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5.18 역사에, 왜들 놀라지 않는가?
새로운 5.18 역사에, 왜들 놀라지 않는가?
  • 지만원 박사
  • 승인 2014.09.05 2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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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역사, 지금부터 새로 쓰자

▲ ⓒ뉴스타운
필자를 포함해 일반 국민들은 5.18 광주에는 광주인들이 독자적으로 조직한 시위대가 있는 것으로 막연히 생각해왔고, 1997년 재판부는 그 시위대를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라고까지 정의했다. 5.18측 사람들은 시위대의 중심에 윤상원이 있었다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바치는 행사까지 치렀다.

그러나 윤상원은 시위대를 구성한 적이 없다. 5월 21일 총이 쏟아져나오는 그 순간까지 녹두서점에 숨어서 보초서는 계엄군의 무기를 빼앗을 생각을 하다가 현실성이 없자 후배를 시켜 돌멩이 대신에 철근조각과 나사뭉치를 공격도구로 확보하고 있었다. 광주에 광주인들이 구성한 시위대는 없었다. 이 결론은 평범하게 지나칠 결론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뒤흔들고도 남아야 할 중대한 결론이다.

광주에 유일했던 시위대는 북한특수군 600명이 구성한 시위대 뿐이었다. 북한군 600명을 중심으로 철없는 10대 학생들, 개념 없는 20대 양아치 등 사회불만자들이 소모품으로 가담했다. 당시 광주에서는 모든 운동권 인물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학생-교수들도 다 숨었다. 하층 노동자들은 다 뿔뿔이 산재한 콩가루였다. 광주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도시가 이러했다. 북한특수군 600명이 없었다면 광주도 여타 지역처럼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600여 명이 광주에서 특히 5월 18일부터 21일까지 수행한 작전은 이스라엘이나 미국, 영국 등에서 양성하고 있는 최고급 특수부대들의 능력으로나 가능할 수 있을 고난도 작전이었다. 1976년 이스라엘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국제 납치범들이 이스라엘 국민 100여명을 감금하고 있는 것을 이스라엘군 특공조가 구해낸 사례가 있다. 이는 이스라엘 군의 자랑이요 세계 전사에 빛나는 특공작전 사례였다.

그러나 10.26 직후부터 계획적으로 소단위로 남파한 김일성 군대 600명이 감히 광주 한 복판에서 우리 공수부대와 맞서 광주의 사회불만세력을 소모품으로 활용하여, 파출소, 세무서, MBC, 차량 등에 불을 지르는 방법과 차량돌진 등 기발한 공격방법들을 선보이고,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방법 등을 구사하여 군중을 모으고 그들을 방패로 하여 신분을 속이고, 민간인들을 칼, 몽둥이, 돌멩이, 총으로 살해해 놓고 이를 계엄군에 뒤집어씌움으로써 계엄군과 광주시민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도록 만든 대규모의 기발한 도시게릴라 작전은 세계 군사 역사에 '기적' 정도로 기록돼야 할 걸작(?)이다. 노동당이 발간한 대남공작 역사책들에는 이미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품평이 기술돼 있다.

광주에는 광주인들이 구성한 시위대가 없었다. 민주화운동도 없었다. 오직 유일한 시위대는 북한특수군이 학생 신분으로 위장하여 눈부신 활동을 한 그 600명 밖에 없었다. 군중을 형성한 광주인들은 거의가 다 철없는 10대와 개념 없는 20대 양아치로 대표되는 계급들이었다. 광주시위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북한특수군의 원정작전이었다. 광주에는 북한군 작전만 있었고, 광주인들의 민주화시위는 없었다. 민주화라는 단어는 훗날 노태우가 자기 이익을 위해 정략상 던져준 선물일 뿐이다.

이 결론은 널리 알려야 할 중대한 결론이다. 며칠 전까지의 결론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결론이다. 며칠 전까지의 결론은 광주에 시위대도 있었고, 위장한 북한특수군의 모략작전도 있었다는 '병존론'이었다. 그러나 최근 3회에 걸쳐 최근글에 올린 글의 결론은 '600명 유일론'이다. 음미하면 할수록 가슴이 떨려야 할 중차대한 결론이다. 그런데 서운하게도 이를 음미하고 간파한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식으로 더 설명을 해야 많은 독자들이 이 새로운 결론의 중차대함을 이해할 수 있을까!

< 1981년의 5.18 재판은 아귀가 안 맞아 >

1981년의 5.18 판결의 핵심은 이렇다. "정동년이 김대중에서 500만원 받아 300만원은 박관현에게, 200만원은 윤한봉에게 주어 학생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정동년은 5월 17일 밤에 잡혀 갔고, 박관현과 윤한봉은 도망가 있었다. 광주의 운동권, 대학생, 교수 등 거의 모두가 시위기간 내내 잠적해 있었다. 학생 시위대를 구성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당한 사람들은 모두 12명으로 이들은 거의 다 광주에서 천대받던 사회불만세력들이었고,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빠지면서 전남도청에 처음으로 들어와 5월 26일 새벽부터 25시간 동안 객기를 부리다 계엄군의 재진입작전을 초래한 부나비들이었다. 이들은 정동년 등 운동권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노옹자들이었고, 그들은 거의 다 서로 일면식이 없는 콩가루 숫자였다.

1981년의 재판부는 이동 중인 20사단을 공격한 300명 조직의 실체, 44개 무기고를 불과 4시간 만에 턴 600명 조직의 실체,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뛰었던 바로 그 순간에 전남대 앞에 서 있는 계엄군에게 감히 돌멩이 공격을 감행하고, 곧바로 중심가로 달려가 파출소들을 소각하여 부나비들을 끌어들인 250명 단위의 학생조직(?)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다. 1981년의 재판은 사리에 맞지 않고 엉성했다. 

< 1997년의 판결은 근거 없는 우격다짐의 인민군 재판 >

1997년 5.18 판결문의 핵심은 이렇다. "광주시위대는 신군부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결집된 준-헌법기관이다. 시위가 전국으로 속히 확산됐어야 했는데 신군부가 무력으로 조기에 진압한 행위는 분명한 내란행위다."

그러나 광주에는 광주인들이 독자적으로 구성한 시위대가 없었다. 광주에서 유일했던 시위대는 북한특수군 600여 명 뿐이었고, 나머지는 이들이 동원했거나 이들에 부화뇌동한 철없는 10대와 하층계급의 노동자, 양아치, 무직의 청년들이었다.

5.18 역사, 지금부터 새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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