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의 성적 향상을 위한 선행학습은 마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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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의 성적 향상을 위한 선행학습은 마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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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학습의 악순환


"우리 반에는 나보다 공부 못하는 친구가 더 많아요."

작은 녀석이 시험지를 내밀 때마다 늘상 먼저 하는 소리였다. 한두 문제라도 틀리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시험지를 슬그머니 내밀던 큰 녀석과는 달리 이 녀석은 초등학교 내내 그랬다.

그러면서 누구는 몇 개를 틀렸고 또 누구도 몇 점을 받았는데 나는 그보다 더 점수가 높다고 변명 같은 자랑을 늘어놓는다.

작은 녀석은 힘겹기는 하지만 그래도 반에서 5,6명 정도의 상위권 무리에는 속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내외도 공부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컴퓨터 학원에나 보내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등산이야 낚시야 하는 놀이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러던 녀석의 초등학교 5학년 초여름 때였다. 느닷없이 녀석도 속셈학원에 가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속셈학원에 다니는 공부 잘 하는 친구들 이름을 죽 들먹였다.

부모에게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저는 제 나름대로 성적 때문에 속이 상해 있었나 보다. 컴퓨터 학원은 그대로 다니겠다고 하기에 학교 앞에 있는 속셈학원에 등록을 시켜 주었다.

우리 내외는 녀석을 속셈학원에 등록을 시켜 놓고는 공부하는 모습을 아니, 정확히 말해서 학원의 공부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를 지도하는 학습교재를 살펴보고는 깜짝 놀랐다. 이건 선생님들이 학교 수업에 가르쳐야 할 교사용 지도서였다. 그리고 학습 진도도 학교보다는 일주일 정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학교와 학원의 주객이 바뀐 것이었다. 아내와 나는 문제가 많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좀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속셈학원 학습 후 한 달이 좀 지나 치른 시험에서 녀석은 성적이 쑥 올랐다. 아마 최상위권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후 녀석이 싫증을 내는 틈을 타서 슬그머니 학원을 그만 두게 하였다.

15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속셈학원에서는 선행학습을 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일부 어린이들이 이런 학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학원에서 배운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당장의 성적은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과외공부에 의존하는 학습 태도가 형성되어 갔을 것이다.

1980년대 전후 무렵, 평준화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에서 한해 수십 명의 서울대생을 배출하고 있던 때, 당시 대입진학 담당을 하고 있던 우리들끼리 주고받던 말 중의 하나는 '00초등학교 출신은 서울대 못 간다'는 것이었다.

00초등학교는 당시 학부모들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과외학습 열풍이 엄청났던 곳이다. 이 학교 출신 중에는 집에서는 밤늦도록 과외공부하고 학교에서는 쏟아지는 잠을 추스르지 못하거나, 또는 혼자의 학습 능력이 결여된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던 우수한 능력까지도 평범하게 만들어버린 학생들을 지금도 더러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식의 무모한 학원 과외를 받지 않는 학생이 거의 없는 형편이다. 이런 학생들은 정작 나의 수업 중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거니와 몇 자 되지 않는 필기도 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학원에서 더 상세히 배워두었으니까 안 들어도 문제가 안 되는 것이다. 시험 기간이 되면 학생들이 학원에서 받아온 프린트물을 펼쳐놓고 공부를 하는 것을 더러 보게 된다.

기가 막히는 것은 시험 출제자인 나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내용들, 마치 80년대 학력고사 시절의 참고서 같은 내용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인 이해만 해 놓아도 별 문제가 없는 국어나 문학 과목에 웬 단원별 프린트물인가. 그리고 충분히 자력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이런 교과목에 왜 학원 과외-그것이 선행학습이든 보충학습이든-가 필요한가.

국어선생을 30년 이상 한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다. 국어과목이 이 정도라면 다른 교과야 더 말해서 무엇 하랴.

부모들은 과외수업이 학생들의 학습 시간을 절약해 준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선행학습도 학교 수업의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전적으로 틀린 생각은 아니겠지만 매우 위험한 학습이다.

혹자는 그 이유로 정작 학교 수업에서의 흥미도 저하를 들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 학부모나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이유는 사치스런 교육이론에 불과하다.

내가 위험하다고 하는 이유는 자칫 해악이 된다는 점이다. 단순 암기 과목이나 수학, 영어 같이 배경지식이 중요한 교과의 경우에는 분명히 큰 도움이 된다. 공부에 있어 [예습과 복습]은 누구나 인정하는 고전적 학습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단순 암기 지식을 평가하는 시대도 아니거니와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예습과 복습까지도 지나치게 타인에게 의존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학생의 학습량을 [강의학습]과 [자력학습]으로 구분할 때 자력학습량이 최소한 1/4 이상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각 학교나 독서실 등에서의 자율학습은 꽤 좋은 방법이다. 그래야만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사고력 측정]의 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

허구한 날 남이 하는 강의만 들어서는 이 시대의 입시에 적응할 수 없다. 어릴 때부터 학원에 들락거리다 보니까 고등학생이 되었어도 수업 자세가 능동적이지 못하고 강의를 무슨 [구경거리] 정도로 인식하게 된다.

시험은 누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다. 고립무원의 절해고도에서 오직 혼자의 힘만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단순 지식을 암기하는 학력고사의 시대가 아니다. 그리고 수학이나 영어에서 부족함을 느끼면 선행학습을 할 것이 아니라 보충학습을 해야 한다.

선행학습은 유행이나 욕심만으로 접근할 방법은 아니다. 이것은 자녀가 현재의 학교 진도를 능가하는 여유가 확실히 보일 때, 그것도 배경 지식이 중요한 한두 과목에 국한하여 신중하게 선택해 볼 문제이다.

선행학습부터 먼저 길들여진 자녀는 학습문제를 독자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독자적 해결 능력을 상실한 아이에게는 또다시 보충과외학습을 시켜야 한다. 과외를 받지 않으면 부모도 아이도 불안해진다. 그것은 악순환이다.

결국 무분별한 선행학습은 자녀에게 마약을 먹이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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