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서운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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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서운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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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봉숭아 물을 들일 이유도 없습니다

봉숭아를 심어서 키우는게 학교 숙제랍니다. 큰 애(4학년)와 집 사람이 현관 옆에 10그루의 봉숭아를 심어 놓은 이유입니다. 그런데 요즘들어 비 바람이 자주오는 바람에 많은 꽃 잎이 떨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다간 꽃이 남아 나지를 않겠네'하고 중얼거리며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어제까지 없던 꽃들이 줄기 꼭대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 슬그머니 올려놓은 것이 아니라, 어제의 꽃망울이 활짝 피었기때문입니다.

두 손 가득히 빨간 꽃 잎을 채워넣고 돌아와서 백반을 찾았습니다. 힘쓰는 일은 건강한 집 사람 몫입니다. 아내가 조그만 절구통에 꽃과 백반을 풀어 놓고 공이로 여러번 두들겼더니 봉숭아 반죽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두 아이들의 손가락, 발가락을 비닐로 싸서 실로 묶어 놓는 것까지는 아내가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양 손가락은 제가 해 주었습니다.

우선 젓가락으로 봉숭아 찟은 것을 집어서 손톱 위에 올려 놓고 비닐로 손가락을 둘둘 말았습니다. 그리고 실로 튼튼하게 묶어 주었습니다. 일을 다 마쳐놓고 보니까 남아 있는 봉숭아 반죽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 나도 하나 해줄래? 손톱은 그렇고 엄지 발가락에 하면 좋겠는데" 했더니, 아내는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래, 주책이야' 하는 말만 들었습니다. 저두 화가 나서 "그거 하나 좀 해 주면 어때, 해주지도 않을거면서 왜 그래" 하고 한 마디 쏘아 붙였습니다. 괜히 기분만 상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옛날 생각이 남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일입니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봉숭아 물을 들이려고 하면, 저도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곤했습니다. 그러면 동생이 저의 엄지 발가락하고 새끼 손가락에 봉숭아 찟은 것을 올려놓고 비닐로 감싸주었습니다.

두 여자들 사이에서 살다보니까 취향도 비슷해 지는 모양입니다. 대체로 여름 방학때 물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 방학이 되었습니다. 고3 이다 보니까 시험을 볼때마다 교무실에 불려가서 성적에 대한 추궁을 당했습니다. "왜 성적이 요 모양이야" 하고 야단치시는 선생님 앞에 서 있다보면 봉숭아 물들인 새끼 손가락이 걱정됩니다. 가뜩이나 혼나고 있는 판인데 빨간 새끼 손톱이라니요. 걸리면 큰일입니다.

처음 몇 번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결국엔 걸리고 말았습니다. "야, 너 그 손톱이 뭐야" 하시며 눈 크게 뜨고 쳐다보시던 선생님의 화난 얼굴. 그냥 고개를 푹 숙이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 야 임마, 고3 이 되가지고 이게 뭐야" 하시며 야단을 치셨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추궁은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내게는 의미있는 손톱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때만 해도 첫 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빨간 봉숭아 자국이 남아 있으면 첫 사랑이 이루어 진다고 믿었습니다. 봉숭아 물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가을이 오고 찬 바람은 부는 겨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톱의 자라는 속도는 왜 그렇게 급한지 모르겠습니다. 눈이 아직 내리지도 않았는데, 손톱에 남아 있는 자국은 빨간 싸인펜으로 한 번 그어놓은 정도밖에 않되는 겁니다. 첫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는 별 수 없었습니다. 손톱을 깍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

20년 전에는 '첫 사랑을 이루고 싶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때문이라는게 없습니다. 그냥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다가 "주책"이라는 핀잔만 듣고 말았습니다. 봉숭아 물들인 소망을 쳐다보고 있기엔 너무 나이많은 아저씨라는 것을 깨닫게 된 서운한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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