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된 약속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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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된 약속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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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손을 떼는 게 어떨까?”

태진은 아무래도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최 형사와 국가정보원 요원이 소영이를 찾아왔었다는 얘기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종이 장미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는 것은, 그들의 그물이 점점 자신과 진희를 압박해 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 마음대로 하세요.”

진희는, 자신의 말에 반대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의외로 쉽게 대답했다. 그녀도 자신처럼 이 일에 회의와 두려움을 느낀 것일까.

“난 진희가 싫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제 말은 선생님만 이 일에서 손을 떼란 얘기예요.”
“뭐야!”

태진은 진희에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전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어요. 그 일만 끝내면 저도 그만둘 거예요.”
“이 정도면 우리가 바라던 바는 달성한 게 아닐까? 그리고 더 이상은 위험해. 언제 수사팀이 이 집을 덮칠지 몰라. 수사요원들이 소영일 찾아와 종이 장미에 대해 자세하게 물었다는 거야.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게 분명해. 날 조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희까지 그들 수사망에 걸려들 거고.”
“하지만 전 여기서 멈출 순 없어요. 꼭 내 손으로 처치해야 할 놈이 있어요.”
“그게 누군데?”
“대한그룹 나석만 회장요.”
“나석만 회장?”
“네.”
“위험을 무릅쓰고 꼭 그 사람을 처치해야 할 이유가 뭐지?”
“그건 차차 알게 될 거예요.”
“차차 알게 된다고? 무슨 대답이 그래?”
“지금은 그 정도밖에 대답할 수 없어요. 미안해요.”

순간적이지만 진희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쳤다.

태진은 진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것일까. 두 사람이 이쯤에서 손을 떼면,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완전 범죄로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줄기차게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수사요원들의 예리한 눈길을 진희도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도 두 사람은 그들의 미행을 따돌리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진희에게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진희는 무심한 눈으로 태진을 보았다.
“…… 소영이와 결혼하기로 약속했어.”
“!”

진희의 눈이 크게 출렁였다. 그러나 돌맹이를 던진 호수의 파문처럼 이내 진정되었다.

“다음 주에 기자들 앞에서 발표하기로 했어. 그리고 다음 달에 식을 올릴 거야.”
“…… 축하할 일이군요.”
“결혼을 하면 우린 전처럼 함께 밤을 새울 수 없겠지?”
“그렇겠죠. 당연히 그래야 되겠지요.”
“미안해.”

태진은 진심이었다.

“알아요. 난 선생님의 마음을 알아요. 저에게 이러지 않아도 돼요.”

진희는 태진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난 잊지 못할 거야. 진희와 함께 한 밤들을.”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남을 수 있을 거야.”
“…….”
“왜 말이 없어?”
“그래요. 전 선생님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진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선 아이들이 날리는 연들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부모들 손을 잡고 한강 둔치로 봄나들이 나온 아이들이 날리는 연이었다. 맑고 높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릇하게 돋아난 봄나물처럼 싱그러웠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파란 하늘 높이 떠 있는 연에 시선을 주었다.

진희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저 혼자 할게요. 선생님은 빠지세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선생님이 아무리 말려도 전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어요.”
“난 진희가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지 알 수가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는 차차 알게 될 거예요.”
“글쎄, 그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말할 수 없어요.”
“…….”

또 긴 침묵이 흘렀다.

진희가 굳이 말하지 않는 이유를 다그쳐 물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엔 왠지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왜 진희는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나석만 회장을 납치하려는 것일까.

태진은 다시 한 번 진희의 결심을 확인이라도 하듯 물었다.

“나 회장을 꼭 납치해야겠어?”
“네. 꼭 내 손으로 처치하고 싶어요.”
“…… 알았어. 이번 일만 하고 깨끗이 손을 떼는 거야?”
“더 할 수도 없을 거예요.”

태진은 진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 할 수도 없다’는 말의 뉘앙스가 왠지 마음에 걸렸지만 그냥 지나쳤다. 진희가 한 이 말의 뜻을 태진이 알게 된 것은 며칠 후였다.

“뭐라고! 그게 언제야?”

최 형사는 전화를 받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철사처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최 형사는 불독에게 옆에 있는 수화기를 들라고 손짓했다. 불독도 덩달아 긴장된 눈빛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그래서? 나석만 회장의 행방이 묘연하다 이거지? 아직은 운전 기사와 가족들만 알고 있고? 알았어. 특히 언론에 이 사실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하고, 상황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곧바로 연락해. 그래, 알았다고.”

최 형사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디어 놈들이 또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군요.”
“이번에는 대한그룹 나석만 회장이라…… 정말 골치 아프군.”

불독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혀를 찼다.

“어젯밤부터 연락이 없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는데. 어딜 가도 집에 연락만은 잊지 않았다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이 없기는 처음이랍니다.”
“납치가 아닐까요?”
“가족들이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자고 전화통 옆에 있다가 이제야 경찰에 신고했답니다. 휴대폰도 꺼진 채 연락이 안 되고.”
“그럼 어제 나 회장과 마지막까지 있었던 운전기사를 만나보는 게 순서가 아닐까요?”
“그래야겠지요.”

나석만 회장의 운전기사가 불려온 것은 그로부터 30분 후였다.

그는 수사본부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겁에 질린 듯, 황소처럼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눈에 보아도 그는 체격만 씨름 선수처럼 컸지 순박해 보였다. 그는 나 회장의 행방불명이 마치 자신의 잘못이라도 되는듯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담배 피웁니까?”

최 형사가 그에게 의자를 권하며 담배를 내밀었다.

“아, 아닙니다. 전엔 피웠는데 회장님을 모시고부터는 몸에서 냄새가 날까 봐 끊은 지 몇 년 됐습니다.”

그는 손을 내젓기까지 하며 공손한 자세로 담배를 사양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끊임없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무실에 있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에게 압도된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웬만한 강심장의 사내라 할지라도 이런 곳에 오면 마찬가지이리라. 가슴에 권총을 차고 눈빛도 예사롭지 않은 수사요원들을 보면 기가 질릴 만도 했다.

“그럼 커피 한 잔 하겠소?”
“네. 고맙습니다.”

사내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최 형사는 우선 운전기사의 신상 명세서를 쭉 훑어보았다.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유도와 합기도, 검도의 유단자라는 점이었다. 나 회장의 운전기사로 발탁된 것도 아마 그런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디 가드를 겸할 수 있도록. 최 형사는 무엇보다 운전기사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것이 일의 순서라고 생각했다.

“나이 33세, 이름 이석찬, 고향이 대전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사내는 자판기에서 뽑아다 준 커피를 마시다 말고 황급히 대답했다.

“너무 긴장할 거 없어요. 우리는 이석찬 씨를 참고인 자격으로 불렀을 뿐이니까. 어젯밤 나 회장과 몇 시에 어디에 갔는지, 나 회장이 누구를 만났는지, 최종적으로 헤어진 곳과 시간만 말하면 돼요. 마시던 커피는 다 마시고 말해도 돼요.”

사내는 뜨거운 커피를 마치 맥주를 마시듯 꿀꺽꿀꺽 삼켰다. 운동을 한 유단자치고는 겁이 많았다.
불독이 물었다.

“나 회장과 어제 몇 시까지 함께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서초동 서초세무서 뒤쪽에 있는 일식집 ‘해궁(海宮)’에 모시고 갔는데, 그때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저녁 8시쯤이었습니다. 손님과 약속이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게 누구요?”
“여쭤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해궁 사장님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해궁 전화 번호 알아요?”
“네, 알고 있습니다.”

사내는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몇 장을 뒤적이더니 해궁 명함을 찾아냈다. 최 형사는 수사요원에게, 해궁으로 전화를 걸어 나 회장이 어제 만난 손님과 몇 시에 어디로 갔는지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계속해요.”
“어제는 여느 날과는 달리 저더러 그냥 들어가라고 하시기에, 제가 집에까지 어떻게 가실 거냐고 여쭈니까, 택시를
타고 알아서 들어가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전붑니다. 그 뒤는 전 모릅니다.”
“그럼 그곳에서 곧바로 나 회장 집으로 갔다는 얘깁니까?”
“네. 차를 가져다 놓아야 하거든요.”
해궁으로 전화를 건 수사요원이 수화기를 든 채 최 형사를 불렀다.
“뭐야?”

최 형사는 수사요원을 돌아보았다.

“어제 나 회장이 해궁에 오지 않았다는데요. 그리고 나 회장이 그곳에 올 때는 항상 예약을 하는데, 어제는 예약도 없었답니다.”
“뭐라고! 그럼 어떻게 된 거야?”

불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동시에 반말로 운전기사를 다그쳤다.

“당신, 나 회장이 해궁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했어? 해궁 사장은 나 회장이 그곳에 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거야?”
“그, 그게…….”

사내는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말해 봐!”

불독의 눈빛과 말투가 더 사나워졌다.

“회장님이 해궁 입구 주차장에서 그냥 들어가라고 하시기에 곧바로 차를 돌려 왔을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최 형사는 직감했다.

“이건 놈들의 납치가 분명합니다. 이만덕 회장 때도 지하 주차장이었습니다.”

불독은 고개를 큰 동작으로 끄덕였다.

“맞아요. 동일범의 소행이 틀림없습니다. 대담한 놈들…….”
“또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겠군요.”

최 형사가 손가락마디를 우두둑 소리가 나도록 꺾으며 말했다.

“가만…… 뭔가 이상한데요?”

갑자기 불독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뭐가요?”

최 형사도 덩달아 긴장하며 불독을 보았다.

“…… 나진희 걔가 이태진과 가까운 사이고, 나석만 회장이 그녀의 아버지이고, 종이 장미와 관련된 민소영이 이태진의 애인이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

최 형사는 벼락처럼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있었다.

“그렇군요. 그들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군요. 당장 확인해 볼 필요가 있어요. 더구나 나진희는 나 회장의 사생아이지 않습니까. 이태진의 부모도 문란한 사생활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바로 그 점입니다! 어젯밤부터의 두 사람의 행적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최 형사는 급하게 두 사람을 담당하고 있는 수사요원들의 휴대폰 전화 번호를 눌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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