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의 끝 - 2
스크롤 이동 상태바
시작의 끝 -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날 밤.

태진은 이번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는 두 사내의 방문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강력계 형사반장과 국가정보원 요원이었다. 태진은 언젠가 그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들은 태진의 표정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불독이 태진을 뚫어져라 보며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나진희 씨와는 어떤 사이였습니까?”

“무슨 뜻이죠?”

“그러니까 애인이었느냐는 것을 묻는 겁니다.”

“…… 저를 공범으로 보는 겁니까?”

태진은 두 사람을 똑바로 보았다.

“…… 솔직히 확신은 없습니다. 그래서 확인을 하러 온 겁니다. 나진희 씨와 이태진 씨가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알고 왔습니다. 기분 나쁘게 듣진 말기 바랍니다. 혹시 민소영 씨, 나진희 씨와 삼각 관계였습니까?”

최 형사가 태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태진은 이 순간, 절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자신을 다잡았다. 그것은 진희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을 결코 헛되이 해서는 안 되었다.

태진은 일단 마음을 정리할 시간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잔 하시겠습니까?”

“좋습니다.”

최 형사가 말했다.

태진은 위스키와 술잔과 육포를 가지고 와 그들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리고 스트레이트로 단숨에 들이킨 다음 천천히 담배를 뽑아 물었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저의 물리 치료사였습니다.”

“물리 치료사요?”

최 형사가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며, 되물었다.

“나진희 씨와 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어려서부터 절에서 성장하며 각종 무술을 배워 무공이 대단했습니다.”

“그 정도는 저희도 알고 왔습니다.”

“그녀는 특히 내공이 뛰어나고, 사람의 신체에 대해서는 손바닥의 손금을 보듯이 훤했습니다. 내 병원 기록 카드를 확인해 보면 알겠지만, 나는 평소에도 몸이 자주 아팠습니다. 이따금 허리가 아파 고생한 적도 있고요.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그녀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 그녀가 집에 드나들며 수시로 기 치료와 물리 치료를 겸해왔지요. 물론 보수는 넉넉히 주었고요. 나도 지금 충격이 큽니다. 그녀와 내가 가깝게 지낸 것은 사실입니다. 남녀 사이로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조사했다니 아시겠지만, 물리 치료사 일을 한 것은 그녀의 생계 수단이기도 했으니까요. 가깝기는 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였습니다. 나도 텔레비전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최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태진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미 나진희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

“방금 나진희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고 했는데, 자세하게 말해주겠습니까?”

불독은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을 태진의 눈에서 떼지 않고 물었다.

태진은 그 부분을 조금도 거짓말하지 않고 말해 주었다. 달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일어났던 식중독을 겸한 배앓이 사건이 인연이 됐던 점을. 태진은 그들이 자신과 진희의 관계를 그런 정도로만 믿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태진 씨는 나진희와 특별한 관계가 아니라고 했는데, 함께 밤을 새우고 때론 하루에도 몇 번씩 장시간 통화를 한 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불독은 집요했다.

태진은 완전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불독은 그런 태진의 미묘한 표정의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태진은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역시 만만찮은 상대들이었다.

“그녀는 문학을 좋아했습니다. 음악 감상도. 특히 그녀는 외로움을 탔습니다. 그래서 우린 술도 마시며 많은 시간을 함께했을 뿐입니다.”

“방금 '‘우리’라고 했는데, 언어에 민감한 작가니까 잘 알겠지만, 남녀 사이에서 우리라는 복수 개념, 다시 말해, 동질성 개념의 말을 쓸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니었을 거라는 느낌을 저버릴 수가 없는데요.”

불독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태진은 놓치지 않았다. 태진은 순간적으로 '‘아차!’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뭔가 제 말에 대해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저는 우리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저의 말버릇이라고나 할까요. 마음이 통하는 모든 사람들을 칭할 때 우리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편입니다.”

“그래요…….”

불독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게 가까이 지내면서도, 한 번도 이 사건과 관련된 얘기를 들은 적도 없다는 겁니까?”

“다시 말하지만, 나도 텔레비전을 보고 그녀가 대한그룹 나석만 회장의 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묻지도 말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나진희는 이태진 씨와 민소영 씨가 결혼을 발표하기 전부터도 특별한 관계였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나요?”

“그것이 이 사건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태진은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진희가 지금까지 살해한 사람들의 사체에 남긴 종이 장미가, 평소 민소영 씨가 가슴에 달고 다닌 종이 장미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묻는 겁니다.”

“…… 알고 있었습니다.”

태진의 머리 속은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회전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만났고, 함께 밤을 새웠고, 장시간 통화도 했다 이 말이죠? 최근에 나진희를 만나 게 언제입니까?”

“날짜는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이태진 씨가 먼저 연락을 해선가요?”

“그렇습니다. 그냥 궁금하기도 하고, 술 한 잔 같이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요.”

태진은 그들이 진희와 자신이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직감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그런 부분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가는 오히려 의심을 받을 거란 생각에 진희와의 만남을 시인했다.

“혹시 나진희가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까?”

“모릅니다. 방송을 보고 그녀에게 공범의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난 지금도 모든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지독한 악몽을 꾸고 있는 기분입니다. 진희가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내가 아는 그녀는 심성이 너무 고운 여자였습니다. 벌레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거 같은…….”

태진은 얼굴 가득 고뇌하는 모습을 내비치기 위해서 표정 관리를 했다. 이들에게 자신이 그런 엄청난 일에 끼여들 만큼 독하고 강한 인물이 못 된다는 것을, 그저 글이나 쓰고 지내는 얌전하고 평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어떡하든 이들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진희가 죽으면서까지 자신을 지켜주려고 한 것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결코 그녀의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 됐다. 오늘처럼 자신이 방송국에 몸 담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갖기는 처음이었다. 연기자들과 함께 생활한 것이 표정 연기를 하는 데 자신도 모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 형사는 계속해서 이태진의 얼굴에 나타나는 아주 작은 표정의 변화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불독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별의별 범죄를 저지른 인간들과 부딪치며 살아왔다. 조사를 할 때, 범인들의 표정만 보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있는 베테랑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태진이라는 사내에게서는 범죄의 냄새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평범한,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여린 감성의 작가라는 느낌뿐이었다.

최 형사가 꺾어 마시던 술을 한입에 털어넣고 물었다.

“요즘 민소영 씨와 행복합니까?”

“그 질문도 이번 사건과 관련된 조사 내용입니까?”

태진은 일부러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아, 아닙니다. 이건 내 개인적인 질문입니다.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워낙 유명한 분과 결혼 발표를 한 남자의 심정은 어떤가 해서요.”

최 형사가 멋적게 웃었다.

“솔직히 너무 행복합니다. 어느 땐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좋습니까?”

처음으로 세 사람은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한번 웃고나자,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태진은 술병을 들며 말했다.

“일에 방해가 안 된다면 한 잔 더 하시죠.”

“그럼 딱 한 잔만 더 하겠습니다.”

태진은 세 개의 빈잔을 채웠다. 이제 큰 고비는 지나갔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였다.

최 형사가 거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혼자 살기에는 집이 너무 크고 좋습니다.”

“원래 아파트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아서요. 다행스럽게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도 좀 있고, 건방진 얘기 같지만 시끄러운 곳에서는 글이 써지지 않기도 하고 해서…….”

“잘은 모르지만 이해는 할 거 같군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집을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최 형사가 물었다.

“그러시죠.”

태진은 두 사람을 안내해, 집 안 구석구석을 보여주었다.

“지하실도 보여주시죠.”

지하 보일러실에 내려간 두 사람은 이곳 저곳을 꼼꼼히 살폈다. 소각로 근처를 살피던 최 형사가 허리를 굽혀 뭔가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보지 못했다.

태진은 그들이 비밀 지하 공간을 결코 발견할 수 없을 거란 걸 알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두 사람이 비밀 공간으로 통하는 문이 숨겨져 있는 공구함 캐비닛 문을 열어 볼 때는 금방이라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됐습니다. 그만 올라가죠.”

지하실을 꼼꼼히 둘러본 최 형사가 말했다.

태진은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긴 숨을 내쉬었다.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그들이 집에 다녀간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오늘의 조사를 끝으로 자신이 용의선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태진은 그들이 자신의 연기에 완벽하게 속아서, 진희와의 관계를 환자와 물리 치료사관계 정도로만 생각하길 바랄뿐이었다.

불독이 말했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태진 씨도 저희 입장을 충분히 이해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사건이 사건인만큼, 혹시 다음에라도 저희가 협조를 청하면 도와주어야겠습니다.”

“그, 러, 지요.”

태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불독이 먼저 나갔다. 뒤따라 나가려던 최 형사가 불독이 보이지 않자 악수를 청했다. 태진은 어색하게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는 태진의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

“우리 안식구가 민소영 씨의 열렬한 팬이에요. 나야 시간이 없어서 텔레비전을 자주 볼 기회가 없지만…… 두 분의 결혼 발표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실은 결혼을 발표한 날 이 집에 왔었습니다. 그리고 나진희가 산 집에서 그녀의 일기장도 발견했고요.”

“일기장을요?”

태진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 일기장을 보면, 그녀가 이태진 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런 범행을 저지르면서도, 나중에라도 불똥이 이태진 씨에게 튈까봐 고심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더라고요.”

“…… 제가 볼 수 있을까요?”

태진은 최 형사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볼 수 있지요. 지금은 곤란하고, 가까운 시일 안에 보여줄 것을 약속하지요.”

“고맙습니다.”

진희는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하게 위장된 일기장을 남긴 모양이었다. 내용을 읽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그랬을 것이 틀림없었다. 태진은 대문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순간 눈물이 핑그르 돌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