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된 약속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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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된 약속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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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은 소영이와 함께 있었다.

서로 익숙해진 육체는 한바탕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나른함에 젖어 있었다. 태진은 자신의 팔을 베고 있는 소영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한 손으로 풍만하고 부드러운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상큼한 바다 냄새가 났다. 이미 코에 익숙한 향수 냄새였다. 그녀의 이마에 촉촉하게 난 땀을 손바닥으로 닦아주었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태진을 보며 물었다.

“행복해요?”
“응.”
“나도요.”

소영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눈으로 태진을 보았다. 태진은 그런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자신에겐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섹스를 모두 합하면 몇 번쯤 될까요?”

소영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갑자기 그건 왜?”
“후후후, 우리가 처음 사랑을 나눈 때 생각나요?”
“응.”

태진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설렘과 두려움이 순간순간 교차했었다. 그날 태진은 그녀의 육체뿐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받아들였다. 그에게는 운명 같은 날이었다.

“그때 나 어땠어요?”
“무슨 뜻야?”
“이렇게 둔하긴…… 가질 만했냐고요?”

그렇게 말한 소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귀여운 녀석. 소영의 매력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내숭을 떨지 않는 솔직함이 때때로 태진을 놀라게도 했지만 동시에 기쁘게도 했다.

“아주 좋았어. 지금도 그렇고.”
“그랬어요? 난 그게 궁금했어요. 난 그때 정신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엄청난 통증도 통증이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몸이 공중에 붕 뜨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은?”

태진은 짓궂은 표정으로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이그, 능글맞기는…….”

소영이 눈을 흘기며 태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태진은 탱탱한 테니스공처럼 탄력 있는 그녀의 어깨를 힘껏 안아주었다.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볼 것 없는 밀폐된 둘만의 공간. 뜨거운 피를 가진 암컷과 수컷이 부둥켜안고 있는 공간. 불태워도 불태워도 완전 연소되지 않는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둘 사이에는 깊은 사랑의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또 한 번의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태진이 깊은 잠에 빠졌다가 눈을 뜬 것은 저녁이었다. 심한 갈증에 냉장고의 보리차 물병을 들고 꿀꺽꿀꺽 물을 삼켰다. 창 밖엔 땅거미가 슬슬 내리고 있었다.
소영이는 이불을 걷어차고 약간 입을 벌린 채 잠들어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방심한 자세로 커다란 엉덩이를 드러낸 채 잠들어 있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넌 내 거야.’

그랬다.
이제 소영이는 완전한 자신의 여자였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는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태진은 소영이 걷어찬 이불을 덮어주고, 담배를 물고 창가에 섰다. 땅거미가 지던 창밖에, 어느 새 어둠이 물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까만 어둠이 몰려오는 도심의 한 구석에서 불빛들이 부시시 하나둘 눈을 뜨며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왜일까?

도심의 불빛들을 바라보다 문득 센티한 감정에 젖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무 행복해서일까?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온하고 여유로운 감정이었다. 이런 감정은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까마득히 잊은 줄로만 알았는데, 가슴 속 깊은 곳 어디에 꼭꼭 숨어있다가 이렇게 한 순간에 불거져 나오는 것일까. 태진은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이 행복한 순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불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생각이 자꾸만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불쑥,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과 아버지의 바람기와 어머니가 새파랗게 젊은 사내와 놀아나던 모습들이 빠르게 돌아가는 비디오 화면처럼 뇌리를 스쳤다. 태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꿈에서조차 두 번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생에서 까맣게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들이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느 한 순간 숨이 멈추면 그뿐인, 그렇게 허무한 한 세상을 무엇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랑하며 복잡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때가 되면, 제아무리 가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대도 결국은 처음 왔던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하거늘, 잠시 머무는 티끌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찾겠다고, 얼마나 대단한 무엇을 이루겠다고 그렇게 발을 동동거리며, 기를 쓰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일까.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잠시만 뒤돌아보면 모두가 허망하기 그지없는 부질없는 인간사인 것을.

태진은 탁자 위에 놓인 메모장에 무심코 썼다.

<피었으므로 진다!>

그렇다.
산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도, 미워한다는 것도 부질없는 짓인지 모른다. 이 세상에 완벽한 인간이 있을까. 모두가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그 키에 맞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래, 어쩌면 누구나 부족한, 미완성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태진은 메모지 위에 생각나는대로 또 썼다.

<인생의 절반은 뒤에 숨어있는 법!>

눈물이 핑 돌았다.
태진은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한 회한이 가슴 멍멍하도록 밀려왔다. 이대로 어디론가 끝없이, 미친 듯이 달아나고 싶었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숨이 턱에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조차도 없을 때까지.

“빨리 결혼 날짜 잡아요.”

소영이 커피잔을 들고 말했다.

“하지만…….”

태진은 소영의 적극적인 태도에 당황했다.

“알아요. 선생님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망설이는지 안다고요.”
“…….”

태진을 바라보는 소영의 눈빛은 간절했다.

“전 선생님과 함께라면 인기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아요. 인기란 한낱 물거품 같은 거란 걸 안다고요.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겠지요. 인기의 최정상에 서 보기도 했으니까 이젠 미련 따위는 없어요.”
“…….”

태진은 계속해서 침묵했다.

소영이는 커피잔을 탁자에 놓고 태진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태진의 바로 코앞에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싫지 않은,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영이의 눈이 자신의 눈을 보고 있었다.

“뭘 두려워하세요? 남자답지 못하게. 결혼은 제가 원하는 거라고요.”
“…….”

태진은 소영이의 눈을 뚫어지게 보았다.

“선생님이 계속해서 미루면, 내가 일방적으로 발표해 버릴 거예요. 그건 최후의 방법이긴 하지만…… 나도 그런 방법은 싫다고요. 기자들 앞에 손을 잡고 앉아서 자랑스럽게 우리의 사랑을 밝히고 싶다고요.”
“하지만…….”
“뭐가 자꾸만 하지만이에요?”
“자신 있어?”
“뭐가요?”
“나와 결혼하면 행복할 자신이 있냐고?”

태진은 그렇게 말해 놓고 '‘참 바보 같은 말을 했구나’라고 생각했다.

“후후후, 선생님은 아직도 이 민소영을 모르세요? 전 보기보다, 어쩌면 선생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악한 여자예요. 제가 손해보는 짓은 하지 않는 여자라고요. 제가 목표로 정한 것을 위해서는, 그것을 이룰 때까지는 목숨까지라도 걸고 베팅할 줄 아는 여자라고요. 다시 말하면, 선생님은 충분히 제가 베팅할 만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란 뜻이죠, 아시겠어요? 선생님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다는 얘기예요. 선생님이 오랫동안 저를 지켜봐 온 것처럼, 저도 선생님을 만나면서 나름대로 느낌이 와 닿았단 말이에요. ‘아, 이 사람이야말로 내 남자구나’라는 느낌이.”

태진은 소영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맞다면 틀림없이 맞을 것이다. 소영이의 말처럼 그녀는 영악한 면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때로는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멧돼지처럼 밀어붙이는 저돌성까지 있었다. 그게 그녀의 성격이었다. 어쩜 그런 추진력이 있기에 험한 연예계에서 특별히 밀어주는 후원자 한 명 없이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 최정상의 위치까지 올라갔는지도 몰랐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연예계에서 특별히 시끄러운 스캔들 없이 버틴 것도 그녀가 그만큼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왔다는 증거였다.

“난 두려워.”

태진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녀와의 결혼은 자신에겐 너무 벅찬 일이었다.

“두려워할 거 없어요. 선생님은 저에게, 아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꿀릴 것이 전혀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잖아요. 우리 사이에 그 외에 뭐가 더 필요해요? 저는 지금껏 선생님 외에 다른 남자를 제 가슴에 담아본 적이 없어요. 믿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진심이에요.”

태진은 소영이의 말을 들으며,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콧날이 시큰했다. 태진은 벅찬 가슴으로 소영의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와락 끌어안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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