 서울대 벽보에 붙이게 하였다.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몇가지 팩트들은 북한에서 1981년에 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광주 폭동 1돌 기념 강연이 있었고, 그 내용이 그 이듬해 1982년에 평양 조국통일사 편으로 발간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윤한봉이 그의 회고록 51~53쪽 등에서 당시 전국 대학가 시위는 자신이 총지휘하였으며, 54쪽 등에서 당시 대국민성명서 등은 자신이 작성하였음 밝혀주는 사실 등이다.

탈북자들은 1981년에 당 간부들을 대상으로 광주 폭동 1돌 기념 강연이 있었다고 증언해 왔다.  그 강연 요지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우리 공화국은 남조선혁명을 주도할 수 있는 완전한 주도권을 쥐고 있다. 우리 군 특수부대가 남파된 것은 한 개 대대 인원이었다. 잠수함과 공중으로 은밀히 전라도에 스며든 우리 군은 자정이 지난 깊은 밤...계엄군을 광주시 교외에서 먼저 기습했다. 물론 기습할 때는 군복이 아닌 학생복과 시민들이 입는 옷으로 바꾸어 입고 사격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실제로 그런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가 있다는 사실이 최근에  확인되었다.  지난 4월 27일자 조선일보는 데일리NK를 인용, "지난 24일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진행된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에서 한 간부(당세포 비서)가 “최근 영웅적인 조선인민군이 원수들에게 통쾌한 보복을 안겨 우리 자위적 군사력에 대해 남조선이 국가적 두려움에 떨고 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광주사태 직후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에서 광주사태에 북한이 개입하였음을 밝힌 북한은 천암함 침몰 사건 직후에도 당원 대상 정치 강연회에서 그런 사실을 긍정하였던 것이다.

 자, 운동권 주장으로는 북한말이 박힌 저 위의 대자보가 민주화운동 대자보이다.  그런데, 일국의 국무총리를 북한말로 '신가'라, 일국의 대통령을 북한말로 '최가'라 비꼬아 부르며 그분들에 대한 흑색선전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대자보는 결코 민주화운동 대자보일 수 없다.  흑색선전 문구들로 가득한 대자보는 그 작성자의 편견을 반영하며, 그런 편견들은 민주주의의 실현을 어렵게 만들 뿐이다.
본래 비상계엄 하에서는 당국의 허락 없이는 시위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최규하 대통령은 1980년 봄에 학원 내 시위를 허용하였다. 

흔히 1980년 봄을 민주화의 봄이라고 일컫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학원 내 시위 허용이었다.  그리고 북한말이 박힌 저 위의 5월 2일자 대자보 이전에는 가두시위라는 것이 없었다.  오로지 교내 문제에 대한 학원 내 시위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저 대자보를 기점으로 대학가 시위가 정치적 시위로 탈바꿈하였으며, 학생들의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대자보는 한국 근현대사에 일획을 그은 대자보였다. 

5월 3일부터 시작된 가두시위는 서울에서는 15일에, 광주에서는 16일에 그 절정을 이루고 18일에 급기야 광주사태가 터졌다.  이렇듯 그 가두시위의 기폭제는 북한말이 섞여 사용된 5월 2일자의 서울대 대자보 "維新殘黨 打倒에 總力을!!"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정치범들을 석방하였으며, 김대중 등 과격한 좌익인사들을 사면복권시켰으며,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되었던 운동권을 복학시켰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켜 교내 시위를 허용하였다. 불과 몇달 사이에 최 대통령은 운동권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양보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운동권이 최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느꼈는가?  아니다.  위의 대자보는 이런 단락으로 시작한다:

<<歷史上 조그만 勝利에 陶醉하여 하잘것 없는 戰利品의 獲得에 精神이 팔린 나머지 敵의 主力部隊에 對한 경계를 疏忽히 하다가 敵의 大大的인 反擊을 받아 敗北한 例는 수 없이 많다. 敵의 主力部隊를 完全히 섬멸시키지 못하는限. 敵의 戰列을 再整備하고 새로운 同盟軍의 응원아래 再次 반격을 加할 가능성은 常存하는 것이다.

10·26以後 6個月동안 우리는 一部政治犯의 석방과 復權一部 학우들의 復校등 조그만 승리에 들떠 있었고 학내 民主化나 병집거부등 사소한 戰利品획득에 精神이 팔려 있었던 것이 事實이다.>>
  그리고 그 아래 내용은 최 대통령에게서 그만한 양보를 얻어낸 것으로 만족해 하지 말고, 그 어른을 유신잔당으로 매도하여 짓밝아버리고, 그분의 정부를 타도하자는 것이다.  그란데 위의 북한말 대자보의 한 배후로서 광주운동권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대자보 제목과 요지가 그대로 그 다음날 전남대 교정에 유인물로 뿌려졌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대학가의 모든 시위는 전남민주청년협의회에서 총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전국의 시위는 광주운동권 윤한봉과 김상윤이 총지휘하였음을 밝히는 광주매일의 『正史 5·18』은 그들의 전국전 민중봉기 선동전술을 이렇게 요약한다: "당시 운동역량을 고려, '학생이 전위에 서는 전 민중의 전국적 궐기'를 설정하고 역량을 강화하면서 시기를 조율하는 투쟁의 전략·전술이 선 것이다" (p. 113-114).
윤한봉은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 대장이기는커녕 시민군도 아니었다.  그는 광주사태가 시작되자마자 도망다니기 시작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광주사태 때 광주에 없었던 윤한봉의 말 한마디로 5.18기념재단이 설립되었을만큼 그는 5.18 총사령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이유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그의 전남민주청년협의회가 전국 대학가의 시위를 총지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남민주청년협의회는 지하당 통일혁명당처럼 지하조직이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사무실을 갖기 위해 위장명칭을 사용한 단체가 현대문화연구소였다.  윤한봉은 지하조직 전남민주청년협의회 명칭과 합법적 단체 현대문화연구소 명칭을 필요에 따라 번갈아가며 사용하였다.  전국 대학가 시위는 전남민주청년협의회가 총지휘하였으며, 주요 성명서 및 유인물들의 실제 작성자는 윤한봉이었다.

위의 북한도서에 기록된 대로, 위의 서울대 대자보는 <<학우여 유신잔당 타도에 우리의 모든 력량을 총집결하라.>>는 문장으로 끝났는데, 어감에 따라 지령으로 들릴 수도 있는 문장이다.  똑같은 말이 그 다음날 전남대 교정에 뿌려진 유인물에서는 "학원의 총역량을 유신잔당 타도에 집결시킬 것을 촉구한다!"로 실린다.  표현이 약간 부드러워진듯 하지만 동일인물이 쓴 문구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학원의 총역량이란 말인가?  대학교의 생명은 학문성이요, 학문성의 생명은 객관성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위의 선동구호대로 행동하면 객관성은 소멸된다.  민주주의는 일당 정치가 아니라, 양당 정치 혹은 둘 이상의 견해를 필요로 하는 정치제도이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운동권의 시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1970년대가 대한민국 경제 건국기의 중요한 시기였음을 모두가 송두리째 부정하는 대학교가 있다면 그 학교는 이미 객관성을 상실한 학교이다.  그럼에도 운동권의 편협된 시각만을 강요하며 학원의 총역량을 유신잔당 타도에 집결시키리고 선동하는 것은 전체주의이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북한과 남민전과 광주운동권은 우리와 똑같은 한국말을 사용했던 것이 아니다.  북한과 남민전과 광주운동권이 말하는 '민주'의 개념이 전혀 다르듯이 '역량'의 개념 또한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와 다르다. 10월 2일자 대자보 작전의 승리를 위의 북한도서는 이렇게 해설한다: "당시 투쟁은 또한 학생들이 학교의 테두리를 벗어나 적극적으로 진출하는속에서 발전하였다.

5월12일까지의 기간에 10여개 대학의 학생들이 삼엄한 저지선을 뚫고 가두로 진출하였으며 마침내 교외에서 대규모적인 투쟁을 벌리였다. 이것은 학생운동과 폭압력량, 민주와 파쑈사이의 력량관계가 학생운동의 편에 유리하게 변동되고있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p. 560).  그런데, 폭압력량은 또 무엇인가?

김정일이 자기의 생일날인 1981년 2월 16일 당 간부들에게 "광주인민봉기는 수령님께 바치는 나의 생일 선물이었는데 우리의 역량이 너무 적어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210) 말하였다.  여기서 우리의 역량이란 '북조선의 역량'인데, 그에 상응하는 '한국의 역량'이란 말이 우리에게 있는가? 

한 북한 작가의 부친은 북한의 안전부 비서였는데, 광주사태 당시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그때 병문안 오는 어른들이 오면 늘 광주사태가 화두였다. 누가 "혹시 남조선 놈들이 우리 군대가 나가면 침략자라고 할게 아니요." 라고 말하자, 그의 부친은 "남조선이 뭐 외국이요?  우리가 우리 땅을 해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  수령님의 교시를 좀 연구하고 다니라구요. 남조선 인민들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 있으니 그 때면 남으로 진격할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한두 번 교시하신 것이 아니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인줄로 알았다"고 이 작가는 회고한다 (p. 313).  여기서 '남조선혁명 역량'이란 북한말이다.  우리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이다"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겉보기에 한국말 같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이다"라는 말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이다"라는 전체주의 시각에서 광주사태를 조명할 때 하는 말이다.  전체주의 이념에서는 '광주시민들은 혁명 역량이다'는 개념이 형성될 수 있다.  그러나 개개인의 자유와 권익을 존중하는 민주주의 이념에서는 그런 개념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아무개의 역량이 뛰어나다"라고 말하지, "광주시민들은 혁명역량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류의 표현은 북한에서 쓰이며, 광주운동권이 사용하던 표현이었다. 

이 탈북자는 광주운동권의 용어를 배운 적이 없다.  그는 북한에서 길들여진 용어대로 "그때부터 나는 광주시민들이 김일성의 남조선혁명 역량인줄로 알았다" (상게서, p. 313), "북한을 탈출해서 남한에 와 있는 이 순간까지 북한에서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광주폭동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 조선노동당의 지시를 받는 남조선의 혁명역량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상게서, p. 316)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가 안쓰는 말들이 북한에 있다는 것은 북한사람들은 우리와 사고방식이 다름을 의미한다.  꽃미남이란 단어의 등장은 남성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남자답게 생겼다'는 칭찬이요,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는 흉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쁜 남자'라는 말을 듣는 것이 자랑스러운 시대이다.  이처럼 단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리고 같은 단어라도 어떻게 합성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엄청 달라진다.  한국어에 약간의 지식이 있는 어느 외국여성이 '오빠부대'의 의미를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한국음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 검색엔진은 검색어 '오빠부대'와 검색어 '부대찌게'에서 '부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름을 몰랐던 듯하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북한주민들이 '오빠부대'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한국에서도 앞세대 어른들은 '오빠부대'를 맹호부대나 청룡부대와 동류로 혼동할 것이다.

북한에는 '오빠부대'와 같은 합성어가 없는 것처럼 남한에는 '혁명역량'과 같은 합성어가 없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시자마자 김일성은 "연락부(대남사업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  김일성이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키라"고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도대체 혁명역량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모든 혁명역량을 총동원하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바로 그 지령이 그대로 위의 1980년 5월 2일자 서울대 운동권 대자보에 박혀있다: "유신잔당 타도에 우리의 모든 역량을 총집결하자!"

1980년대의 광주운동권은 우리가 그 개념을 좀처럼 알 수 없는 '역량 합성어'들을 무수히 사용하였다.  그 한 예가『正史 5·18』이 114쪽에서 인용하는 김상윤의 말이다: <<김상윤은 당시 광주운동권의 모습을 "서울을 비롯한 여타 지역의 투쟁역량과 방향이 분산되고 통일되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기에 '동네사랑방'같이 하나로 연결된 논리구조를 갖춰 바로 80년 5월 항쟁의 기본역량으로 옮겨진다"고 분석한다.>>  단 두 문장이지만 우리가 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서울에서는 투쟁역량이 분산되었으나, 광주에서는 기본역량으로 옮겨졌다는 것인데, 광주운동권 용어사전이 없이는 우리는 이 말뜻을 모른다.  김일성의 지령에 언급된 혁명역량과 김상윤이 언급하는 투쟁역량은 동의어이다.  북한의 대남공작이론과 광주운동권 이론에서는 역량은 전략·전술 개념 용어이다.  김상윤의 말을 풀이하면 광주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날 수 있었고, 서울에서는 무장봉기가 일어나지 못한 이유는 학생운동과 문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역량이 총역량으로 결집된 광주에서와 달리 서울에서는 아직 문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역량이 없었다는 말이다.

윤한봉은 1980년에 '광주운동권'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사용하였다.  그런데, 무엇이 운동인가?  2008년의 광우사태도 운동이었는가?  물론 운동이었다.  그러나 반미자주화운동이었다.  그러면 반미자주화운동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운동에는 북한 조선노동당이 시킨 반미자주화운동이라는 것이 있다.  광주사태 때 북한이 광주운동권에 민주화투쟁을 전개하라고 하였다:

"남조선 내부에서 인민대중의 동력을 얻어 반파쇼 민주화투쟁을 강력히 전개하고 이것을 반미자주화운동과 결합시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북한과 광주운동권은 민주화운동이라는 의미로 민주화투쟁을 말하지 않았다.  북한과 광주운동권 논리에서 '민주화투쟁'과 '반미자주화운동'은 한짝이다.  그것이 윤한봉과 그의 동지들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그들은 북한식 인민민주주의라는 의미로만 민주를 이해하였다.

광주운동권이 '혁명적인 민주역량'을 주장하였으며, 미국에 의한 남한의 통치를 끝장내고, 통일을 성공시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북한이 말하는 남조선혁명의 두번째 단계였다.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과의 연합전선으로 미국에 의한 남한의 통치를 끝장내고 '북한식 인민주의의 통일'을 성공시켜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p. 320). 

이정로가 그의 글 "광주봉기에 대한 혁명적 시각전환"에서 인용하듯 5.18측은 "전남지역의 9개대 총학생회는 '민족민주화 성회'를 주도하고 5월 15일 대학인의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반민주, 반민족세력과의 성전을 엄숙히 선포한 <제2시국선언문>을 채택한다"고 가록한다.  여기서 '대학인의 민주역량'은 광주운동권의 용어요, 북한 전체주의 국가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과 광주운동권의 '대학인의 민주역량'은 똑같은 민주역량인가?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 질문을 광주운동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고정희 시인은 월간중앙 1988년 5월호에 "광주민중항쟁과 여성의 역할/광주여성들, 이렇게 싸웠다"란 제목으로 기고한 글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광주YWCA, 한국 앰네스티 광주지부, 민주청년협의회, 현대문화연구소, 녹두서점 등의 운동권 "조직 속에 여성들도 조직의 일원으로 동참하여 민주역량을 키우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민주역량을 키웠기에 광주는 민주주의 선거가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는가?  1993년에 귀국한 윤한봉조차도 광주에서는 특정후부에게 몰표를 주는 것을 보고 "광주는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민주화의 망지"라며 통탄하였다.  전 주민이 한 후보에게만 몰표를 주는 북한에서나 광주에서는 선거 민주주의의 의미가 없다.  북한의 '혁명적인 민주역량'도 광주운동권의 '민주역량'도 모두 전체주의 이념 용어들이다.  그리고 그런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이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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