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된 약속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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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된 약속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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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젯밤 8시.

태진은 일식집 해궁 입구 주차장에서 나석만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이 조금 지나 나 회장이 나타났다. 나 회장은 약속대로 운전기사를 돌려보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태진은 나 회장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나석만 회장님이시죠?”
“당신은 누구요?”

나 회장은 약간의 경계심을 갖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진은 진희가 준, 자신의 어릴 적 사진 한 장과 반으로 쪼개진 옥(玉)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사진과 옥 목걸이를 받아들고 유심히 보던 나 회장의 얼굴이 흐린 불빛 아래서도 붉게 상기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아가씬 어디 있소?”

나 회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시죠.”
“그러는 댁은 누구요?”
“전 단지 나진희 씨의 부탁으로 심부름 온 사람입니다.”

진희는 해궁 주차장 후문 밖 차 안에 있었다. 태진 역시 아직까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진희가 하라는 대로 하고 있었다. 나 회장이, 사진과 옥 목걸이를 보여주면 순순히 따라올 거라고 했다. 그 까닭을 물었지만, 진희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진희의 말처럼 나 회장은 순순히 태진을 따라왔다.

“저 찹니다.”

태진은 후문 후미진 곳에 세워져 있는 자신의 차를 가리켰다. 실내등을 켜지 않아, 차 안에 있는 진희의 모습이 보안등 희미한 불빛에 실루엣으로 보였다. 나 회장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희를 바라보다가 차 쪽으로 걸어갔다. 진희가 태진을 보았는지 차 뒷문을 열었다.

“타시죠.”

태진은 차 앞에서 잠시 망설이는 나 회장에게 말했다. 나 회장이 차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으려는 순간, 전자 충격기를 그의 목에 댔다. 나 회장은 한 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졌다. 재빨리 차 문을 닫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테이프로 손과 발을 꼼짝 못하게 묶었다. 그리고 그를 차 바닥에 뉘고, 준비한 빈 설물 박스로 그의 몸을 덮었다.

“미행하는 차 없지?”
“네.”

대답하는 진희의 목소리가 굳어버린 가래떡처럼 딱딱했다.

태진은 몇 번이고 백미러를 통해 뒤를 보았다. 만일에 대비해 차를 곧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차 왕래가 거의 없는 한적한 곳으로 돌았지만 따라오는 차가 없는 것이 분명했다.

“이젠 말해 줄 수 있겠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나
회장이 진희 어릴 적 사진과 목걸이를 보고 그렇게 순순히
따라왔지?”

태진은 그것이 몹시 궁금했다. 나 회장과 진희가 어떤 관계이기에 그가 진희의 전화만 받고 그곳까지 혼자 온 것일까?

“곧 알게 돼요.”

진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 후문에 도착해서 라이트를 끄고, 미리 열어둔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조용했다. 태진은 나 회장을 지하실로 옮기고 진희를 남겨둔 채, 다시 차를 끌고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실의 불을 환하게 밝혔다.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본다면 또렷하게 볼 수 있도록. 거실 문도 활짝 열고 창가에 서서 담배를 물었다. 텔레비전도 켰다.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잠시 후, 지하실로 내려갔다.
진희는 어느 새 나 회장의 손목을 쇠고랑으로 채워놓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아직 테이프가 붙어 있고, 입도 재갈이 물린 상태였다. 나 회장은 신음을 내며 꿈틀대고 있었다.

“한 잔 해?”

태진은 적포도주 병과 잔을 가져와 진희의 손에 들린 잔에 따르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불빛에 비친 적포도주의 빛깔이, 붉은 꽃잎의 즙을 짜낸 것처럼 무척 고왔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쳤다. 맑고 투명한 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시작하지.”

태진은 다 마신 포도주 잔을 놓고 일어섰다.

“입의 재갈은 풀지 마세요.”
“왜?”
“시끄러우니까 길 좀 들인 다음에 풀어줘요.”

태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쇠고랑을 풀었다. 나 회장은 비틀거렸다.

“옷을 벗는다. 실시!”

태진은 나지막한 소리로 명령했다. 나 회장은 엉거주춤 선 상태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반복한다. 앞으론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옷을
벗는다. 실시!”

나 회장이 느린 동작으로 양복 윗도리를 벗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렸다. 태진은 손에 들고 있던 채찍으로 사정없이 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으음!”

나 회장은 재갈이 물린 입으로 간신히 신음을 토해냈다.

“옷을 다 벗는다. 실시!”

그의 손놀림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옷을 다 벗고 팬티만 남았을 때였다.

“그만!”

진희가 소리를 질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진희는 왜 나 회장이 팬티를 벗는 것을 막았을까. 다시 나 회장은 진희의 손에 의해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졌다.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탄탄한 그의 체격이 우람했다. 진희가 그의 눈을 가렸던 테이프를 확 잡아뗐다. 밝은 빛 때문에 잠시 눈을 찡그리던 그가 진희와 태진을 보았다. 잠시 후, 그의 눈이 크게 벌어지며 놀라는 눈치였다. 뭔가를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입에 물린 재갈 때문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선생님에게 고백할 게 있어요.”
“고백?”

태진은 진희를 보았다.
진희가 의자에 앉았다. 태진도 따라 앉았다. 진희가 입을 연 것은 담배 한 개비가 거의 타들어갔을 때였다.

“…… 저 인간이 내 아버지예요.”
“!”

태진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나 회장을 보았다.
진희는 표정없는 얼굴로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어머니의 자살, 나 회장의 호적에 올랐던 것, 절에 버려지게 된 과정까지, 남의 얘기 하듯 담담하게 했다. 태진은 진희의 얘기를 들으며 가슴 한 구석이 무너져 내리는듯한 아픔을 느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진희가 위험을 무릅쓰고도 왜 그토록 나 회장을 납치하려 했는지를.

“…… 죽일 거야? 미우나 고우나 진희 아버진데?”
“…… 죽여야겠지요.”

진희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힘주어 말했다.

태진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오래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이번 일의 권한은 모두 진희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나 회장에게서 뭔가 한 마디쯤은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사형수에게도 유언할 기회를 주는 법인데, 어쨌든 진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버지잖아.”
“난 아버지란 이름을 오래 전에 잊었어요. 한 때는 아버지란 단어만 떠올려도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가가 짓물르도록 운 적도 있었지만…… 어느 날, 어머니가 어떻게 죽어갔는 가를 알게 된 그 순간, 내 가슴에서 아버지란 이름을 깨끗이, 깨끗이…… 지워버렸어요. 아니, 그리워했던만큼 증오의 대상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 되겠군요. 지금 이 순간, 구천의 어둠 속에서 떠도는 어머니의 혼백도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늦가을 비에 젖은 가랑잎처럼 쓸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진희의 눈에 물기가 새벽녘 물안개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래. 어쩜 진희나 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인지도 몰라…….”

태진은 진희의 과거도 자신 못지않다고 생각했다. 불에 데어본 자만이 불의 뜨거움을 아는 법. 태진은 진희가 그동안 겪었을 고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전 이번 일만 끝내면 선생님 곁을 영원히 떠날 거예요.”
“…?”

태진은 진희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한 순간에 생각한 것이 아니에요. 그게 진정으로 선생님을 위하는 길이라는 걸 알았어요.”
“진희!”
“알아요. 난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냥 저를 보내주는 것이 진정으로 저를 위하는 거란 걸 알아줬으면 해요.”
“그럼 우리가 함께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긴가?”
“그런 셈이죠.”
“…….”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진희는 진희대로, 태진은 태진대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태진의 뇌리엔 진희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시작하겠어요.”

진희는 단호하게 말하고, 나 회장에게 다가가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진희야!”

나 회장은 재갈이 풀리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신을 어떻게 죽여줄까? 마지막 선택의 재량권은 당신
에게 주지.”

진희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 예쁘게 자랐구나.”

나 회장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탄식처럼 말했다. 그 말 속에 실낱 같은 아비의 정이 묻어있었다. 아니, 그건 착각인지도 몰랐다. 태진이 듣기에는 그렇게 들렸다.

“그게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지? 당신은 내가 어딘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기를 바랐겠지?”
“…….”

나 회장은 독기가 묻어나는 진희의 말을 들으며 뚫어지게 진희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묻지. 어떻게 죽길 원하지?”

입으로는 독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진희의 눈은 젖어있었다.
그런 진희를 바라보던 나 회장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뜬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 회장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단단이 마음의 각오가 된 듯한 목소리였다.

“네 말처럼 난 너희 모녀에게 죄를 지을 만큼 지어, 이제 그 죄 값을 치러야겠지. 이만큼 살았으니 생에 대한 미련은 없다.”

그의 목소리는 촉촉히 젖어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살폿이 미소까지 어리었다. 마치 삶과 죽음에 대해 달관한 듯한 모습이었다.

“당신 원대로 해주지.”

오히려 진희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심적 갈등이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화염처럼 진희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 분명했다. 진희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태진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부녀간의 대화와 모습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비쳐졌다.
나 회장이 말했다.

“죽기 전에 한 가지만…… 난 한시도 너의 엄마나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진심이다.”
“거짓말하지 마! 이제 와서 뻔뻔스럽게!”

진희는 피를 토하듯 절규하며 나 회장의, 아니 아버지의 뺨을 주먹으로 세차게 후려갈겼다. 나 회장의 고개가 휘청 젖혀지는가 싶더니, 코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래,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니.”

나 회장은 처연한 눈빛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내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 몸서리 쳐지도록 긴 세월 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나 해?”

진희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평소 담배를 느긋하게 피우던 그녀답지 않게, 담배 불씨가 길게 타들어 가도록 필터를 급하게 빨아댔다.

“…… 솔직히 난 너나 네 엄마를 잊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잊을 수가 없었다. 너를 어려서부터 친딸처럼 돌봐준 화심사(花心寺) 일봉 주지 스님은…… 내 친형이셨다. 너에게는 큰아버지가 되는 셈이지.”
“뭐라고! 그럼, 내가 화심사에 맡겨진 건…….”

진희는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을 느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고 친아버지처럼 따랐던 스님이, 지금 눈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매달려 있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믿었던 인간의 친형이었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안 들은 것만 못했다.

“그때는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형님에게 너를 부탁할 수밖에…… 넌 그런 나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겠지만…….”
“그럼 왜 당신은 나를 호적에서 행방불명으로 처리하고 한 번도 찾지 않았지?”
“그건…… 넌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게다.”
“그건 무슨 뜻이지?”
“너의 오래비들이 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을 거다.”
“!”
“그 애들은 너를 아주 싫어했지. 나도 너나 네 엄마로 인해 그 애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그 애들에게서 겉으로나마 애비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알량한 재산 때문이었지. 나를 애비로 인정하지 않으면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너나 네 엄마는 그 애들에겐 성가신 혹에 불과했었다.”

태진은 진희가 흔들리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진희는 심적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이고 쌓인 아버지에 대한 애증 때문이리라.
나 회장은 모든 걸 체념한 듯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제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한다. 너희 모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졌고…… 언젠가는 그 죄 값을 반드시 받을 거란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

진희는 나 회장의 말에 침묵하고 있었다.

“난 형님을 통해서 늘 너의 모든 걸 알았고, 이제 와서 이런 얘기가 부질없다는 건 알지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네가 눈치채지 못하게 먼 발치에서 널 보아왔었다.”

다시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태진은 담배에 불을 붙여 나 회장의 입에 물려주고 코피도 닦아주었다. 그리고 쇠고랑에서 오른팔을 풀어주었다. 이제 나 회장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뭔가 큰 짐을 던 듯한 홀가분한 표정 같기도 했다. 태진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온기가 깃들여 있었다. 지금까지 납치했던 인간들에게서는 경험하지 못한 가슴 뭉클한 인간적인 느낌이 왔다.

“진희 애인이오?”

나 회장이 태진을 보며 물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는데, 태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가 말했다.

“잘 알겠지만 진흰 불쌍하게 자란 애요. 이제 당신처럼 든든한 남자를 만났으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오. 못난 애비의 마지막 부탁이오. 우리 진희의 눈에서 다시는 눈물이 흐르는 일이 없도록 해 주시오. 그리고…… 진희가 결혼하는 날 주려고 형님에게 맡겨 놓은 통장이 하나 있소. 지금은 화심사 새 주지 스님이 보관하고 있을 거요. 내 작은 성의로 생각하고 받아주시오.”
“그만! 그만 해!”

진희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진희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 회장의 얼굴에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어렸다. 그것은 소문으로만 듣던 사악한 인간의 모습이 아닌, 늘 가슴 한 구석에 상처처럼 간직한 딸을 연민으로 지켜보는 인자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태진은 그의 손목을 채운 쇠고랑을 풀어주고 빨리 달아나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어쩔 거야?”

태진은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진희에게 물었다. 난감했다. 나 회장을 만나러 갈 때, 진희가 주는 어릴 적 사진과 반쪽 옥 목걸이를 받으면서 이상한 느낌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 회장이 진희의 아버지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 회장이 진희의 아버지란 사실을 알았다면, 태진은 이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 제가 알아서 하겠어요.”

진희가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오해 없이 듣기를 바래. 내 생각엔…… 아버질 그냥 풀어줬으면 해.”
“…….”

진희는 말없이 태진의 얼굴을 한참 뚫어지게 보다가 입을 열었다.

“소영 씨를 집으로 초대하세요.”
“뭐라고?”

태진은 너무 뜻밖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 우린 쫓기고 있어요. 지금쯤 경찰들이 저를 찾느라 혈안이 돼 있을 거예요. 어쩜 화심사 주지 스님을 찾아가 제 거처를 확인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선생님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봐요. 사건 현장마다 놓여 있는 종이 장미를 달고 다니는 탤런트를 애인으로 둔 남자, 더구나 납치된 나 회장의 사생아인 딸과도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저라고 해도 가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경찰이 어느 순
간 이 집에 들이닥칠지 몰라요.”

“진희와 나 사이를 경찰이 어떻게 알아?”
“새 주지 스님에게 선생님 얘기를 했어요. 깊게는 아니지만, 선생님의 기가 많이 상해서 치료해주고 있다고…….”

듣고보니 맞는 말이었다. 경찰이 그 정도까지 알아냈다면, 이 집을 수색하러 오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어렵게 꼬이는구만.”
“저야 상관이 없지만, 선생님은 확실한 알리바이가 필요해요. 지금 당장 전화해서 소영 씨를 집으로 오게 하세요. 그리고 함께 밤을 보내세요. 그럼 그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요.”
“그럼 진희 아버지는 어떡하지?”
“제가 함께 있겠어요.”
“함께?”
“지하실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거실이나 방에서는 모르잖아요. 내일 소영 씨가 가면, 그때 제가 알아서 집에서 빠져나가면 될 거예요. 선생님이 이 위기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봐요. 확실한 알리바이밖에는.”
“…….”
“…… 더 확실한 방법은, 소영 씨와 오늘 밤을 함께 보내고 내일 이 집에서 결혼을 발표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아무도 선생님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 알리바이도 확실하고, 세상에 어떤 사람이 결혼 발표를 앞두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겠어요. 그건 도저히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잖아요.”
“하지만 어떻게 나 혼자 빠져나가자고…….”

태진은 진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건 진희에게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진희가 지하실에서 가슴이 찢어지는 시간에 자신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소영이와 나란히 앉아 뻔뻔스럽고 가증스럽게 기자 회견을 한다?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게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방법이에요. 전 선생님이 저 때문에 잘못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어떻게 지금까지의 일들이 진희 때문이지?”
“시작은 선생님이 했을지 모르지만, 마지막 모든 책임은 제가 지고 싶어요. 다시 말하지만, 선생님이 불행해지는 걸 보면 전 견딜 수 없을 거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태진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의 말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모든 걸 감상적으로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냉정한 이성이 필요한 때라고요. 선생님은 제가 경찰의 손에 잡혀 포승줄에 묶이고 수갑을 찬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을 보고 싶으세요?”
“그건 안 되지.”
“그럼 제 말대로 하세요. 지금 당장 소영 씨에게 전화를 하세요.”
“…….”
“어서요. 선생님이 전화를 안 하면 제가 하겠어요.”

진희는 수화기를 들었다. 정말 버튼을 누를 기세였다.

“…… 알았어. 진희 말대로 하지.”
“고마워요.”
“그건 그렇고, 정말 아버지를 어떻게 할 거야?”
“제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선생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 선생님은 이 시간부터 이 일에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
“난 소영 씨가 집에 도착하는 걸 보고 내려가겠어요.”

한 시간 뒤.

소영이 도착했다. 태진은 그녀의 차를 차고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정원 옆에 세워두었다. 소영인 차에서 커다란 트렁크를 들고 내렸다.

“뭐야?”
“옷하고 화장품요.”
“옷?”
“내일 기자 회견을 하려면 멋진 옷으로 갈아 입어야 하잖아요. 방송국에서 촬영하러 나올 텐데. 그건 그렇고, 어떻게 그렇게 멋진 생각을 했어요? 난 선생님 집에서 기자 회견을 한다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온갖 꽃이 피어있는 넓은 정원에서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하는 결혼 발표. 생각만 해도 너무 멋져요.”

소영인 들떠있었다.
태진은 그런 소영을 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는데, 후회하지 않겠어?”
“내가 좋아서 매달리는 거예요. 착각하시는가 본데, 선생님이 저를 찍은 게 아니라, 제가 선생님을 황새가 우렁이를 찍듯 콕 찍은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소영은 정말 황새가 긴 부리로 우렁이를 찍듯, 태진의 배를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 소영인 우아한 황새고 난 우렁이가 되나?”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소영인 킥킥대며 웃었다.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모습이, 태진의 심난한 마음과는 달리 티 없이 맑고 귀여웠다.
태진은 소영의 트렁크를 들고 집 안 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건너편 언덕빼기 어딘가에선 누군가가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뭘 좀 줄까?”

태진은 거실 소파에 앉은 소영이를 보며 물었다. 몸은 소영이와 있으면서도 마음은 지하실에 있는 진희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뭐가 있는데요?”
“뭐든지. 소영이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해 줄 수 있지.”
“우선 커피 한 잔 주세요. 원두 커피로요. 다음은 커피를 마시면서 생각해 볼게요.”
“오케이.”

태진은 짐짓 명랑한 표정을 지으며 원두 커피를 갈기 시작했다. 알갱이가 부서지며 고소한 커피향이 풍겨왔다. 언제 맡아도 기분 좋은 향이었다. 태진이 원두 커피를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원두가 갈리면서 풍기는 이 향 때문인지도 몰랐다.

“결혼 발표 타이밍이 아주 좋았어요. 오늘 오후에 마지막 잡혀있는 촬영까지 모두 마쳤거든요. 이제 정말 심신이 홀가분해요. 당분간은 정말 누가 뭐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래요.”
“그래, 잘 생각했어. 소영인 푹 쉬어야 해.”

커피 메이커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나며 커피가 내리기 시작했다. 진한 커피향이 실내 가득 번져갔다.

“음, 이 향…!”

소영이는 눈을 감고 코를 킁킁대며 커피향을 맡았다.

“소영이가 좋아하는 킬리만자로야.”
“고마워요.”

소영이는, 커피잔을 준비하고 있는 태진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태진은 그런 소영이의 손을 꼭 잡아주며 물었다.

“행복해?”
“네.”
“얼만큼?”
“하늘만큼, 땅만큼요.”

소영은 어린 아이가 꿈을 꾸듯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커피를 마셨다. 소영이의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난 오늘 밤을 잊지 못할 거야.”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에게 참 의미 있는 밤이 될 거예요.”

소영이 커피잔을 들고 태진 옆으로 왔다. 태진은 소영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소영은 태진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길다란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태진은 소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손에 잡힌 새처럼 부드럽고 따뜻했다.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여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에겐 참으로 과분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결혼하면 애기를 몇 명 낳을까?”

태진은 소영이의 귓불을 만지며 물었다.

“많이요.”
“많이? 한 열 명?”
“네.”
“정말?”
“능력 있는데 어때요? 전 애들을 너무 좋아하거든요. 특히 이제 막 말을 시작하는 아기들을 보면, 볼이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 그냥 지나치질 못하겠어요. 남의 집 애들도 그렇게 예쁜데, 내 아이라면 얼마나 더 귀엽고 사랑스럽겠어요. 온 집 안 가득 붕어빵처럼 선생님과 저를 닮은 아이들이 뛰어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좋겠어요.”
“난 자신 없는데.”
“상관 없어요. 선생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제가 다 키울 거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을 다 소영이 편 만들려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야 훗날 혹시 부부 싸움을 하더라
도 제가 유리하죠.”
“뭐라고?”

태진은 소영이의 양볼을 잡아 마구 흔들었다.

“아파요.”
“그럼 재밌으라고 흔드는지 알았어? 아프라고 흔든 거야.”

소영이 태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키스를 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몇 번 입술이 부딪쳤지만, 이내 두 사람은 한 덩어리가 되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혀가 뜨겁게 뒤엉켰다. 소영의 침샘에서 향기롭고 달콤한 체액이 끊임없이 솟구치고 있었다. 소영이 급하게 태진의 와이셔츠 단추를 끌렀다.
태진은 그런 소영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방으로 가.”

태진은 소영을 번쩍 안아들었다. 그리고 언덕빼기에서 집을 감시하는 경찰이 보기 쉽도록 거실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그들이 이 광경을 보고있다면, 그들도 정상적인 남자라면 아랫도리가 뻐근해질 게 분명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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