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고을 광주의 진실한 명예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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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고을 광주의 진실한 명예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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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진실을 왜곡하지 말라!

"국군장병들이 自國 시민군의 총탄에 의해 무참히 죽어..."

광주사태의 현장 증인인 이법철 스님은 1980년 5월 22일 스님이 목격한 계엄군 희생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서술한다.

"소준열장군의 사령관실에서 나오니 하늘에서는 헬기가 무수히 오르내리고, 5월의 잔디밭에는 국방의 의무를 하러 간 병사들이 적국(敵國)의 총탄이 아닌 자국(自國) 시민군의 총탄에 의해 무참히 죽어 관속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비 오는 잔디밭에 판초우의 아래 즐비하게 누워 " 있었다.

"독자여 상상해 보시라! 빗속의 잔디밭에 피 흘려 죽어있는 젊은 국군들을……. 그들은 국방의 의무에 채 피워보지 못한 꽃으로 광풍(狂風)에 꽃이 지듯이 죽어 있었다.

그는 북한군과 김대중 세력이 대자보로 폭동을 선동하던 방식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거리의 도처에는 벽보의 대자보(大字報)가 시민군을 독려하고 있었다. 대자보는 하얀 대형종이에 검은 매직 글씨로 광주시민에게 결사투쟁을 하자는 선동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자보에 강조되는 부분에는 붉은 매직 글씨로 “미 7함대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서울과 부산, 대구, 등의 전국의 도시의 시민이 무장 봉기하여 광주를 지원하고자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참고 결사투쟁하자는 선동이었다. 도대체 누가, 미국의 항공모함의 병력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고 하며, 전국의 도시에서 무장시민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는 선동을 시작했을까?

이제 와서 생각하면 허망한 새빨간 거짓말로 시민군의 결사항전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시민군을 주검으로 내모는 세력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진실한 민주화 세력이었을까? 광주사태에 북한에서 밀파된 북한군의 공작이었을까? 아니면 정권을 잡으려고 환장한 그 지역의 정치인들의 배후 선전선동이었을까? 순진한 민초들의 시민군은 피 흘려 죽어가며 구원의 미군을 기다렸고, 각지의 무장봉기군들이 지원해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의 뜻에따라 전국적 무장봉기가 현실화 되었다면, 대한민국은 내전과 함께 김정일이 무혈입성하는 호기(好機)가 되었을 것이다. 시민군은 무장을 하여 버스와 트럭에 탑승하여 교도소를 해방하고, 전남의 시군읍(市郡邑)으로 진출하여 무장봉기를 시도하려 했다. 바람에 번져가는 들불을 막듯이 국군은 확산되어가려는 무장봉기를 원천봉쇄하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요원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착한 간호사로 등장하는 신애의 실제 인물 전옥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광주사태를 목도하면서 여자의 선전선동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절감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데모와 폭동의 발화점으로 가장 많이 이용되는 것이 여자이다. 일제시대의 광주학생 사건도 한국여학생이 못된 일본 학생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한국학생들을 분기(奮起)하게 만들었다. 일본 동경의 데모대가 폭도로 돌변하여 일본국회로 난입한 사건이 있었다.

폭도들은 데모대 속의 여대생을 죽이고서는 책임을 경찰에게 전가했다. 그것을 선전선동으로 데모대는 폭도로 돌변하여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광주사태에도 여자는 시민군의 분기에 이용되었다. 총을 멘 시민군의 호위 속에 지프를 타고 선전선동의 방송을 하던 여자가 광주시내를 돌고 돌면서,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난자하고, 유방을 도려내었다”는 선전선동을 했다.

이러한 선전선동은 광주시민을 분개하게 하였다. 화려한 휴가의 영화 속에서는 대학병원의 간호사가 시민군의 호위 속에 지프에 탑승하여 마이크를 잡고 광주시민의 동참을 호소하며 다닌다. 그것은 허위요, 날조이다. 진짜 선전선동의 방송을 하던 무서운 여자는 간호사가 아니었다.

무장세력이 점령하고 있었던 전남도청을 다시 광주시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5월 27일의 상무충정작전은 결코 희생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북한군과 김대중 세력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폭동을 선동하였으며,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무장시민군에게 근 열흘간 무기 반납을 호소하였어도 듣는 이가 없었다.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자들을 위하여 오십 년 백 년 기다려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마침내 5월 27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의 군 자위권 발동 재가가 떨어졌다. 그러나 군인을 향하여 마구 쏘아대는 총탄을 무릎쓰고 돌진하는 작전은 피아간에 20명의 전사자를 내었던 바 그 중에 김응래씨 전우도 있었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싹쓸이 하러 왔다고 김대중 세력이 퍼뜨렸던 유언비어와 달리 김응래씨는 전라도 여수 사람이었다. 그는 시민군과 국군이 대치하고 있던 지점에서 차마 시민군의 총탄에 맞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건만 시민군의 총탄은 비정하게도 그의 옆에 있던 전우의 목숨을 앗아갔다.

시민군의 총탄이 친구의 목숨을 앗아갔을 때 엄청난 충격과 마음의 상처를 그에게 또한 안겨주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충격을 받았음에도 치료는커녕 위로조차 해주지 않는 한국사회에서 그는 정신적으로 병들어갔으며 마침내 열차 사고로 그으 불우한 생을 마감하였다.

이처럼 광주사태 당시 도청을 광주시민에게 되찾아주기 위해 동원되었던 군인들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여주는 모습과 전혀 다르다. 그들 역시 무장시민군을 무서워하였으며, 시민군의 총탄은 그들을 빗겨가지 않았다. 그 중 국립묘지에 안장된 이들도 있으나, 김응래씨처럼 국립묘지에도 가지 못하고 시민군처럼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가족에게 가난을 물려주어야만 했던 이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광주사태의 진정한 피해자들이요 이제라도 그들의 가족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어야 하건만, 영화 "화려한 휴가"는 상처 치유는커녕 그들에게 "사람 죽이는 기계" 누명을 씌워 두 번 죽이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

법철스님이 전교사 사령관실에서 소준열장군을 만날 때,(1080년5월22일), 필자는 나주 예비군 대대에서 16명의 현역예비군들과 함께 광주로 집결하는 무장 시민군 3천여명의 광주진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위해 37세의 향토 예비군, 그리고 현장 취재기자의 신분으로 신명을 던져 분투하고 있었다.

마침내 필자는 9일간의 광주해방구의 경험한 증언자로 서울에 올라가 2010년 6월10일 전쟁기념관에서 평소 뵙고 싶던 법철스님을 30년만에 해후하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빛고을 광주의 진실한 명예를 위해, 북한정권이 조종하고 북한정권을 추종하는 자들의 공작으로 빚어진 국군죽이기 광주해방구의 진실을 밝히는데 불변의 동지로써 뜻을 함께 해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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