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기관(蒸氣機關, steam engine)의 발명
그 후 1765년에 와트(J. Watt)가 뉴커먼의 기관을 수리하다가 실린더와 밸브로 연결된 별도의 냉각기(冷却器, condenser)를 부착함으로서 그 결점을 보완한 매우 효율적인 증기기관(蒸氣機關, steam engine)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와트의 증기기관 역시 원래는 수갱의 배수를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동력원으로도 매우 효율적이었으나 초기에는 사업적으로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업가인 볼튼(M. Boulton)을 만난 후 그의 엔진은 널리 보급되어 다른 기계들의 회전축을 위한 동력(動力, power)으로 이용되면서 수력(水力, water power), 풍력(風力, wind power), 축력(畜力, cattle power) 등 당시까지 사람들이 이용하던 동력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으며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는데 1800년까지 모두 289대가 팔렸다.
한편 석탄 수송문제는 도로개수, 운하건설 등 사회간접자본(社會間接資本, social overhead capital) 투자를 촉진시킴과 동시에 국내시장의 확대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조건이 정비되고 충실해지는 과정에서 산업혁명은 영국의 전통적인 모직물공업이 아니라 신흥 산업인 면공업(綿工業, cotton manufacture)에서 먼저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영국이 17세기 말부터 동인도무역에 의해 들여온 인도산(印度産) 캘리코(Calico: 17세기 이후 인도에서 유럽으로 수입되던 각종 면직물을 말함) 면직물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의료혁명(衣料革命)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면제품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인도 제도에서 나는 설탕이나 담배 등과 마찬가지로 노예노동에 의해 재배된 면화를 원료로 하여 인도산 캘리코 면직물과 경쟁할 수 있는 면제품을 제조하는 일이 18세기 초의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를 해결하도록 추진시킨 것은 전래의 지배계급인 지주나 전통적인 직물업자가 아니고 주로 상인과 자영농민층이었으며 그들은 국가의 원조 없이 자주적으로 기업을 이룩하였다.
베틀(직기/織機, loom)은 아주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1733년에 케이(J. Kay)가 베틀의 북(flying shuttle)을 발명하자 하나의 베틀에서 훨씬 더 넓은 천을 훨씬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베틀을 돌보는 일손도 더 줄게 되었다. 그러나 이 발명은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직공(織工, weaver)들에게는 인기가 없었으며 1755년에는 그들이 폭동을 일으켜 그의 베틀을 부수기도 하였다.
그의 발명은 그 후 널리 사용되면서 세상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본인 자신은 별로 빛을 못 본체 가난하게 죽었다. 한편 방적(紡績, spinning)부문에서는 아크라이트(R. Arkwright)가 수력방적기(水力紡績機, water frame spinning machine)를 발명함으로서 인력이 아닌 기계적 동력을 사용하게 되어 면 산업을 오두막에서 공장으로 옮겨가게 만들었으며 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면 날실(warp)을 생산함으로서 순 면으로만 된 제품의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그리브스(J. Hargreaves)가 발명한 다축(多軸)방적기(spinning jenny)는 그 어느 때보다 가늘고 질긴 실(yarn)을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크롬튼(S. Crompton )은 여러 가지 방적기의 장점을 모아 뮬 정방기(-精紡機, spinning mule)를 개발하였다. 직포(織布, weave)부문에서는 카트라이트(E. Cartwright)가 수동 베틀에 동력을 연결한 역직기(力織機, power loom)를 발명함으로서 증기력을 동력으로 하는 공장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은 맨체스터(Manchester)를 중심으로 한 랭커셔(Lancashire) 지방 및 스코틀랜드(Scotland)의 글래스고(Glasgow) 주변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한편에서는 직업을 잃을까 두려워한 노동자들이 1779년경에도 러드(N. Lud)의 인솔 하에 양말 짜는 기계(stocking frame)를 파괴하였으며 한참 세월이 지난 1811년∼1812년과 1816년에도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는 기계들을 파괴하는 소요가 일어났는데 이를 러다이트 폭동(-暴動, Luddite riots)이라고 하고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러다이트단원(-團員, Luddites)이라고 한다. 그들은 이런 기계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이러한 기계의 발명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노동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 업종의 어떤 분야에서 새로운 기계의 등장으로 생산량이 극적으로 증가하면 이를 따라잡기 위하여 다른 분야에서도 곧바로 새로운 발명을 필요로 하게 된다. 카트라이트의 역직기가 제대로 가동되자 영국의 면공업은 많은 양의 솜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당시 솜은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와 특히 미국의 남부에서 주로 생산되었는데 면 농사는 노동집약적(勞動集約的, labor-intensive)이어서 많은 일손이 필요했으므로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잡아들임으로서 아프리카를 비운의 대륙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사람이 하루에 정제할 수 있는 솜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아 솜의 생산량이 별로 시원치 않았다.
조지아(Georgia)를 둘러보면서 솜을 정제할 기구의 필요성을 느낀 휘트니(E. Whitney)는 1792년 씨아(cotton gin: 면화(棉花)로부터 씨를 제거하는 도구임)를 개발하여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특허를 받기는 하였으나 구조가 워낙 간단하여 수많은 모조품이 쏟아져 나옴으로서 상업적으로는 별로 재미를 못 보았지만 그의 발명 역시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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