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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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운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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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문화유산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잊혀지지 않는 것은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을 키우며 뛰어 놀던 고향과 학교에 대한 추억이다.

나는 연지국민학교를 다녔다. 요즈음 이름으로 부르자면 연지초등학교를 다닌 셈이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전국의 초등학교를 초등학교라 부르지 않고 oo국민학교라고 불렀다. 그래, 그 연지초등학교…

가을은 아련한 추억을 갖게 하는 힘이 있다. 기억 저 너머에서 꾸물거리며 아스라이 나타나는 신기루처럼 높치기 싫은 동심의 추억…

해마다 가을이 다가오면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가을 들녘에 벼들이 누렇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마다 가을운동회가 열리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날 하루만큼은 아침부터 새파란 가을하늘에 만국기가 펄럭이는 학교 운동장에서 맘껏 뛰어 놀며 점심시간이 되면 운동장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힘차게 달려가던 그 기억, 그리고 소풍을 갈 때나 먹어 보았던 그 김밥과 한입 가득 입에 집어 넣던 그 삶은 달걀, 나는 그 시절만 떠올리면 간밤에 비가 오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빌던 나의 어린 모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리고 그렇게 깜빡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가을하늘은 내 소망처럼 눈이시리게 맑게 개여 있었다.

해마다 열리던 가을운동회는 교장선생님의 개회식 인사가 끝나면 곧바로 본 경기로 이어졌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와아아아~ 와아아아~”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면 머리에 청 띠와 흰 띠를 둘러 맨 청백팀의 뜨거운 응원전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만국기 또한 그 응원소리와 더불어 가을바람에 더욱 힘차게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하얀 모자에 칼 같이 앞날을 빳빳하게 세운 하얀 체육복을 입은 선생님의 지휘 아래 저학년 어린아이들도 100미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100미터 달리기는 먼저 출발선에 나란히 엎드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앞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하고, 도착점에 이르면 선생님께서 등수에 맞게 손등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또 모두가 어울리는 하이라이트는 단연 바구니 터뜨리기다.

“야! 바구니 터뜨리기다.”
“니 오재미에 돌 좀 넣었나?”
“그라다가 사람한테 맞아가 진짜 사람 박이 터지모 우짤라꼬?”
“우쨌거나 경기는 이기고 보아야 할 것 아이가?”
“내는 반칙을 쓰는 기 싫다. 정정당당하게 싸울끼다. 비록 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라고 선생님께서 그기 스포츠 정신이라 안 카더나?”

가을 운동회에서 가장 정점이라고 할만한 것은 바구니 터뜨리기였다. 바구니 터뜨리기는 장애물 경기가 끝나면 청 백팀이 양쪽으로 나뉘어 각자 가지고 온 오재미를 던져 보름달처럼 둥그런 바구니를 터뜨리는 아주 신나는 놀이였다

특히 바구니 터뜨리기는 점심시간을 코앞에 두고 벌어지는 놀이여서 아이 어른 할것 없이 더욱 신이 났는지도 몰랐다.

바구니 터뜨리기가 시작되면 청 백팀으로 나누어진 아이들은 물론 그날 운동회를 구경하러 나온 온 동네 사람들까지 모두 나와 앞을 다투어 바구니를 향해 오재미를 던지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오랜만에 부모들과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한바탕 어우러지면서 흥겹고 정겨운 놀이였다.

“와아! 우리가 이겼다.”

그렇게 바구니가 터지면 바구니 안에서는 오색 색종이가 마구 쏟아져 나오면서 ‘즐거운 식사시간’ 이라는 문구가 비단처럼 길게 펼쳐졌다. 그와 동시에 모든 경기는 잠시 중단되고 아이들과 부모님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마다 즐거운 점심을 먹기 시작한다.

점심식사가 시작되면 학교 운동장 곳곳에는 동네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집에서 가지고 온 햇밤과 배, 삶은 계란, 사이다 등을 꺼내놓고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다. 우리 학교 가을 운동회 날은 말 그대로 동네잔치였다. 학교 옆으로는 마치 오일장이 열린 것처럼 국밥 장사들이 죽 늘어서 있었고, 아이스케키 장사며, 번데기 장사, 엿장사 등 온갖 장사치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초등학교 운동회는 내가 어릴 때 직접 겪었던 그런 아름다운 추억과 설레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어린 시절의 운동회를 생각한 조그마한 기대는 운동회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깨지기 시작한다. 아니, 애당초 내 어린 날, 온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잔치였던 그 운동회를 기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가을 운동회에는 그때처럼 그렇게 많은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소리를 내며 참석하지를 않았다. 아니, 아예 부모님이 한분도 참석하지 않은 아이들도 많았다.

삶은 계란, 삶은 밤을 두 손 가득 쥐고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목놓아 외치던 가을 운동회! 가을 운동회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도 즐겁게 해 주는 마을 축제였다. 게다가 내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그 병 사이다는 모두 캔 사이다로 바뀌어 있었고, 햇밤이나 햇배, 삶은 계란 대신 양념통달과 피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부모님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가 통닭집과 피자집에 직접 전화를 걸어 배달을 시켜먹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럴 정도로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많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오랜 전통과 좋은 관습은 아무리 시대에 뒤떨어진 것 같아 보여도 결코 버리거나 잊어버려서는 안 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을이 다가오면 내 어린 날 그 학교 운동장에서 학교 선생님과 아이들, 학부모들이 모두 하나가 되어 만국기 휘날리는 교정에서 그날의 피날레였던 청, 백군의 릴레이 달리기는 잊을 수 없다. 청,백군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할 때 마다 운동장 가득 채워 넘쳤던 그날의 함성! 그 아름다운 소년시절의 추억은 아직도 나의 가슴에 생생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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