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시작의 끝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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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시작의 끝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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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은 하염없이 걸었다.

지금 걷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길이 보이는 대로 무작정 걸을 뿐이었다. 오늘이 강촌에서 최 형사와 헤어진 지 며칠째 되는 날인지도 기억에 없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걷기만 했다. 몸이 천근 만근 무거웠지만 걸음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수시로 눈앞이 아득해지는 현기증을 느꼈지만 감기는 두 눈을 부릅뜨고 걸을 뿐이었다.

태진은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다.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이 가는 대로, 지쳐 쓰러져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걷고 싶었다. 몸도 정신도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저 걷고 또 걸을 뿐이었다. 몇 번이고 읽어 누더기가 된 진희의 일기장은 이제 흔적도 없이 불태워져 없었다.

머리 위로 송곳처럼 내리꽂히는 햇살이 의식의 정수리를 하얗게 태워가고 있었다. 이따금, 어쩜 이대로 미쳐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순간뿐이었다. 이미 의식이 차단된 육체는 그저 습관처럼 발을 내딛게 하고 있었다. 입술이 허옇게 부르트다 못해 갈라져 흘러내린 피는 굳어 딱지가 내려앉고, 몸살까지 겹쳐 부어오른 목이 침을 삼키기도 고통스럽게 했다. 발바닥도 부르터 터지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이젠 통증을 느낄만한 감각조차 없었다.

아! 바다였다!

태진이 산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며 바다가 보였다. 어쩜 자신이 이렇게 무작정 걸은 것은, 바다가 보고 싶어서 였는지도 몰랐다. 한걸음에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뿐, 눈앞에 보이는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데도 얼마나 지루한 시간이 흘렀는지 몰랐다.

태진은 바닷가 바위 위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담배를 물었다. 지칠 대로 지친 육체는 담배 연기 한 모금에도 마른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 나른하게 젖어갔다. 불이 필터에까지 타들어 오도록 담배연기를 폐부 깊숙이 빨아댔다.

“진희야…!”

태진은 모래 사장을 걸으며, 아스라한 수평선을 향해 나지막하게 불러보았다. 파도가 밀려와 발목을 적시었다. 아직도 태진의 뇌리에는 칼바위 벼랑에서 돌멩이처럼 떨어져 내리던 그녀의 환영이 선명하게 각인돼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 눈물이 완전히 말랐을 만도 한데, 굵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얼마나 더 끝없는 길을 헤매면 그녀를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밀려오는 파도가, 마른 보릿단처럼 가벼워진 태진의 몸을 강타했다. 그러나 태진은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파도를 맞았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순식간에 밀려왔다 순식간에 밀려갔다.

태진이 바다를 향해 몇 걸음 나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몸이 바다 쪽으로 기울며, 의식이 가물거렸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생각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은 그는, 그만큼 지쳐 있었다.

때마침 밀려오는 큰 파도를 온몸으로 맞은 태진은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짠 바닷물이 코와 입으로 마구 파고들었다. 물 속에서도 가느다란, 거미줄처럼 가냘프게 살아 있는 의식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고 버둥댔다. 몸이 파도 속으로, 바다 한가운데로 휩쓸려가는 느낌을 받은 순간, 태진은 기어이 가느다란 의식의 끝자락을 놓치고 말았다.

“이제 정신이 드세요?”

태진의 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짙은 안개에 휩싸인 듯 흐릿하게 보이던 윤곽도 점점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예요.”

소영이었다.

태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병원이었다. 팔에 링거 주사 바늘이 꽂혀있었다. 태진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대로 누워계세요.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어요.”

소영이 말렸다.

머리가 몹시 지끈거렸다. 심한 차멀미를 하는 기분이었다. 방 안에서, 그토록 싫어하는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헛구역질이 나왔다. 소영이 그런 태진의 등을 두둘겨주었다. 헛구역질은 한참만에야 멈추었다.

“어떻게 내가…?”

“그건 내가 선생님에게 묻고 싶은 말이에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일 주일 동안 연락도 없고, 연락조차 안 되더니…… 경포대에서 의식을 잃고 병원에 누워있다는 연락을 받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요?”

그제야 태진은 지금의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왜 병원에 누워 있는가를 의식하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경포대에서 파도에 휩쓸린 자신을 구해준 것이 틀림없었다. 그곳은 언젠가 진희와 함께 여행을 갔던 곳이었다.

“…… 미안해.”

태진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소영에게, 진희 때문에 그렇게 정신 없이 헤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해 놓고 미안하다는 한 마디면 돼요? 도대체 이유가 뭐예요? 뭣 때문에 자신을 그토록 혹사한 거냐고요?”

“…… 잃어버린 나를 찾고 싶어서…… 좀, 방, 황했어.”

태진은 자신이 들어도 궁색하게 들리는 변명을 했다.

“잃어버린 나라고요? 그렇다고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가요? 그래, 이젠 하나도 남김없이 다 찾았나요?”

소영이는, 그런 태진을 보며 어이없음과 놀람과 짓궂은 장난기가 뒤섞인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태진은 그렇게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소영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다. 입장이 바뀌어 자신이 소영이라고해도 황당하긴 마찬가지 였으리라.

“응, 하나도 남김없이 다 찾았어.”

태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남김없이 찾았다니 다행이군요. 내가 이래서 예술하는 사람과는 결혼을 안 하려고 했었는데…… 앞으로는 절대, 절대로 이런 일 용납 못 해요. 아직은 결혼 전이니까 한번 봐주는 거예요. 내 말 알아들어요?”

“알았어.”

태진은 말 잘 듣는 꼬맹이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꼭 산적 두목 같애.”

소영은 화난 얼굴 표정이 금세 풀어지며, 수염이 망가진 칫솔모처럼 아무렇게나 덥수룩하게 자란 태진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비가 오나?”

“네.”

“창문 좀 열어줘.”

소영이 창문을 열었다.

굵은 빗방울이 작살처럼 내리꽂히고, 하늘은 심술난 장난꾸러기처럼 잔뜩 찌푸려 있었다. 태진은 손을 뻗어 소영이의 손을 잡았다. 보드랍고 따뜻한, 이제 익숙해진 손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그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살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태진은 이 순간만큼은 엄청난 산고 끝에 생명을 탄생시킨 산모처럼 평온하고 행복한 느낌이었다. 소영이 태진의 마음을 알았는지, 고개를 숙여 허옇게 소나무 등걸처럼 부르튼 입술에 부드럽고 향긋한 입술을 포개었다. 태진은 그런 그녀의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선생님을 잃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기나 해요?”

곱게 눈을 흘기는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태진은 잃어버린 자신을 소영이에게서 찾고 싶었다. 이젠, 이제는 정말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태진의 손이 소영이의 허리를 지나 브라우스 단추를 끄르고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독실이긴 하지만 불안해서 자꾸만 몸을 빼는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단단히 옭아매고, 브래지어를 밀어올려, 잔뜩 긴장해 딱딱해진 유두에 입술을 박았다. 마치 몹시 배가 고픈 갓난 아이가 엄마 젖가슴을 탐하듯…….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요?”

소영이는 처음엔 그렇게 말하며 거부하는 몸짓을 보이더니, 이내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태진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주며 중얼거렸다.

“말썽꾸러기 우리 애기…….”

그 말을 듣는 순간, 태진은 까닭을 알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솟구친 눈물이 방울져, 또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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