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헴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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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보헴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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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보헤미안이 되고 싶었다

병태 형은 항상 술에 절어 있었다. 극장 뒤편의 영사실에 있는 연극반 사무실에 가면 항상 벌겋게 술에 절은 얼굴을 하고 있는 병태 형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젊고 싱싱하던 시절. 푸르기만 하던 젊은 시절에, 병태 형은 술의 무엇이 그렇게 좋아서 날마다 술만 마시고 살았을까? 나는 당시 그게 몹시 궁금했었다.

사실 연극반원들 치고 하나씩 무엇엔가 미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선 그들의 옷차림부터가 남들과는 달랐다. 우선 병태 형부터가 항상 쑥색 야전잠바를 입고 다녔었다. 사실 야전잠바는 그리 드문 풍경은 아니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갈 무렵인 80년 초반 무렵에는, 그 전보다 많이 줄기는 했어도 교정에서 드문드문 야전잠바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야전잠바를 입고 다닌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드러내보고자 하는 은밀한 욕망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한줌 가득히 모여 있는 곳이 바로 연극 반이었다. 연극 반에는 별의 별 모양의 옷차림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었다. 고깔모자를 쓰고 다니는 사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얀 고무신만 신고 다니는 사람. 그리고 연극반장 형은 여름에도 항상 긴 망토 같은 코트를 입고 다녔다.

연극반원들이 모여서 술자리라도 가지면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는 나 같은 책 벌래도 끼어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배척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똑같은 사랑으로 그들의 문화에 잘 동화되지 못하는 나를 사랑하고 감싸주었다. 당시 주량이 약했던 나는 그들과 술만 먹으면 먼저 잠이 들어 버리곤 했었다. 내가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들의 젓가락 장단은 멈출 줄을 모르고 밤늦도록 학교 앞 주막골목을 울려댔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장발에 이상한 차림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전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이상한 차림의 사람들도 맨 정신으로 모일 때는 칼날같이 날카로운 토론을 벌이곤 했었다. ‘단순한 딴따라가 아니라 진정한 연극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 반장의 지론이었고 모두가 그 말에 동의를 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서 한해에 몇 편씩의 훌륭한 연극을 무대에 오려놓곤 했었다.

희죽거리며 사는 그들의 삶은 의외로 진지했었다. 그들의 이상한 외모들은 나름대로의 고민과 나름대로의 방황의 표현일 뿐이었다. 규격화된 학교생활에 매어있기 싫은 이들의 문제제기. 당시 책 꽤나 읽는다는 학생들 사이를 휩쓸던 획일화된 주류적 사고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진정한 인문주의적인 것에 대한 동경. 나는 그들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70년대의 학창생활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그 시절을 잘 알지 못한다. 단지 헤어진 책의 페이지에서, 그리고 선배들이 전해주는 떠도는 말들을 통해서 희미하게 그 시절을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나는 연극 반의 선배들에게서 70년대적인 낭만과, 시대적 갈등 사이에서 방황하던 마지막 무리들의 초상을 보는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만 들곤 했었다.

결국 나는 연극 반을 떠났다. 나는 안다. 내 속에 그들과 같은 요소들이 있다는 것을. 짜여진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항상 주류문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는 내 속에는 그들과 같은 종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도 한때 그들과 함께 땅바닥에 주저 않아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고개를 재끼고 소주를 병 채로 목에 들이붓기도 했었다. 그리고 또 핏대를 세우며 토론하다간 웃고 잔디밭을 뒹굴며 장난을 치기도 했었다. 그것이 얼마 되지 않았던 나의 짧은 보헴이었다.

나는 연극반의 모든 것을 사랑했었다. 왠지 알 수 없이 나를 끔찍이 아껴주었던 병태형도, 나의 연극이론에 귀를 곤두세우던 동기들도, 그리고 하나같이 가슴속에 무언가 내가 알 수 없는 아픔 하나씩을 담고 살아가던 선배들도. 그러나 나는 연극 반에 그리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나는 그들과 같은 계통의 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처럼 인생 자체를 사랑하고 살기에는 나는 너무 강박적이었다. 나는 시간이 아까 왔었다. 행복에 머물수록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이 점점 더 커져갔다. 연극에 국한되지 않고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고, 보다 좀 더 시대적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에겐 그들과 함께 있었던 그 짧은 시간이 가장 행복했었다. 다른 아무도 풀어주지 못해서 내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는 나의 보헤미안 기질을,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풀어줄 수 있던 기간이 바로 그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다시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아직도 내 속에는 70년대식 보헴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은 엄연한 2000년대이고 나는 이 시절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가끔 그 시절을 꿈꾸며 산다. 서서히 지쳐가는 나에게 그 짧았지만 아름다웠던 시절에 대한 추억은 커다란 힘이 된다.

병태 형은 말했었다.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광진아. 인생은 참 아름다운 것이야. 너 그거 알어?” 연극 반의 창으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 아래에 술에 절은 몸을 휘청거리면서, 병태 형은 자신이 아끼던 후배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그렇게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이야기해 주었었다.

그 해 맑은 웃음을 가졌던 병태 형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나는 모른다. 연극 반을 벗어나 열심히 살고자 나름대로 애쓴 내 삶이 과연 아름다운 것인지. 세상을 희롱하며 시대를 방랑하던 그들의 삶이 진정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러나 그 시절. 한동안 내가 다른 삶을 살았던 그 시기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난 것들은 모두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기 때문일까. 연극반의 그 엉뚱한 선배들과 동료들 중에는 훌륭한 이론가도 또 훌륭한 배우도 많았었다.

그들 정도의 실력이면 지금쯤 한국의 연극무대에서 유명세를 떨칠 만도 한데, 추억에 어린 그 선배들은 지금은 내 눈이 뜨이지 않는다. 어쩌면 삶의 의미는 무엇을 남기는 것에 있지 않는 것인지 모른다. 당시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 시절을 불꽃처럼 타오르는 것이야 말로 진정 아름다운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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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세상 2003-09-28 09:43:49
푸른세상 정말 오랜만이다. 우리도 지금 파릇하고 싱그러운 세상을 만들어야
ㅚ는데 앞으로 희망 있겠지요. 파란 가을날씨 너무 좋고 거기다가 밝은 햇살에
흉작이나마 나락은 영글어가는데 푸른세상 자주 뉴타에 나와야 뉴타도 푸르게 푸르게 소나무처럼 꿋꿋이 나갈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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