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가 익어가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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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가 익어가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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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억속의 그 이름> 비음산의 가을

 
   
  ^^^▲ 파아란 가을하늘에 떠있는 두 조각 구름
ⓒ 이종찬^^^
 
 

"빛나야! 날씨가 너무 맑아. 오랜만에 지난 번에 갔었던 그 계곡에 가볼까? 탱자도 익어가고 있을 텐데."
"크크크, 소영이가 익어가고 있다고?"
"짜아식, 소영이만 익어가고 있는 게 아니라 아마 별똥(보리수 열매)도 빨갛게 익어가고 있을 걸."

태풍 '매미'가 남부 지방을 할퀴고 간 그 자리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 하늘은 마치 파랑 물감을 엎질러 놓은 듯 짙푸르기만 하다. 비음산 저 편에선 티 한점 없는 하늘을 비웃기라도 하듯 뭉게구름이 서넛 조각배처럼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

오랜만이다, 정말. 올해 들어 이렇게 맑은 하늘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래. 태풍 '매미'는 남녘의 바닷가와 들판, 도시뿐만 아니라 우리집 목욕탕 창문까지 모두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그렇게 떠나갔다.

"빛나야! 생각난 김에 탱자(소영)한테 전화해 봐? 지금 탱자가 익어가고 있으니까 얼른 오라고."
"크크크, 그렇찮아도 전화하고 있는 중이야."
"푸름이는 어떡할래?"
"나는 그냥 집에 있을래."

 

 
   
  ^^^▲ 태풍 피해에도 불구하고 잘 익어가고 있는 벼
ⓒ 이종찬 ^^^
 
 

오랜만에 빛나의 손을 잡고 나선 산보길…. 비음산 다랑이논과 밭 곳곳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뿌리채 뽑혀 넘어져 있거나 반쯤 기운 채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허리를 뒤틀고 있다. 다랑이논 여기저기에서는 벼들이 부지런한 농민들의 땀방울을 먹고 하수아비처럼 짚풀에 묶인 채 이삭을 누렇게 떨어뜨리고 있다.

"아빠! 작년에 먹었던 그 별똥이 먹고 싶다."
"별똥이 익으려면 아직 한달 쯤 더 기다려야 돼."
"그럼 탱자는 다 익었어?"

"탱자도 노랗게 익으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할 걸. 근데 탱자는 또 왜?"
"한번 먹어보게."
"엄청나게 쓴데?"
"작년 이맘 때 아빠가 그랬잖아. 아빠 어릴 때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많았고, 가을이 오면 탱자를 엄청나게 많이 따먹었다고."

 

 
   
  ^^^▲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탱자
ⓒ 이종찬^^^
 
 

그래. 비음산 발바닥에 다닥다닥 붙은 과수원 근처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빙 둘러쳐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탱자나무 울타리는 이른 봄에 반듯하게 삭발을 시킨 탓에 탱자가 거의 달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음산 입구에 있는 탱자나무 울타리는 탱자나무가 웃자란 탓인지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올 봄, 빛나와 비음산에 오를 때 하얀 탱자꽃이 예쁘게 피어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빛나를 데리고 그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탱자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그 탱자들은 아직은 풋감처럼 푸르댕댕한 색깔을 더 많이 띠고 있었다. 뾰쪽한 가시 사이 사이에 주렁주렁 매달린 탱자... 갑자기 어릴 때 기억이 뭉개구름처럼 보송보송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로 난 길
ⓒ 이종찬^^^
 
 

"아나?"
"그기 뭐꼬?"
"탱자다."
"이거로 우째 묵노?"
"그거 많이 묵으모 얼굴이 양귀비처럼 이뻐진다 카더라. 그라고 술로 담가 묵으모 몸에 억수로 좋다 카더라."

그랬다. 내 어릴 때 마을 어르신들께서는 탱자가 위장병과 변비에는 그만이라며, 우리들이 인상을 찌푸려가며 탱자를 몇 개씩 까먹어도 그냥 웃고만 있었다. 또한 까닭없이 헛배가 부르거나 두드러기가 난 아이들에게는 끼니 때마다 탱자술을 한 잔씩 마시게 하기도 했다.

"아빠! 아빠 어릴 때 보았던 탱자나무 울타리도 지금처럼 생겼었어?"
"그래. 하지만 지금 보는 저 탱자나무 울타리처럼 머리를 반듯하게 빡빡 깎지는 않았었지."
"어~ 근데 저게 뭐야?"
"가만. 저건 칡넝쿨 아냐? 칡도 재배를 하나?"
"아빠! 저기 좀 보아. 무슨 열매가 달려 있어."
"어디? 키위 아냐? 음~ 칡 녕쿨 같은 이게 키위넝쿨이었구나."

 

 
   
  ^^^▲ 탱자나무 울타리 안에는 키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 이종찬^^^
 
 

비음산 아래 길게 늘어선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는 키위 넝쿨이 마구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넝쿨 아래에는 보아란 듯이 다래 같이 생긴 키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작은딸 빛나는 그렇게 매달린 키위가 신기하다는 듯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자 이내 찬란한 가을 햇살이 따갑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빛나는 연방 햇살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내게 햇살을 가려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내 자그마한 그림자 하나로 어찌 저리도 찬란하게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가릴 수 있으랴.

"아빠! 햇살에 보라색으로 빛나는 이 풀은 무슨 풀이야?"
"그래. 빛나처럼 빛나는 이 풀은 수크령이야. 아빠 어릴 땐 이 풀을 뽑아 보릿대 모자에 꽂기도 하고, 허리띠 사이에 촘촘하게 끼우기도 했지.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아빠! 나도 그렇게 해 볼래."

 

 
   
  ^^^▲ 저녁햇살에 보랏빛을 띠고 있는 수크령
ⓒ 이종찬^^^
 
 

그랬다. 비음산 아래 다랑이 논둑에는 온통 수크령이 가을 햇살에 보라색 빛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작은딸 빛나와 나는 손으로 햇살 가리개를 한 채 마치 꿈길을 걷듯 수크령 사이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수크령을 몇 개 꺾어 빛나의 머리에 꽂아주려다 그만 두었다.

햇살이 연보랏빛으로 쏟아지는 그 수크령 위에는 내 어릴 때 자주 보았던 빨간 고추잠자리가 한 마리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추잠자리. 그래,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고추잠자리였다. 내가 손을 살며시 갖다대자 이내 고추잠자리는 따가운 가을 햇살을 하얗게 떨구며 날아올랐다.

"아나!"
"옴마야! 이기 뭐꼬? 이기 꼬치잠자리(고추잠자리) 아이가? 이기 암꼬치잠자리가? 숫꼬치잠자리가?"
"가시나 그거. 니가 그거는 알아서 뭐할라꼬 그라노?"
"이기 암꼬치잠자리모 니가 가져가고, 숫꼬치잠자리모 내가 가져가구로. 그렇게 하모 우리 둘이는 절대 안 헤어진다 아이가."

 

 
   
  ^^^▲ 보름달처럼 잘 익은 호박
ⓒ 이종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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