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떨이는 신성한 그릇이어라’
스크롤 이동 상태바
‘재떨이는 신성한 그릇이어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소영의 독서이야기] 정현종의 <날아라 버스야>

^^^▲ <날아라 버스야>의 표지
ⓒ 백년글사랑^^^
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는데 이 책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 손에 넣은 책이다. 언제나 읽고 싶은 책은 비싼 것 같아 주저했지만 두 차례에 걸쳐 빌려 읽으면서 이 책만은 구입해야 할 것 같다.

새로운 발견, 시적 인식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토대를 만들 수 있는 책, <날아라 버스야>에 대한 광고를 접해 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낯설다 싶었지만 저자(시인 정현종)를 보고 냉큼 잡아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시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같이 시인이 너무 많은 시절엔 나 같은 시 문외한도 진짜 시인은 눈에 들어오는 법. 특히 이 산문집은 그의 오랜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 가치가 높다. 70년대부터 근래의 글까지 총망라돼 있는 것.

만화적인 제목 '날아라 버스야'

자연과 예술에서 얻는 내재적 미적 체험. 이 책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그의 체험에는 일단의 산문들이 보이는 군더더기가 없다. 서점에 수없이 싸여 있는 비소설들이 갖는 '날림'의 미학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사색적인 내용과는 달리 제목은 만화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다. <날아라 버스야>는 저자 자신이 쓴 시의 제목에서 비롯됐다. 버스 안에 두 사람이 꽃다발을 들고 있는데 그 꽃들이 버스 안을 환하게 밝혀 '이곳이 낙원이구나' 싶은 마음이 동하여 쓰게 된 시란다.

그는 이 책에서 시인의 눈으로 사물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말해준다. 그의 이런 들려줌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 주는 어머니의 손길과도 같았다. 첫 장부터 범상치 않은 그의 글은 행간을 따라가며 쐐기를 박듯 몰두하고 있는 내 눈길을 의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재떨이, 내게는 영화 <넘버3>의 그 우스꽝스러운 박상면의 별명부터 떠오르는 물건인데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재와 꽁초는 마치 허물어진 파르테논 신전의 폐허에 서 있는 돌기둥들 처럼 인간의 야심과 의지와 상상력의 폐허이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즉 담배가 불타 재가 되는 동안, 사람들의 불안, 초조, 망설임. 욕망, 좌절, 우울, 흥분, 분노... 공격성 등의 복합으로 이루어진 심리 상태도 불타 조금씩 재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를 불태워 재로 만들다가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몸이 불타 땅에 묻힐 것이다."

그의 재떨이에 대한 살핌은 모든 사물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를 드러낸다. 그 섬세한 관찰의 중심에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시인의 감수성이 가슴에 심어져 그의 온 몸에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정현종의 재떨이에 대한 애착과 견줄 만한 그런 사물이 내게도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두루마리 휴지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혹은 엉뚱함으로 비춰질까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나의 이야기이다.

나는 휴지, 그 하얗게 돌돌 말려 있는 두루마리 둥근 원기둥을 만지는 걸 좋아한다. 제 몸이 점점 살이 빠져나가고 마침내 심지만 남게 되는 휴지. 그 흰색과 감촉이 누군가에 의해 더렵혀지고 마침내 가장 더럽다고 하는 휴지통에 던져진다.

정현종이 재떨이에서 대지의 이미지를 획득하듯 나 또한 두루마리 휴지에서 희생을 감내하는 어머니의 인생을 배운다. 그건 어머니라는 위치가 되어보니 더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감정이다.

정현종의 재떨이

'시인을 통해 사물은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바로 이 책을 두고 한 말이지 싶다. 그의 사물에 대한 성찰은 대단히 깊고 우주만큼이나 넓다. 음식에 대하여, 몸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그는 문학적인 서정과 철학적 통찰력으로 이리저리 생각의 공간을 띄운다.

"내가 불일 때 나는 사랑을 하거나 창조적 황홀 속에 있고, 내가 잠을 자거나 휴식할 때 나는 흙이며, 내가 물일 때 나는 멜랑콜리하고, 내 영혼의 표고(標高)가 높고 정신의 움직임이 깃처럼 가벼울 때 나는 공기인 것이다." -<몸에 대하여> 일부
우리는 나무를 보면서 '상승'이 라고 하는 움직임을 보며, 상승의 이미지와 관념을 갖는다. 그리고 다 자란 나무가, 키가 큰 나무일수록 더 그렇지만 계속 상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나무에 의해서 만들어진 상승 이미지 때문이다. 즉 우리의 꿈- 상상력 때문이다. 우리의 꿈-상상 속에서는 나무는 하늘을 향해서 한없이 자라고 있다. 즉 상승을 멈추는 법이 없다. -<나무 예찬> 일부

우리의 삶은 있는 것과 있어야 하는 것 사이의 긴장입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있어야 하는 것은 있는 것으로부터 나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을 낳기 시작합니다. -<시란 무엇인가> 일부

나이가 들면서 삶의 본질적 구조는 대립과 갈등의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어린아이는 시인이었지만 살아가면서 여러 갈등의 경험을 거쳐 아주 자연스럽게 어른 세계의 틀 속에 자리잡는다.

역사와 사회, 그 속에서 만나 성장한 우리들의 고정된 인식은 수많은 대립과 갈등의 반목으로 거세되고 억압되어 상식이라는 지식체계의 습득만이 제대로 된 사람의 삶이 되는 것이다. 아이 같은 어른은 유치한 철부지로 판명되는 것이 실상이다. 이 속에서 시인은 이른바 '다른 종자' 취급을 받아왔다.

하지만 정현종은 '시인은 기본적으로 철학자여야 함'을 가르쳐 주었다. '시인은 사물을 살려 내고 살려내는 건 아름다운 일이고 아름다움은 또다시 사물과 우리를 살려낸다.'

예술인의 지표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를 제공한 소중한 책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