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주택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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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주택 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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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시절이 깃든 곳

우리 동네는 박정희 대통령이 지시한 특별사업의 하나로 지었다고 하는 ‘난민주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에 살기 전에는 다른 곳에서 살았다고 하지만, 내 기억이 닫는 범위 안에서 나의 유년시절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건축을 전공하셨다. 자신의 집을 지어보는 것이 꿈이었던 아버지는, 단칸방 생활을 접고 그렇게 난민주택에서 자신의 첫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기르셨다. 멀리 부산항 뱃머리가 바라다 보이는 산비탈을 따라 큼직하게 뻗어있는 난민주택 비탈을 오르실 때마다, 한번씩 손을 허리에 대고 바다를 바라보며 언젠가 자신이 지을 집을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생긴 난민주택인지, 또 한결같이 난민이 아닌 사람들이 그곳에 살고 있었는지는 당시 어렸던 나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은 없다. 하여튼 그곳은 이름은 연립주택을 연상시키는 난민주택이었지만, 집마다 구조랑 크기가 제각기 다 달랐다. 처음 지을 때는 비슷하게 지었을 것이다. 증개축이 자유로웠던 때인지라, 몇 년 지나지 않아 집집마다 모양이 제각기 달라져 버렸던 것이다.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가 살던 ‘54호’도 몇 차례 증축을 했던 것 같다. 희미하게 방 하나를 더 늘려서 달았던 기억이 난다. 앞집은 슬레트 지붕이었는데 우리 집은 기와집이었다. 그것은 언제 공사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집은 다른 집들과 다르게 대문에 철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난민주택은 결국 집마다 대문부터 시작해서, 마당의 모양, 지붕, 집의 구조까지가 제각기 다른 집들이 되었다.

나는 집 뒤 쪽으로 난 경사진 흙벽을 깎아내어서 텃밭을 만든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산비탈을 따라 층층이 집들을 지었기 때문에, 자연히 아랫집과 윗집사이에 층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 층의 경사가 심하지가 않아서 축대도 없었던 열악한 구조였다. 사람들은 흙은 파내어 경사를 줄이고, 대신 축대 보강을 하여 집을 넓히는 것이 유행이었다. 우리 집도 당시에 유행이었던 그 공사를 했었다. 집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그 가난한 동네에 살면서도 화단을 가꾸고 텃밭을 가꾸고 싶은 어머니의 꿈을 위해서.

당시 유치원 다닐 무렵이었던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어머니를 도와 함께 흙을 파내는 것을 도와드린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내가 흙을 파내다가 어머니가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신 적이 몇 번 있었다. 지렁이나 혹은 그와 비슷한 징그러운 것 때문에 지른 소리가 아니었다. 바로 총알 때문이었다. 일제시대와 한국내전 때의 군사용지였다고 하는 그 지역은, 땅만 파면 아무 곳에서나 그런 총알들이 나오곤 했었다.

동네가 늘어선 산의 제일 위쪽. 집이 들어서 있지 않은 울창한 나무사이를 걸어 올라가면 다소 펑퍼짐한 땅이 있었다. 그곳은 아이들이 놀기가 딱 좋은 곳이었다. 널찍한 공터여서가 아니었다. 잡목도 없는 자그마한 그 땅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원형 그대로의 참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에는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한, 버려진 대포도 녹슬고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것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님의 남다른 교육열 덕분에 나는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감히 꿈꾸기 힘들었던 사립학교에 입학을 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그 학교에서 선생님이 주소를 물을 때마다 나는 ‘남민 주택이요’라고 큰 소리로 말하곤 했었다.

그게 ‘남민 주택’이 아니라 ‘난민 주택’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놀랍게도 대학에 들어가고도 한참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냥 입에 붙은 대로 ‘남민 주택 54호요.’라고 집 주소를 외우고 다녔다. 마치 ‘54호’가 단순한 번지수이기라도 한 것처럼. 세상을 모르면 그렇게 용감해지는 것인가 보다.

우리 집은 아마 그 동네에서 중상층 수준이었던 것 같다. 테레비를 세 번째로 샀었고, 몇 되지 않는 기와지붕 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의 장식이나 집의 크기가 훨씬 더 크고 좋았던 친구 집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최고 수준이었을 리는 없다. 아버님은 학교 교사였었다. 당시는 지금보다 교사에 대한 대우가 나은 시절이었다고 하지만, 무일푼에 맨손으로 신혼살림을 시작하신 부모님들이 최상류의 생활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친구와 친하게 놀았었다. 그 친구네는 집에서 나무로 옷걸이를 만드는 일을 했었다. 그래서 다들 그 집을 ‘옷걸이 집’이라고들 불렀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커다란 비닐로 지붕을 씌운 집이었다.

언젠가 그 집에 놀러갔을 때, 친구 혼자서 마루에 않아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 커다란 놋그릇에 시커먼 보리쌀만 가득한 담아서 간장만으로 열심히 먹고 있었다. 그 어린 마음에 왜 그렇게 마음이 아팠었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아마도 내 기억에 남는 첫 번째 아픔이었을 것이다.

나는 당시 시골에 계시던 할아버지로부터 지게 지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가 달가워하지 않으시던 지게 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단지 힘이 들었을 뿐이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린시절에는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었다.

아래쪽에 있는 빨래터에서 물지게로 져 날라야 했다. 물을 길어주는 아저씨가 있었다. 하지만 물이 많이 드는 빨래는 그곳에 들고 가서 해오곤 했었다. 어머님이 빨래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돌아올 때, 내가 물지게를 지고 오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어머님은 한사코 말리셨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물지게 뿐 아니라 똥지게도 있었다. 왠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아저씨는 힘이 없어선지 술에 절어선지 늘 비틀거리며 다녔다. 아저씨가 똥지게를 지고 산꼭대기에 있는 숲에 판 구덩이로 올라가는 길에는, 발자국 자국마다 흔들거리는 똥지게에서 떨어진 똥물이 묻어있었다.

아직 철이 들기 전이었을 당시, 나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 아저씨 뒤를 따라다니며 놀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이 성인이 된 지금 내 유년시절을 돌아볼 때 가장 큰 아픔의 기억으로 남는다.

이런 것들이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내가 유년시절에 관한 추억들이다. 우리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그 동네를 벗어났다. 당시 세상을 몰랐던 나는 그렇게 부모님이 그 동네를 벗어나고 싶어 하셨던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지 건축을 전공하신 아버님이 자신이 직접 설계하신 집을 지어보고 싶다는 꿈을 이룬 것으로만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그 동네를 떠났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 동네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어쩌면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기 때문일까?

나는 내 유년시절을 생각 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난다. 그러나 기억속의 구체적인 유년시절은 그렇게 따뜻하고 넉넉한 곳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추억들을 합한 이미지가 따뜻함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그 어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나에게 베풀어 주신 부모님과 친척들의 사랑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사랑을 힘입어 나는 그 척박한 시절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지내올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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