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이 이끌었던 정보기관들은 재래식 분석관들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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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이끌었던 정보기관들은 재래식 분석관들로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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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전-

1981년 4월 1일짜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정동년이 김대중에서 500만원을 받아 300만원은 박관현에게, 200만원은 윤한봉에게 주어 학생시위를 주도케 했다” 그러나 정동년은 5월 17일 밤에 잡혀 갔고, 박관현과 윤한봉은 장기간 도망가 있었습니다. 광주의 운동권, 대학생, 교수 등 거의 모두가 시위기간 내내 잠적해 있었습니다. 학생 시위대를 구성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해 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당한 사람들은 모두 12명으로 이들은 거의 다 광주에서 천대받던 20대의 사회불만 계급들이었습니다.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빠지면서 5월 22일부터 전남도청에 처음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5월 26일 새벽부터 27일 새벽 1시까지 25시간 동안 객기를 부리다 계엄군의 재진입작전을 초래한 부나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거의 다 서로 일면식이 없던 콩가루들이었습니다. 5.18기념재단의 증언록과 당시의 정황들을 살펴보면 중죄를 받은 사람들은 광주의 그 어느 운동권과도 연결돼 있지 않은 그야말로 어리고 개념 없는 떠돌이들이었습니다. 광주사태 기간 내내 광주인에 의한 시위대가 없었다는 것을 이 이상 더 잘 증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1981년의 대법원 판결은 이들이 곧 시위대 중심인물들이며 이들이 복학생 정동년과 윤한봉과 박관현이 심어놓은 시위대라는 결론을 냈습니다.

그러면 그 600명, 그 화려한 공적을 이룩한 학생전사들은 어디로 갔습니까? 당시의 군과 정보 당국은 이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600명이라는 숫자가 그들의 상황일지에 있었고, 그들이 이룩한 업적들이 상황일지에 있었지만 여기에 분석의 필(feel)이 꽂히지 않았습니다. 당시 현장을 지휘하던 7공수 35대대장 김일옥 등 일부 대대장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현란했던 폭동군중의 전략, 전술, 기동 그리고 몸놀림들을 보면서 나 같은 사람들보다 훨씬 우수한 게릴라 전문가들이 군중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합니다.

저는 당시 보안사와 안기부 모두의 대북정보를 관장했던 고 이학봉씨를 여러 차례 만나 확인했습니다. 그는 단호했습니다. “광주에 아마 몇 십 명정도의 간첩들은 동원됐을 것이다. 그러나 600명이 왔다면 광주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을 것이다. 지박사는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이라는 불후의 역사책을 썼다. 공연히 600명 소리를 하면 지박사의 신뢰가 추락해 4권짜리 역사책에 대한 신뢰까지 추락한다. 그 소리는 안 했으면 좋을 것 같다”

당시 중정은 그 수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죄인집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직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눈만 껌벅이는 존재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최규하 대통령은 안기부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활용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전두환을 중정의 수장을 겸직시켰습니다.

그런 중앙정보부가 1981년 이름을 안기부(안전기획부)로 바꾸었습니다. 1985년에 광주사태 일지를 발간하였습니다. 그 일지에는 1980년 5월 21일, 4시간 동안에 털린 무기고 이름과 털린 무기 숫자들이 10여 페이지에 나열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열만 되어 있을 뿐 분석이라는 게 도대체 없었습니다. 이 나열만 돼 있는 자료들을 보고 저는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12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38개 무기고가 털려 2개 연대를 무장시킬 수 있는 5,208정의 총과 다이너마이트 수류탄 등이 피탈됐다”

1982년에 계엄군이 정리한 야심작 “계엄사”(戒嚴史)에도 이렇게 정리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1985년 5월 16일에 발행한 “광주의 분노” 35-45쪽에는 또 다른 6개의 무기고가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44개 무기고라고 정리한 것입니다.

계엄사는 총상 사망자들 중에서 무기고 총으로 사망한 숫자가 75%에 해당한다고 정리했습니다. 이는 그래도 유용한 분석이었습니다. 광주시민을 광주시민이 이토록 많이 죽였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계엄군은 M16만 지참하고 있었습니다. 75%의 광주시민을 광주시민이 죽였다는 것은 언어도단일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계엄사와 제가 이 근거를 제시하였을 때, 광주시민들이 취한 태도입니다. 광주시민들은 북한특수군의 존재를 애써 외면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75%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광주시민이 반드시 공수부대에 의해 사망했다고 해야 광주의 명예가 유지되고, 북한 특수군에 의해 사망했다고 하면 광주의 명예가 훼손된다며 고소 고발을 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억지를 얼마나 더 관용해야 할 것인지 국민과 정부에 묻고 싶습니다.

1985년에 이름을 안기부로 바꾸어 펴낸 5.18보고서에는 가공되지 않은 기초자료들만 있고, 1차 분석조차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군과 정보기관들의 정보분석 능력이 매우 유치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더 분석하면 볼 수 있는 600명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 역시 1980년 10월부터 1년 동안 중정 2차장실 특별보좌관 명목으로 근무를 했고, 그 이전에는 지금의 국방정보본부의 전신인 합참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분석관들과 늘 어울렸습니다.

당시 유능한 분석관들이라 해봐야 보직이 잘 바뀌지 않는 재래식 문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소령 중령들이 신분을 바꾸어 장기 근무를 선택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안사에서는 준위급이 최상의 정보분석관이자 수사관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학문과정을 통해 특별한 분석훈련 과정을 필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모든 정부기관의 분석관들이 이런 재래식 분석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수사가 대부분 거짓말이거나 함량미달인 것은 바로 이러한 데에 기인한다는 것이 제 관찰내용입니다.

이러한 인력이 분석관들이었기에 흩어져 있는 원천자료들을 보면서도 그 속에 묻힌 매우 중요한 광맥을 발견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중령-대령이었던 이학봉의 위치만 하더라도 이런 준위 또는 문관급 수준으로부터의 보고를 통해 정보를 파악하였지, 직접 원천자료를 들여다 볼 찬스가 없었을 것입니다.

세간에는 이 600명이라는 숫자가 광주에서 떠돌던 유언비어거나 탈북자들이 폭로한 숫자일 것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600명은 1995년 7월 18일,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가 작성한 216쪽짜리 최종보고서 ‘5.18관련사건수사결과’의 92-93쪽에 있으며, 여기에는 이들 600명이 이룩한 빛나는 전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검찰도 이를 기록하면서 이것이 북한특수군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600명이 이룩한 화려한 업적은 1인당 수십억 원씩의 보상이 가능하고, 노출되면 그들은 모두 영웅으로 아니 사회적 배우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5.18유공자 공적’을 주장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일은 저질러졌는데 저지른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폭력배들에 두들겨 맞아 불구가 되긴 했는데 때렸다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발견하지 못했고, 내가 때렸다며 나타나지도 않는 그런 형국인 것입니다. 600명의 시체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들은 북한특수군이었기에 보상을 받으려고 나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광주에서 활약한 폭동 시위대는 분명 있었습니다. 이동 중인 20사단을 공격한 300명 조직이 핵심 시위대였습니다.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턴 600명 조직이 핵심 시위대였습니다.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뛰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전남대 앞에 서 있는 계엄군에게 감히 돌멩이 공격을 감행하고, 곧바로 중심가로 달려갔던 200명 대학생 집단이 핵심시위대였습니다. 아침 10:30분 금남로 중심가 파출소들을 소각하여 부나비들을 끌어들인 1,000여명 “학생시위대”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1981년의 정보 당국과 재판부는 이 폭동의 실체 중에서는 단 한 사람도 잡아내지 못한 반면, 이들에 이용된 부나비들만 잡아놓고 광주인들이 기획-연출한 폭동 시위대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1981년의 재판은 몸통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했고 그래서 몸통은 잡지 못했습니다. 재판부가 잡아놓은 20대 개념 없는 부나비들은 600명이라는 몸통에 붙어 있는 깃털이 아니라, 그냥 광주에 날아다니던 부나비들이었습니다. 20세의 구두공 윤석루는 5.18연극 무대를 가장 화려하게 장식됐던 ‘기동타격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함께 5월 26일부터 ‘항쟁지도부’ 핵심간부를 맡았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윤석루를 개념 없는 천방지추라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1981년의 재판부는 이런 윤석루에게 무기징역형을 내렸습니다. 윤석루와 같은 계급의 20대들을 5.18의 핵심 범인들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니 1981년의 정보기관이나 재판부는 얼마나 허술하였습니까? 국가가 위태로울 지경으로 내몰았던 엄청난 폭동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아니 대한민국의 그 어느 특수부대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었던 폭풍작전이 광풍처럼 대한민국 전체를 흔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일정기간 대한민국이 통지할 수 없었던 해방구가 탄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작전을 주도한 몸통이 겨우 20세 구두공 등 그와 유사한 20대 부나비들이었다 하니, 이런 기막힌 판결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들은 운동권과는 사돈의 팔촌도 안 되는 20대 뜨내기들이었습니다, 1981재판부도 1987년의 재판부도 다 엉터리입니다. 사법부가 재판한 결과를 놓고 역사를 쓴다는 것은 이래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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