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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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전라도에서 건국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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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왕도는 전라북도 전주시

 
   
     
 

신라 왕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서

신라 천년 왕도의 경주에 오봉산(五峯山), 부산성(富山城), 주사암(朱砂巖),개암사(開岩寺), 옥문곡(玉門谷), 지맥석(持麥石)은 신라왕도 경주(慶州)의 진위(眞僞) 판별에 결정적 고증이 된다(위 지도 참조)

부산성(富山城)은 경주인가? 전주인가?

상기 경주시 지도와 같이 경상북도 건천읍 서남쪽에 여근곡(女根谷)이 있고, 경주시에 오봉산(五峯山), 부산성(富山城), 주사암(朱砂巖)이 있다.

1.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선덕왕(善德王) 
636년 5월에 남산 궁궐 서남쪽 옥문지(玉門池)에 두꺼비들이 떼로 모였다. 임금이 그 사실을 듣고서 좌우를 보며 말하기를 "두꺼비(蝦蟇)들의 부릅뜬 눈은 성남 병사(兵士)들의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들으니 서남쪽 변경(邊境)에 옥문곡(玉門谷)이라는 지명(地名)이 있다고 한다. 혹시 이웃나라 병사가 그 산 중으로 몰래 들어오지는 않았는가?"라고 하셨다. 이에 장군 알천(閼川)과 필탄(弼呑)에게 명(命)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곳을 수색하게 하였다. 과연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습격하려고 갑옷 입은 병사(甲士) 5백 명을 거느리고 여근곡에 와서 잠복해 있었다. 알천(閼川)이 기습 공격하여 모두 다 죽였다.
註 : 부산(富山), 독산성(獨山城)에 옥문곡(玉門谷)이 있다.

2.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삼국유사 권제1 기이편(紀異篇)
신라 제27대 선덕왕의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중 두 번째는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철인데도 뭇 개구리들이 모여 3-4일 동안 울었다. 나라사람 들이 괴이하게 여기고 왕에게 물었다. 임금이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예(精銳) 군사 2천명을 이끌고 서쪽 근교(近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이 어딘지 물어봐라. 반드시 적병들이 있을 것이니 기습해서 죽여라" 명을 받은 두 각간(角干)이 각각 군사 천 명을 이끌고 서쪽 교외(郊外)에 가서 물었다. 과연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에 백제 군사 5백 명이 숨어있었다.

백제 장군 우소(亐召)라는 자가 신라의 남산(南山) 영석(嶺石) 위에 매복해 있었다. [알천, 필탄이] 그를 포위하여 화살로 쏴 죽였다. 증원군(後兵) 1,200 명이 뒤 따라 오자 그들 역시 쳐서 죽였다. 살아남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부산(富山) 아래에 여근곡(女根谷)이 있었고, 신라 남산에 해당한다. 백제의 우소(亐召)가 신라 남산(南山:부산) 영석(嶺石) 위에 매복해 있었다.

3, 신라본기 제5 진평왕(新羅本紀 第五 眞德王)
삼월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방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십 여성을 함락하였다. 진평왕은 병을 얻어 압독주독 김유신에게 이를 물리치라 명하였다. 유신은 훈련된 병사들을 데리고 의직을 맞아 세 갈래 길로 군사를 추격하여 적진으로 갔다. 대량성(大梁城:전남 김제) 밖에 이르니 백제가 역습으로 대항하였다. 김유신은 일부러 이기지 못하는 척 패주하여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렀다. 백제는 그를 얕잡아 보고 군사를 크게 동원하여 왔다. 그 때 복병이 일어나 백제군의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으며 1천 명의 목을 베었다.
註 : 부산(富山), 독산성(獨山城), 대량성(大梁城)에 옥문곡(玉門谷)이 있다.

4, 백제본기 제6 의자왕[三國史記  卷 第二十八]
의자왕 7년 10월에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步騎] 3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 무산성(茂山城:무주)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성(甘勿城)과 동잠성(桐岑城)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김유신이 친히 군사를 격려하며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 크게 깨뜨리니 의직은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648년(8년) 3월 의직이 3000명의 군사로 신라 땅의 무산성(茂山城:전북 무주)을 함락시킨 후 신라의 서쪽 변방의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648년 4월 옥문곡(玉門谷)으로 군사를 나아가게 하니 신라 장군 김유신과 싸워 역습으로 대패하여 1천여 명이 전사하였다. 660년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오자 좌평 의직(義直)은 2만의 군사를 데리고 가서 기벌포(부안 백강 하구)에서 맞섰지만 13만 대군의 소정방을 이기지 못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註 :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무산성(茂山城)에 옥문곡(玉門谷)이 있었다.

상기 [1~4 번의 삼국사기 본문]에서 여근곡(女根谷)위치를 살펴본 것과 같이 충청도의 백제군사 갑자기 경주 건천의 여근곡을 습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백제 장군 우소(亐召)가 신라 남산(南山:부산성) 고개바위(嶺石) 위에 매복해 있었다. 즉 옥문곡의 위치를 설명한 본문과 상기 지도에 나타나 있는 지명으로 경주의 옥문곡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주사암(朱砂庵)는 경북 경주인가? 전북 임실인가?

전라북도 전주시의 부산성(富山城)을 속칭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 칭하며 바로 주류산성(周留山城)이다. 남쪽에 주암사(朱巖寺)가 있고, 그 북쪽에 큰 반석(盤石)이 있다. 이것이 소위 지맥석(持麥石) 대암(臺巖:영석(嶺石)이다.

경주의 부산성이 진짜인가? 전라북도의 부산성이 진짜인가?
아래의 성명(城名) 유래로 옥문곡과 부산성의 진위(眞僞) 판별을 명확히 확인 할 수 있다.

전라북도 부산성(富山城)의 유래
1, 부산성(富山城)을 속칭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 칭한다.
2, 전라북도 임실군에 성수산(聖壽山), 영취산, 백련사, 관촌사선대(館村四仙臺:신라의 네 국선(國仙). 영랑, 술랑, 안상, 남석행을 이른다.)가 있다. 군청 소재지의 임실군은 면적이 599.16㎢.이다. 이 부산성이 신라 6부 중 진지촌이며, 본피부(本彼部,우진부)이며 지백호(智伯虎)에게 정(鄭)씨 성을 하사한 곳이다.

◈ 효소왕대 죽지랑조(孝昭王代 竹旨郎條) [삼국유사 권2]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는 신라 효소왕 때 득오(得烏)가 지은 8구체 향가이다.
신라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는 급간(級干:관등의 제 9위)이 있었다.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 놓고 매일 출근하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의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에 갔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신라 모량부(牟梁部)의 익선아간(益宣阿干) 당전(幢典:신라의 군직)이 내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곡식창고를 지키는 창직(倉直)으로 임명하였기에 급히 가느라고 죽지낭님께 알리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죽지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그 곳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마는 공사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위로하고 대접해야겠오" 죽지랑은 익선의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떡과 술을 득오에게 먹인 다음, 익선아간(益宣阿干)에게 휴가를 청하였으나 이를 거부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간진이라는 사람이 추화군(지금의 밀양)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부산성(富山城) 안으로 싣고 가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존대하는 풍도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막히고 변통성이 없는 것을 품위가 없고 천하게 생각하여, 가지고 가던 벼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득오를 보내주도록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또 진절사지(珍節舍知-관직의 제13위)가 쓰는 말안장을 더 주었더니 드디어 허락하였다.

조정의 화랑을 관장하는 관직이가 이 이야기를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씻어 주고자 하였는데, 도망쳐 버렸으므로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때는 동짓달 몹시 추운 날인데 성안의 못에 목욕을 시키니 얼어죽었다. 대왕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은 모두 벼슬에서 몰아내게 하고, 그 지방사람 들에게 심각한 불이익을 주었다. 처음 득오가 죽지랑을 사모하여 지은 노래가 모죽지랑가이다.

◈ 전라북도 전주시 任實君(임실군), 城嵋山城(성미산성)
부산(富山)이라 부르는 하지산(下枝山) 남쪽에 주암사(朱巖寺)가 있고, 그 북쪽에 큰 반석(盤石)이 하나있다. 이것이 소위 지맥석(持麥石:대암(臺巖:영석(嶺石)이다.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한 대암(臺巖) 위에는 평탄하여 백여명이 앉을 수있다. 옛날 신라 김유신 공이 여기에 보리를 두어 술 재료로 사용하여 장군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한다. 움푹 패여 들어간 자리들은 말발굽 흔적이라 한다. 주사암은 오봉산(五峯山)정상 남쪽에 위치하여 동서북면은 바위로 병풍처럼 에워싸여 있으며 남쪽에 탁트인 전망에 한 눈에 바라보이는 부산성(富山城) 밑에 옥문곡이 있었다.

전라북도 전주시 주사산(朱砂山)은 신라 선덕여왕이 말한, 부산(富山),오봉산(五峯山), 옥문곡이 있다. 즉 오봉산 정상에 옛 설화를 간직한 주사암(朱砂庵)은 신라문무왕 때 의상 대사가 주암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절의 내력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주사암의 창건 설화).

부산성(富山城)을 축성할 때 의상대사는 이 부산성에 사찰을 두게 되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 절은 성벽 바깥에 있게 부산성이 축성되었다. 한다. 그 예언이 있고부터 신라가 멸망하기까지는 그로부터 수백년이 더 걸렸다. 또한 이 주사암에는 여태까지 죽어나간 사람이 없다고 하여 불사처(不死處)라 이르고 있다. 주사암은 본래 영묘사(영산전(靈山殿)이며,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서 자연석으로 높게 올려 쌓은 석단 위에 세워졌다. 영산전 좌우로는 삼성각과 관음전이 있고 삼세제불(三世:과거 현재 미래)을 비롯하여 16羅漢像(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신라의 개암사(開岩寺)가 주사암(朱砂庵)이 된 유래 김극기(金克己)의 시 서문에 의하면, 하지산(下枝山:오봉산)은 속칭 부산(富山)이라하는데 남쪽에 주암사 절이 있고 절 북쪽에 높이 솟은 바위로 된 대(臺)가 있고, 그 서쪽에 100여 명이 앉을 만한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를 지맥석이라 하였다. 옛날 김유신이 보리를 가지고 가서 누룩을 만들어 술을 빚어 군사들과 잔치하던 바위였다고 한다. 지금도 말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지맥석에서 서쪽으로 8, 9보 되는 곳에 주암이 있다. 옛날 한 도인이 여기서 거처하면서 신중삼매(神衆三昧)를 얻었다. 도인이 항상 말하기를, “궁녀(宮女)가 아니면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라고 말했는데 신중(神衆)이 밤에 궁성으로 날아 들어가 궁녀를 데리고 와서 도인에게 바쳐 밤새 함께 있게 하고 새벽에 다시 궁중으로 데려다 주었다. 궁녀가 매일 밤 납치되어 가서 도인과 밤을 지내게 되니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에 왕에게 사실을 고하니, 왕이 붉은 단사(丹砂)를 주면서 그곳 주위에 붉게 칠을 해 표시하라고 시켰다. 그래서 궁녀가 밤에 납치되어 가서 주위에 붉게 칠을 해놓았다. 이튿날 왕이 군사들을 명해 각처에 붉은 칠이 되어 있는 곳을 찾으라 하니, 군사들이 드디어 여기 바위에 붉게 칠해진 것을 발견했다. 보니까 바위로 된 문이 있고 안에 한 스님이 앉아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왕명을 받은 용맹한 군사들이 들어가 데리고 나오려 하니, 수만 명 신병(神兵)이 골짜기를 가득 메워 호위하기 때문에 접근할 수가 없었다. 보고를 받은 왕이 이인(異人)이라고 생각하고 정중하게 궁중으로 모시고 와 국사(國師)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21)]

 
   
  ▲ 전라북도 상서면 부산성(富山城)  
 

전라북도 상서면 감교리의 개암사(開岩寺) 뒤에 있는 큰 바위를 '울금바위'라 한다. 산 꼭대기에 거대한 산 같은 울금바위를 중심으로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쌓았다. 성벽 둘레는 약 3,960m에 달하며 높이는 3m 내외로써 인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성곽이다. 성곽 북쪽에 북장대(北將臺)가 있고, 남쪽에 남장대(南將臺)가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부안조에는 '우진암(禹陣巖), 우진산성(禹陣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는 위금암(位金岩), 우금암(遇金岩)이라고 한다. 또한 이성의 이름은 마연성(馬延城), 위금산성(位金山城) 등으로 칭하며 현재 공식 명칭은 주류산성(周留山城)으로 표기되고 있다.

고조선 삼한말기에 위만에게 패한 준왕은 전라북도 금마(金馬)에 도읍을 정하고 그해 돌아가시었다. 6세 마한의 효왕(孝王) 28년(B,C 86년)에 이곳 개암동으로 와서 그의 부하인 우(禹)장군과 진(陣)장군으로 하여금 산성을 쌓게하여 우진산성(禹陣山城)이라 한다. 산성 계곡에 왕궁(王宮)을 짓게 하고, 동쪽은 묘암사(妙岩), 서쪽에 개암사(開岩寺)라 하였다.

개암사지(開岩寺誌)에 의하면 당시 개암동에 마한의 왕궁(王宮) 터라고 한다. 마한의 제8세 원왕(元王) 20년(BC39년) 마한 임금이 죽고 부장이었던 마연(馬延)이 왕위를 계승하여 30년 동안 백성을 태평하게 잘 다스렸는데 개수험(蓋守驗)이라는 못된 신하가 난을 일으켜 마연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백성들이 일어나 개수험의 목을 베고 신라에 항복하여 마한은 멸망하게 되었다. 이 지방 사람들이 마연의 선정을 잊지 못하여 성 이름을 마연성(馬延城)이라 불렀다. 한다. 이 주류성(周留城)은 663년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에 가 있던 부여풍(扶余豊)을 임금으로 받들어 백제 부흥군이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산성이다.

 
   
  ▲ 백제부흥운동의 항전지, 주류성  
 

부산성(富山城)이 바로 주류산성(周留山城)이다.

백강(白江)과 주유성(周留城)은 신라 · 당의 연합군과 백제와 왜(일본)의 연합군이 전후 3회에 걸쳐서 수륙공방전을 전개하여 삼국통일의 대단원을 이룬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즉 663년 일본 부모국의 백제가 멸망에 이르자 일본에서 급파된 원군이 가담하여 전무후무한 국제적 연합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 원효가 창건한 개암사, 멀리 주  
 
 
   
  ▲ 원효가 창건한 개암사, 멀리 주  
 
 
   
  ▲ 전북 부안의 원효굴주류성 정상부인 울금바위에는 세 개의 굴실이 있다. 백제부흥군을 지휘했던 복신이 살았던 복신굴과 베틀굴 그리고 원효굴이 있다. 원효굴은 20m의 암벽 정중앙의 벼랑 사이로 비좁은 길이 하나인데 밑이 아득하여 접근이 쉽지 않다.  
 

원효는 전북 부안의 주류성 굴에서 수행하고, 개암사를 창건하여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을 위무하며 설법을 했다.

일제가 거짓 가짜로 만든 경주 부산성(富山城)

慶州 서쪽 건천읍 송선리에 있는성(城)으로 부산(富山)을 주사산(朱砂山), 오봉산(五峰山), 오로봉산(五老峰山), 닭벼슬산 이라고도 부르며, 높이가 729.5m 되는 산정상에 있으며, 신라 문무왕(文武王)3년(663)에 축성을 시작하여 3년만에 완성한 성(城)으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성벽의 길이는 7.5km에 이르고, 세종실리지에는 부산성(富山城)으로 기록되었는데, 성(城)의 두레는 약2,765보3척 이였으며, 신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시대까지 성안에 샘 9군대와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할석(割石)을 이용한 석축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安山巖)을 이용하여 쌓아올렸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진채 흩어져 있다.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에 적합하며, 성밖의 지형은 사면이 모두 경사가 심하다.

뛰어난 예지력이 있었던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여근곡(女根谷)에 잠입한 백제군을 물리친 이야기로 본다면, 이 성(城)은 서쪽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국방의 요충지로 경주(慶州)의 외성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효소왕(692~702)때의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화랑 죽지랑(竹旨郞)과 낭도 득오(得烏)에 관한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 경주 부산성(富山城) 가는길  
 

건천에서 서쪽 약 4km의 거리에 있는 오봉산(五峯山)에 위치한 석축 산성으로 일명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주 서쪽에 해당되는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며, 주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吳老峯山)·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의 부산((富山) : 부산(夫山))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마련된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서,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 경상북도 경주의 주사암(朱砂庵)  
 
 
   
  ▲ 경상도 경주 부산성(富山城)의  
 

경주의 부산성(富山城)은 가짜로 밝혀졌다.

[1] 부산성(富山城)의 여러 칭호는 아래와 같다.
성미산성(城嵋山城), 하지산(下枝山), 주사산성(朱砂山城),우진산성(禹陣山城), 마연성(馬延城),위금성(位金城),독산성(獨山城),주류성(周留城)등으로 칭했다.

[2] 부산성(富山城) 큰 바위의 여러 칭호
지맥석(持麥石), 반석(盤石), 대암(臺巖), 영석(嶺石), 우진암(禹陣巖), 위금암(位金岩), 우금암(遇金岩), 울금바위라 칭했다.

[3] 부산성(富山城) 사찰(절)의 여러 칭호
개암사(開岩寺), 주암사(朱巖寺), 주사암(朱砂巖), 영묘사(靈廟寺) 등이다.

[4] 개암사(開岩寺),의 유래
고조선 삼한말기에 위만에게 패한 준왕은 전라북도 금마(金馬)에 도읍을 정하고 그해 돌아가시었다. 6세 마한의 효왕(孝王) 28년(B,C 86년)에 전라북도 전주시 임실면 개암동으로 와서 그의 부하인 우(禹)장군과 진(陣)장군으로 하여금 산성을 쌓게하여 우진산성(禹陣山城)이라 한다. 산성 계곡에 왕궁(王宮)을 짓게 하고, 동쪽은 묘암사(妙岩寺), 서쪽에 개암사(開岩寺)라 하였다. 그 후 부산성의 개암사(開岩寺)는 선덕여왕 즉위 원년(632)에 영묘사(靈廟寺)가 창건되었다. 상기 본문과 같이 그 후 주사암(朱砂庵)이라 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 신라의 왕도는 전라북도 전주시로 밝혀졌다
상기 [1,2,3,4]와 같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산성명(山城名)과 사찰명이 바뀌었던 것이다. 곧 부산성(富山城)과 주류산성(周留山城)이 같은 산성(山城)이라면 경주의 부산성(富山城)은 일제와 이병도가 조작한 산성으로 명확히 입증되었다. 즉 우리나라를 강탈한 일제와 이병도는 전라북도 전주시 任實君(임실군)의 부산성(富山城)을 경상북도 경주에 거짓 부산성(富山城)을 만들어 본래 전라도에서 건국했던 신라의 왕도를 경상북도 경주로 얽어 맞추었던 역사적 진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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