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폭동에 등장하는 김일성과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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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폭동에 등장하는 김일성과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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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모스크바에서 제주도까지 공산폭동의 먹이사슬 맨 아래층에는 남한의 민중들, 그중에서도 제주도의 민중들이 공산당의 먹이가 되었음을 소련 자료는 보여주고 있다.

자유논객연합과 우리공화당, 자유당, 자유민주당, 자유통일당 등 애국 4정당과 합세하여 제주도에 4.3 현수막 80장을 게시했다. 내용은 이렇다.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여 김일성과 남로당이 일으킨 공산폭동이다”

4.3현수막이 게시되자 제주 언론은 하나같이 ‘논란’ ‘공분’ ‘왜곡’ ‘폄훼’ 등의 제목을 달고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이 현수막의 내용이 어느 표현이 왜곡이며 어느 대목이 폄훼인지를 밝힌 언론은 하나도 없었다. 대한민국 건국 반대, 김일성, 공산폭동, 4.3현수막에는 남한 좌익들의 금기어들로만 채워졌다. 그래서 소금 맞은 미꾸라지처럼 방방 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느 기자는 제주4.3사건이 북한과 김일성이 연계된 근거를 대라는 질문을 했다. 나는 그 질문은 6.25남침이 김일성의 소행이라는 증거를 대라는 것과 비슷한 질문이라고 대답을 한 다음, 나름대로 기억을 더듬으면서 4.3폭동의 주동자들이 쓴 책과 해외 자료들을 언급해 줬다. 이 자리를 빌어 좀 더 자세하게 부연하고자 한다.

4.3현수막 기사를 쓰면서 ‘논란’ ‘폄훼’ ‘왜곡’이라는 제목을 뽑은 기자들은 이 글을 정독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제주4.3폭동은 왜 자발적 항쟁이 될 수 없으며, 왜 김일성과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공산폭동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근거가 되는 자료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4.3폭동의 주력은 제주도 남로당이다. 남로당은 제주도에서 공산당 조직이 그대로 이어지며 당명만 변경되었다. 4.3폭동의 주동자들은 4.3폭동을 발발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이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4.3폭동 초대 사령관 김달삼이가 북한 해주대회 참가를 위하여 월북할 때 '보고용'으로 만든 자료다. 김달삼은 북한 해주대회에서 이 자료를 바탕으로 정세 보고를 하여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김달삼은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고 북한 헌법위원까지 지낸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는 2대폭도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었을 때 그의 호위병인 양생돌에게 노획한 것이었다. 투쟁보고서에는 48년 3월 15일부터 7월 24일까지 제주인민유격대의 투쟁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투쟁보고서가 시작되는 3월 15일은 남로당 상부에서 무장폭동 지령을 가진 '올구'가 제주로 내려와 '신촌회의'가 열린 날이다. 제주의 공산주의자들은 지령을 받아 이날 폭동을 최종 결정했다.

▲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보기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중에서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중에서/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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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4·3사건의 거짓과 진실 - 김동일 저' 중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해설 보기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해설 중에서/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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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자료

4.3 당시 제주도는 80% 이상이 문맹이었고, 피죽도 겨우 먹는 곤궁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도민들이 자발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는 주장은 황당하기만 하다. 게다가 폭동은 군경을 괴롭히며 만 10년을 이끌었고, 인민유격대는 전투에서 국군 부대를 전멸시키는 등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가난한 제주도민들만으로 할 수 있는 전쟁이 아니었다.

미군 자료에는 제주4.3에 대한 북한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정보들이 나타난다. 4.3폭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로당 상부의 지원과 지시를 받았고,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과 김일성을 만나게 되고, 결국에는 모스크바에 이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근거는 미군 자료에 등장한다. 미군 자료는 제주4.3에 대해서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주4.3평화재단에서 발행한 '제주4.3사건 추가진상조사 자료집4 (미군자료)' 459쪽 내용이다. "북조선의 모든 지역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로 보내진 성금은 남조선 인민에 대한 북조선 인민의 피가 끓는 형제적 지지를 증명한다"

▲ '제주4.3사건 문과 답(2002개정판) 258쪽 -김영중 저서에서 참조 

'제주4.3위원회'가 발간한 '제주4.3사건자료집' 10권(미군자료) 20쪽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제주도 공산주의 세력이 지도자인 김장흥과 부산경비대사령부의 정보담당 요원들은...... 정보원의 보고에 의하면 김장흥은 45년 10월에 평양에서 제주도로 왔다."

▲ '제주4.3사건 문과 답(2002개정판)' 259쪽 -김영중 저서에서 참조 

위의 미군 자료집 8권 187쪽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1947년 4월 11일부터 4월 23일까지 심문받은 한 여간첩은 국제공산당이 북한에 2곳 이상의 간첩학교를 운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학교에서 훈련받은 제5열 분자들은 러시아에서 훈련받은 장교 3명의 인솔 아래 50명씩 무리 지어 남한으로 파견됐다. 남한으로 파견된 첫 무리는 1947년 3월 1일께 출발해 38선을 넘는데 1주일이 걸렸다. 이 여성은 이들 학교의 일부 졸업생들이 제주도에 공산테러 훈련소를 세웠다고 밝혔다."

▲ 소련 자료

1995년 5월 9일부터 중앙일보는 6회에 걸쳐 '스티코프 비망록'을 연재했다. 스티코프는 1945년 8월 15일부터 1946년 2월 8일까지 북조선 주둔 소련 군정청 총사령관을 역임한 인물로, 1945년부터 북한 문제에 개입하면서 김일성을 픽업한 인물이다. 스티코프는 북한주재 초대 소련 대사(48~51년)를 역임하면서 북한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막후의 지도자였다.

스티코프는 46년 8월부터 그날그날 있었던 구상과 생각들을 꼼꼼히 일기형식으로 메모를 남겼다. 이 기록이 스티코프 비망록이다. 스티코프 비망록은 스티코프 사후 장남 빅토르의 창고에 있던 문서들을 북한이 실어가다가 흘려버린 것을 중앙일보가 입수한 것이었다. 중앙일보는 스티코프 비망록이 '북한을 이미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은 소련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스티코프 비망록'에는 이런 내용들이 등장한다

 ▷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46년9월9일)

 ▷남조선 정세와 지원조치. 로마넨코.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46년 9월11일)

 ▷로마넨코.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5백만 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백만 엔을 지급.

 ▷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한의 반응.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두 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 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동지들에게 3백만 엔의 재정지원을 제공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46년10월1일)

 ▷ 3백만 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위해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46년10월2일)

 ▷ 문(정체불명)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했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46년12월6일)

 ▷ 로마넨코. 그의 계좌에 있는 1백22만 루블에 대해 논의했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계좌를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46년12월7일)

▲ '제주4·3사건의 거짓과 진실 - 김동일 저' 중에서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 - 스티코프 비망록의 폭' 해설 보기

https://www.nongak.net/board/index.html?id=nongak431&asort=&smode=subject&skey=%B3%B2%B7%CE%B4%E7+%C1%DF%BE%D3%B4%E7%C0%C7+%C1%F6%B7%C9&x=30&y=9&no=616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에는 제주도의 공산 좌익들이 상부의 지시를 받아 폭동을 결정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미군 자료'에는 북한의 김일성이 북한 인민의 성금을 걷어 남한 좌익들에게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북한은 이 성금을 '북조선 인민의 피가 끓는 형제적 지지'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소련 자료'에는 이 성금을 남한에 보내는 것마저도 소련의 허락을 구하는 김일성 정권의 모습이 드러난다.

김일성이 북한 인민의 노동시간을 늘려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에 대하여 소련의 허락을 구하는 10월 1일은 대구10월폭동의 발발일이었다. 스티코프는 '남조선 동지'들에게 자금을 지원해 주고, 남한 좌익들은 소련의 자금과 북한의 성금을 받아 9월 총파업과 10월대구폭동을 일으키는 적나라한 장면을 스티코프 비망록은 보여주고 있다.

경무부 공보실장 김대봉은 1948년 5월 18일 동아일보에 '제주폭동 현지답사기'를 기고했다. 4.3폭동의 현장을 방문했던 김대봉은 제주4.3에 대해 이렇게 논평했다.

"‘보라 조선인민은 죽음으로써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있지 아니한가’라는 ‘프라우다’지의 논평일편(論評一片)과 ‘모스크바’ 방송의 하루밤 자료를 공급하자는 것이 ‘크레믈린’의 의도요 이 의도를 조선출신 소련인들이 충성스럽게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동포와 아까운 혈육을 스탈린의 회심의 미소를 사기 위한 한 접시 반찬거리로 진상하려는 것이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이 극심한 체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따라서 미군 치하에서 폭동이 많이 발생할수록 소련은 공산 체제의 우위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것이 '크레믈린의 의도'였고, 소련의 이런 의도에 맞춰 '조선 출신 소련인'들이 충성스럽게 폭동을 실행하고 있다는 경무부의 발표였다.

'조선 출신 소련인'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 즉 남한의 빨갱이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남한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지와 모스크바 방송에서 보도를 하며 미국 체제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고, 이 하루밤 뉴스거리를 위해 남한 빨갱이들이 동포와 혈육을 스탈린의 반찬거리로 진상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입수된 스티코프 비망록은 47년 2월까지뿐이다. 북한에 있는 비망록이 추가로 입수된다면 남한 공산주의자들의 비밀은 더욱 많이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입수된 스티코프 비망록의 분량으로도 공산당의 먹이사슬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소련 모스크바에서 제주도까지 공산폭동의 먹이사슬 맨 아래층에는 남한의 민중들, 그중에서도 제주도의 민중들이 공산당의 먹이가 되었음을 소련 자료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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