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 현 생애를 희생하는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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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 현 생애를 희생하는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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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의 이방인에 나타난 무신론주의

프랑스의 소설가 앨버트 카뮈가 쓴 "이방인"은 주인공이 우연성에 의하여 살인을 하고,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도 신의 구원을 거부하며, 인생의 삶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특이하게 다룬 작품으로서 청소년들에게 한번쯤 읽어 볼 것을 추천한다.

오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그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20킬로쯤 떨어진 양로원에 어머니는 살고 있었다. 자기 어머니가 죽은 날짜조차 확실하게 모르며, 자기와는 무관한 일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고도 늘 하던 버릇대로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란 하나밖에 없는 거요." 내가 레스토랑을 나올 때 모두들 문간까지 바래다주며 말했다.

나는 좀 멍청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도중에서야 생각이 나서 검은 넥타이와 완장을 빌리러 갔다. 흔들리는 버스 때문에 어지럽고, 가솔린 냄새로 역겨워서 괴롭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버스에서 잠을 잔다.

양로원에 도착하자 원장은 말했다. "어머니는 이곳에 3년 전에 들어왔습니다. 의지할 사람이라곤 오직 당신 하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가 나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정을 설명하자, 그는 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변명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 어머니의 서류를 읽어 봤습니다. 부양하실 수가 없었더군요. 어머니는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지만 당신의 월급은 적었지요. 어쨌든 어머니는 여기에 계셔서 더 행복했습니다." 라는 말을 한다.

시신을 입관한 후여서 보실 수 있도록 뚜껑을 열겠다고 했지만, 그만 두라고 한다. 왜 보고 싶지 않은지를 반문하는 말에 "글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어머니의 시신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조차 안보겠다고 해서 오히려 그것을 물었던 관리인을 더 당황하게 만든다.

양로원에 있는 어머니의 늙은 친구들이 밤샘을 하러와서 모두가 사무적인 행동을 한다. 하지만 어머니와 가장 친했던 한 노인만이 매우 슬프게 울었다. 그 노인은 짧은소리를 잇따라 내며 하염없이 울었다.

주인공과 다른 노인들은 묵묵히 앉아서 어머니의 관이나 지팡이 같은 것을 무표정하게 보고 있었다. "저 노인은 어머니와 매우 자별하게 지낸 유일한 벗인데, 이제 혼자가 됐습니다." 하는 말을 들었지만 주인공은 빨리 그 노인이 울음을 그쳐주기 바랬으며, 허리가 아프다는 생각과 대면하기가 거북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떴을 때 관리인이 커피를 주어서 마셨다. 밤이 지나가는 동안 한번 눈을 떴는데, 모두들 쭈그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노인만이 지팡이를 움켜쥔 채 손등 위에 턱을 괴고, 마치 내가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이제 실컷 잠을 잘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장례를 치른 다음 날 해수욕장으로 가서 여자 친구를 만나 놀다가 저녁을 먹고, 희극영화를 본 후에 자기 집에 데리고 와서 정사를 즐긴다.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는 물음에, 자기는 아무래도 좋지만, 여자가 원한다면 결혼해도 좋다고 말한다. 그녀는 사랑하는 지를 알고 싶어했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결혼을 하는지를 반문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 같은 방관자적 생활이 여러 형태로 표출된다. 하지만 우연찮게 한 불량배의 싸움에 말려들며 살인을 한다. 죄에 대한 심판과정에서 당초 살인 동기와는 관계가 없는 어머니의 문제로 인하여 더욱 나쁜 인간으로 형상화되어 사형을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죽는 순간에도 신의 구원을 거부하며 자기는 현재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신의 존재마저도 부정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며, 신부의 면회조차 거절한다.

당신은 지금 아무 희망도 없으며, 죽으면 그만이 라는 생각으로 살고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신부는 "인간은 그와 같은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슬픈 표정을 지며 그를 한번 안아 보겠다고 했다. 그는 귀찮다며 거절했다.

신부는 그에게 이 땅에 대해 그렇게도 잘 아느냐는 질문을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세에 대해서도 "지금의 이 생애를 회생할 수 있는 그러한 생애" 라고 외치며, 이제 그런 이야기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당신의 그 하나님, 타인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사람들이 선택하는 생활과 숙명, 그런 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가, 단지 하나의 숙명이 나 자신을 사로잡고, 나의 형제라고 하는 수많은 특권자들을 사로잡는 것이 아닌가?

세상은 특권을 가진 사람들밖에는 없다. 하지만 우연한 일로 장차 처벌을 받게 될지 모른다. 내가 살인범으로 고발되어 어머니의 장례식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고 해서 사형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중요성이 있는지를 말한다.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써 나로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 라는 말로 신에 대한 부정과 삶에 대한 부조리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카뮈는 이 작품을 종결하고 있다.

이 작품은 2차 대전 직후에 젊은 세대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작품이다. 어떻게 그렇게 신에 대한 부정과 인간의 삶에 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살수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또 다른 생각의 양면성을 보게 되어 분노를 느끼게 하기도 하고 감흥을 주기도 하여,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으로 청소년들에게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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