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무책(無策)이 좋은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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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무책(無策)이 좋은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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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잡한 정책을 발표하고 돌아다니는 나라라면 무책이 상책

 
   
  ^^^▲ 연방준비제도위원회 폴 볼커 의장^^^  
 

정부는 무슨 문제이든 해결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것이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정부는 결코 전능하지 않다.

또한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거나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정부의 무책(無策)이 좋은 정책일 수도 있다. 대통령이 온갖 조잡한 정책을 발표하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데 주력하는 나라라면 “무책이 상책일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물론 국가안보에서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일 수는 없다. 하지만 경제정책에서는 “무책이 상책”일 수가 있는데, 그 좋은 예를 19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연방준비제도위원회 폴 볼커 의장

우리나라에선 거의 20년 동안 미국 연방제도위원회 의장을 지낸 앨런 그린스펀을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선임자인 폴 볼커(Paul Volcker) 의장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 돌이켜 볼 인물은 그린스펀 보다는 볼커일 것이다.

1979년에 카터 대통령에 의해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된 볼커는 당시의 큰 문제였던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을 해결해야만 했다. 당시 미국 경제는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존슨 대통령이 시작한 베트남 전쟁과 ‘위대한 사회’라는 이름의 복지정책으로 정부 지출은 늘었지만 정부는 세금인상을 거부했다. 결국 돈을 찍어서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고, 닉슨 대통령은 달러의 금태환(金兌換)을 포기해 버렸다.

이런 대가로 침체와 인프레가 겹치는 지독한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었다. 카터는 두 자리 수 인프레와 두 자리 수 이자율을 해결하지 못하고 1980년 대선에서 참패했다. 선거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감세(減稅)를 통한 경제 살리기, 즉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를 약속했다. 1920년대에 앤드류 멜런 재무장관이 주창했던 정책이 75년 만에 공화당의 공약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폴 볼커는 이자율을 인상했다. 돈줄을 바싹 조인 것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임기 초인 1981년에 프라임레이트는 21%를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런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빌려서 자동차를 사거나 집을 살수는 없었다.

달러가 고평가(高平價)가 되어서 일본 수입품이 물밀 듯 들어왔고 미국의 제조업은 빈사상태에 몰렸다. 실업자가 늘었고 대도시에는 노숙자가 늘어났다. 공화당 의원들은 이러한 볼커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했다. 볼커는 공화당 정치인들의 ‘공적(公敵)’이 되어 버렸다.

사정이 이러니 아무리 대중설득력이 뛰어난 레이건이라도 지지도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백악관 내에서도 레이거노믹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 나돌았다. 예산국장을 지내던 데이비드 스토크먼은 레이거노믹스를 비난하고 사임했다.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던 제임스 베이커는 나중에 나온 회고록에서 “나는 레이거노믹스가 실패할 것으로 걱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볼커를 연임시켰고, 고집스런 볼커의 판단은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두 자리 숫자이던 인프레가 1983년에 3%대로 낮아진 것이다. 인프레가 잡히자 이자율도 서서히 내려갔고, 석유류 가격 통제를 없애자 공급이 늘어서 휘발유 가격도 내려갔다. 미국 경제는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난 것이다. 오늘날 볼커의 긴축정책은 그 후 20년 간에 걸친 호황의 기초를 세웠다고 평가된다.

만일에 레이건이 여론의 압력에 굴복해서 값싼 경기부양책이란 마취제를 시행했더라면 미국 경제가 어떻게 되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대미수출에 크게 의존했던 당시의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사실 미국 경제는 정부지출에 의해 성장해 온 것이 아니다. 미국 경제의 동력은 민간의 저축과 투자, 그리고 기술혁신이었다. 그런 것을 잘 알았던 레이건 대통령의 무책(無策)이 상책(上策)이었던 셈이다.

허버트 후버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실패

캘빈 쿨리지 대통령을 이어서 1929년 초에 대통령이 된 허버트 후버는 토목전문가 출신이었다. 당시 재무장관이던 앤드류 멜런은 상무장관을 지낸 후버가 대통령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1929년에 주식이 폭락하자 정작 주식폭락으로 개인적 재산의 손실이 컸던 멜런 장관은 주식시장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후버는 시장에 개입하고 보호무역을 시행해서 일시적 경기침체로 끝날 수 있는 상황을 공황으로 만들었다.

1932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패배했고 정권은 민주당으로 넘어 갔다. 새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첫 임기 동안 뉴딜이란 이름으로 정부지출을 늘려서 경기를 부양시켰다. 그런 효과에 힘입어 1936년에 재선에 성공했지만 두 번째 임기 동안 주가는 대폭락을 하고 실업이 늘어서 공황이 심화되었다.

미국이 공황을 벗어나게 된 계기는 제2차 대전 발발이었다. 1200만 명의 젊은이가 전쟁터로 향해서 실업자가 없어졌고, 정부는 기업을 적대하던 정책을 중단했고, 기업들은 군수물자 생산에 총력을 다했다.

1990년대에 일본 경제가 정부지출 증가로 구조적 불황을 일으킨 것은 뉴딜의 실수를 반복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다.

우리의 경우는 김영삼 대통령 임기 초의 실책에 대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다. YS가 취임하자 주식시장이 침체에 빠져들었는데, 정부는 공기업들로 하여금 주식을 사게 했고, 그 결과로 대한투신와 한국투신은 불실화 했으며 금융 전반이 취약해졌다.

4대강 사업인지 뭔지를 한다면서 22-30조원을 퍼붓겠다는 한심한 행태를 보고 있자하니, 1980년대 초에 미국 경제를 살린 볼커의 뚝심과 레이건의 무책(無策)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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