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끝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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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의 끝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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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겠어요?”

소영이 걱정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며 손으로 태진의 이마를 짚었다.

태진은 그들이 다녀간 뒤 갑자기 오한이 나며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하루쯤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전에도 이런 때가 가끔 있었거든.”

“그래도 걱정이 돼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자니까 웬 황소 고집이에요?”

“난 체질적으로 병원은 질색야. 소독약 냄새가 너무 싫어.”

“하여튼 특이한 성격이야.”

소영은 손수 끓인 야채 수프를 쟁반에 얹어 침대에까지 들고왔다. 태진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그녀의 성의를 생각해서 몇 술 떴다. 힘들겠지만 내일쯤에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소영이와 함께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었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텔레비전 좀 켜봐.”

뉴스를 보고 싶었다. 진희에 대한 색다른 것이 발견됐는지 궁금했다. 역시 스타트 뉴스는 진희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진희의 죽음으로 나석만 회장의 집안이 언론의 집요한 추적을 받고 있었다. 진희와 배다른 형제들의 일거수 일투족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나 회장과 진희 어머니의 과거 만남도, 당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낱낱이 공개되었다. 진희가 성장했다는 전라도 깊은 산골의 '‘화심사’가 갑자기 유명해졌다.

소영이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나진희라는 여자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처음 보는데, 어쩐지 낯설어보이지가 않아요. 어디선가 꼭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

“……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 가엾어요.”

뉴스는 진희가 몸을 날린 북한산 칼바위 벼랑을 비치고, 죽는 순간까지 안주머니 깊숙이 지니고 있던 지갑에서 나온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은 언젠가, 한강 고수부지에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는 진희를 태진이 찍은 것이었다. 진희는 그 사진을 죽는 순간까지도 지갑 속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나운서는 진희가 나석만 회장의 사체가 어디에 있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소영이 사과를 깎으며 말했다.

“그동안 바람깨나 피운 대한민국의 잘난 남자들, 등골이 서늘했을 텐데,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자게 생겼어요. 안 그래요?”

“그, 글쎄…….”

“무슨 대답이 그래요? 자신 없게 대답하는 걸 보니, 혹시 선생님도 나 모르게 바람 피우고 다닌 거 아니에요?”

“…….”

태진은 소영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농담이에요. 제 말에 화났어요?”

소영이는 태진이 입을 다물고 대답을 하지 않자 금세 호들갑을 떨었다. 태진은 진희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이해되지 않는 게 한 가지 있는데, 그녀는 왜 살해한 사람들에게 내가 달고 다닌 것과 똑같은 검정색 종이 장미를 남겼을까요?”

“…….”

태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진희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화면에서 본, 진희가 칼바위 벼랑에서 떨어져 내리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 아냐, 아무것도.”

“정말 이상하네. 어두운 표정도 그렇고…….”

소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뉴스는 다음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태진은 눈을 감았다. 쉬고 싶었다. 이제 길고 지루한 싸움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또, 진희나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금세 시궁창 속의 새앙쥐 같은 인간들로 넘치리라.

소영이 갑자기 반가움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비가 오나봐요!”

“비?”

정말 빗소리가 자욱하게 들려왔다. 갑자기 비가 보고 싶었다.

“우리, 거실로 나갈까?”

“괜찮겠어요?”

“응.”

태진은 베란다 창문을 열고,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흔들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빗방울이 굵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꽁지가 하얀 새 한 마리가 스카이콩콩을 타는 아이처럼 나뭇가지 사이에서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빗소리가 혼란스럽던 마음을 어느 정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빨리 아기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소영이 태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꿈을 꾸듯 정원에 시선을 주었다.

태진은 소영이의 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소영일 닮은 딸이면 좋겠어.”

“어머! 난 아들을 낳을 거예요.”

소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테니스공처럼 통통 튕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딸이 더 좋아.”

“싫어요. 난 아들을 낳을 거라니까요.”

소영이 정색을 했다.

“그래? 그럼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구만.”

“뭔데요?”

소영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쌍둥이를 낳는 거야. 아들, 딸로.”

“뭐라고요!”

소영이의 눈이 정원의 접시꽃처럼 커다랗게 벌어졌다.

“이 욕심꾸러기!”

소영이는 주먹으로 태진의 어깨를 때리며 킬킬거렸다. 흔들 의자가 마구 흔들려, 태진은 그렇지 않아도 아픈 머리가 더 아팠다. 하지만 소영이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영은 태진의 무릎에 얼굴을 기대고 담배를 물었다. 그녀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허공에 추상화처럼 아주 느리게 흩어져갔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 있는 사람은 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태진은 소영이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의 이 아픔도, 가슴이 멍멍할 정도로 찢기는 이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나아지겠지. 그리고 서서히 잊혀져가겠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또 생각이 나겠지. 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는 덜 아프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태진은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볼을 타고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왜 그래요?”

소영이가 깜짝 놀라 물었다.

“……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태진은 애써 웃으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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