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1보]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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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1보]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선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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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만 행사하고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다.

^^^▲ 조선대학교 정문 일원에서 일인시위 중인 박광채 교수
ⓒ 뉴스타운 특별취재팀^^^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Chosun University)에 다시금 분규가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 5월9일부터 조선대학교 정문 일원에 교수 한명이 일인시위에 나섰다. 바로 조선대학교 14-15대 교수협의회 의장을 역임했던 박광채(공학박사, 전자공학과)교수였다.

광주시내에 들어서면 무등산 자락에 20개의 삼각형 지붕이 늘어서 있는 듯한 특이한 양식의 조선대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이 대학을 볼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대학의 총장 또는 이사장, 아니면 설립자라는 이름으로 회자되던 박철웅씨를 연상한다.

도대체 조선대학교에 어떤 일과 문제가 있기에 현직 교수가 일인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지 집중취재에 나서 시리즈로 기획취재기사를 작성하기로 한다. <편집자 주>

조선대학교에 어떤 일이 있기에 교수가 일인시위 나섰나?

조선대학교가 1988년 이래 위기에 처했다. 조선대학교는 호남의 명문 사립대학이다. 또 해방이후 관과 민이 ‘인재양성’이라는 거룩한 뜻을 품고 7만여 호남지역민들이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대학이다.

이러함에도 설립을 주도한 박철웅씨의 40여년에 걸친 개인 사유화 등의 족벌운영과 전단횡포가 끝이 나자 민주총장 선출 등으로 건전한 사학의 길을 가는가 싶더니 다시 조선대학교가 극심한 분규 속에 빠진 것이다.

취재에서 만난 대부분의 취재원들이 지적했듯이 이른바 주인이 없는 대학이다 보니 권한만 행사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풍토가 없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일인시위현장에서 만난 박광채 교수는 일인시위에 나선 배경을 묻자 “최근에 신축한 중앙도서관 공사에서 중국산 석재를 사용 시공함으로서 산화현상이 나타나 돌에 붉은 얼룩이 지고 돌 색갈이 현저한 차이가 나는 등 대체, 시공 상 많은 문제가 도출됐음에도 책임규명이 되지 않고 수수방관한다면 조선대학교 역사에 커다란 오점을 남겨 대학발전에 영원한 걸림돌이 될 것이다는 신념에 최후의 수단으로 몸을 던져 일인시위에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14(2000년 8월부터),15(2001년 8월부터)대 교수협의회 의장직을 지냈고 현재 전자공학과 교수이다.

박 교수 등과 총동창회 임원 등은 중앙도서관 중국산석재 대체 시공한 사건 외에 교비회계에서 100% 선 지급된 부속병원 임상교수 인건비 중 50%를 부속병원회계에서 교비회계로 전입해야함에도 15억원을 법인회계로 전입한 교비전용사건 등을 법적으로 문제 제기 헌법소원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사자 적격이 아니라는 이유 등으로 각하를 당했고 이를 학교법인에 당사자로서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묵묵부답이라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권리는 행사하되 결과에 책임지는 풍토를 확립 재발을 방지하여 학교가 건전하게 발전하기를 희망 일인시위에 나섰음을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과정에서 박 교수는 명예훼손혐의 등으로 고소당했고, 직위해제 논의를 5번 이상 당했음을 밝혔다.

이 외 취재 중 만난 모 동문은 전 11대 총장을 지냈던 열린우리당 양형일(광주 동구, 17대)의원의 학위명칭 왜곡 사건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이른바 정치학박사로 학위를 받은 양 의원이 정치학박사(행정학 전공)로 표기함이 정당함에도 졸업장 등 공식문서에 행정학박사로 기재한 잘못을 지적했다.

이는 대외적으로 공인이라 할 수 있는 대학총장으로서 도덕성에 문제 있다는 거였다.

다른 모씨는 양 의원이 총장 재직 당시 무려 1.350여억원에 달하는 공사를 집행했다며 “중앙도서관 신축 시 저질로 값싼 중국산 석재를 사용 하는 등 공사에 검은 돈이 개입됐을 여지가 크다“며 ”양 총장 재직 시 집행한 공사에 의혹이 있을 수 있다“며 다른 의혹을 말해 조선대학교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내비쳤다.

^^^▲ 조선대학교에 본관 로비에 학교 발전기금을 낸 명단이 게시돼 있다.
ⓒ 뉴스타운 특별취재팀^^^

조선대학교는 어떤 대학인가?

광주광역시 동구 서석동에 소재하는 조선대학교(朝鮮大學校, Chosun University)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民立)대학으로 우선 소개된다. 즉 1946년 9월 호남지역 및 전국 각지에서 모인 7만 2000여 명으로 이루어진 조선대학교 설립동지회에서 설립하였다.

설립 당시에는 4개 학부, 12개 학과였으며, 1948년 재단법인 조선대학을 설립하여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돼 자금은 가히 호남권에서 제일로 자랑하는 사학의 명문이라 할 수 있다.

또 조선대학교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철웅(1,4,7대 총장 역임)씨다 박철웅 씨는 인재양성에 뜻을 품은 당시 서민호 전남지사 등 광주시청과 전남지사에 근무하는 대학출신인사들과 지역유지들과 함께 조선대 설립을 주도한 인물이다.

관과 민이 한마음이 되어서 이렇게 대학 설립에 열성적으로 참여한 것은 우리나라의 대학설립사에서 특수한 예에 속하며 진정한 민립 대학이 수립됐다는 가치가 있다.

그런데 그 후 이 대학의 이처럼 자랑스러운 의미는 점차 퇴색되기 시작했다.

민립대학으로서의 과정을 거쳐 조선대는 대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체제를 정비하면서 종합대학으로 육성되었으나 6·25 전쟁의 발발로 인한 설립동지회 해체와 당시 학장이던 박씨의 정계 진출과 장기 외유, 60년대 4·19와 5·16으로 이어지는 정치 혼란기를 거치면서 시련과 침체를 거듭했다.

이 당시 박씨와 박씨 일가는 독단 경영과 부정 및 경제적 손실 등의 이유로 교수와 학생들에게 불신임을 받고 극심한 데모와 법정 소송, 맹휴 등으로 인해 학교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1963년 다시 총장으로 등극해 이전보다 확고한 경영권을 행사하며 개인 사유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대는 박씨 개인이 세운 대학처럼 비춰지기 시작했으며, 박씨 일가가 장기간에 걸쳐 학교 운영을 좌우하면서 점차 사유화 되어갔다.

특히 1980년 8월 이른바 광주사태를 수사하던 합동참모본부에 의해 비리 혐의로 다시 총장직을 물러난 박씨가 1986년 12월에 재복귀하기까지 거의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는 이사장직에 있으면서 명예총장이란 직함을 새로 만들어 사용하는 한편 설립자라는 명칭을 강조하다 못해 우상화하기에 이르렀다. 호를 '자양(慈陽)'이라 지어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했고 학교 공문서에 자신의 업적을 선전했다. 이전의 총장실은 설립자실이 되었고 새 총장실은 부속실을 개조하여 사용해야 했다.

박씨는 81년 10월 8일 학원수호 결의대회를 열어 전교직원에게 공개적으로 '우리는 설립자님의 조국에 바친 한없는 충성을 본받아 국가와 학원의 안위를 위하여 진력할 것을 다짐한다'는 등의 결의를 공개적으로 하게 했다.

또 스승의 날이면 본교 출신 교수를 대표로 삼아 자신에게 사은사(師恩辭)를 올리게 했다.

1980∼82년에 걸쳐 조선대에서는 43명의 교수가 재임용탈락, 파면, 사표 강요 등의 이유로 학교를 떠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실한 연구와 강의 때문이라고 했지만 주된 이유는 박씨에 대한 반대파 교수로 낙인찍힌 교수가 대부분이었다는 것.

이 과정에서 11대 총장을 지낸 양 의원도 당시 1981년 3월경 법학과 전임강사직을 의원 사직했다. 그리고 8년여에 걸친 미국 유학생활을 거쳐 정치학박사를 취득하고 1989년 3월경에 조선대 행정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이 과정도 집중 취재해 볼만한 부분이다.

어쨌든 박씨가 조선대에서 전권을 휘두르게 된 것은 오랜 기간 그가 대학 최고의 권력 자리에 있으면서 정보 정치를 폈으며, 집안의 친인척을 요직에 등용하고 이른바 친위세력을 운영하는 등 족벌 사학의 전형을 세워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박모가 40여년간 족벌 사학을 유지해 온 또 다른 배경은 그가 학계와 재계에 있어 호남 최대의 막강한 힘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박씨가 소유한 재산은 14개의 단과대학과 2개 전문대학, 2개 남녀 고교와 2개 남녀중학교 및 조선대 학원 재단과 고려시맨트(주) 등 내로라하는 10여개 이상의 기업과 부동산을 소유한 명실상부한 오너였다.

이 같은 사정은 박씨가 총장으로 다시 복귀하면서 한층 정도를 더해갔다. 그리고 1987년 8월 5일 박 총장과 비서가 공식성상에서 강치중 조선대병원장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확대되어갔다.

사건의 발단은 학원 소요의 와중에서 9월 개학을 앞둔 박 총장이 조기 면학분위기를 정착시키겠다고 방학 중에 전 학과에 걸쳐 시험을 강행한데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시험거부에 들어간 것은 물론이다. 특히 의과대학의 경우 응시율이 저조해 총장의 심기가 좋지 않았다.

당시 조선대민주총학생회건설 준비위원회 위원장인 백영권 군이 의대생이었다는 이유도 박씨가 강 원장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된 이유였다는 것.

돌연 소집된 교무회의는 이 같은 상황을 추궁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박 총장은 돌연 강원장의 따귀를 때렸고 동행한 비서도 구타에 가세했다. 강 원장은 즉시 사의를 표하고 회의장을 물러났지만 이 같은 엄청난 일이 그대로 묻혀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곧 수련의와 전문의들의 반발에 이어 사표 제출로 이어졌으며 박 총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간부들이 1백13일이라는 대학 초유의 장기농성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박 총장을 중심으로 한 재단과 학생, 교수들의 힘겨루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급기야는 몇몇 교수들의 양심선언이 이루어진 끝에 국회 및 교육부의 진상조사와 감사가 진행되면서 박씨 일가는 공식적으로 학교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됐다.

새로운 전기를 맞은 조선대는 해직 교수 복직과 민주 총장(이돈명 변호사 8대 총장)선출 등을 계기로 1988년초까지 전개된 대학개혁운동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 그 후 9대 정병휴 총장 10대 김기상 총장 체제에 이어 11대 양형일 총장(1999년11월10일부터 2003년 11월9일)체제가 되면서 조선대학교는 다시금 옛 악령이 살아난 듯 내분에 쌓여 있다.

지금은 12대 총장으로 2003년 11월10일 취임한 김주훈 총장 체제다.

조선대학교를 설립할 당시 주도적인 위치에서 실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박철웅씨였지만 그는 40여년에 걸친 장기 집권 속에 학교를 사유화하고 급기야는 개인 우상화의 길까지 접어들면서 파멸을 자초했으며, 결국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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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2005-05-16 17:30:36
교육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것은 상식 중의상식인데..
총체적으로 불치병에걸린 우리나라 입니다.

교수가 연구에 매달려도 힘들판인데..
저런모습,,우리나라 지역 토호세력의 뭉칫돈이 이런 비리를 방치하는 약으로 작용되고 있으니.. 부정축재자 단속 특별기구를 만들어 싹쓸이 해야합니다.

광주시민 2005-05-16 17:42:16
자랑스런 조선대학교의 명예에 손상되는 사건이 있다면 반드시 시민의 힘으로 조사되고 바로잡아 광주 전남인의 명예를 지켜 냅시다.

진실 2005-05-17 22:27:03
오래전부터 있었던 내용이라고 알고있습니다.
헌데 아직도 진행형이군요 뭐가 문제인지 한쪽은 문제가 있다고 끈임없이 제의를 하고 한쪽은 아무런 문제가 될께 없다고 하고 참 답답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분명 문제가 있음에 틀림이 없는데 왜 여지껏 해결이 안되고 저렇게 교수님까지 나서서 시위를 하는건지 이해할수가 없네요.

혹 무슨 강고한 ? 뭐가 있나요? 밝혀주세요 꼭이요....

안사람 2005-06-21 10:23:31
조선대학교 정문에서 유인물을 가져와 보니 값싼 중국석으로 공사하고 국산보다 더비싸게 준 차액을 돌려달라고 하였지만 시공회사에게 재판에서도 져버렸다네요
시공회사가 부정한 시공하고도 오히려 큰소리이니 우짠 일이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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