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실은 그 아이는 별로 아프지가 않다. 조금 가래가 있고, 알레르기로 인한 약간의 콧물이 있는 정도다. 내가 매번 처방하는 약도 아주 약한 항히스타민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아이에게 이제는 병원에 그만 와도 된다고 하지 않는다. 내가 그러는 것은 그 아이가 너무 예뻐서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라거나, 한 사람의 환자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나의 진짜 관심은 그 아이의 뒤쪽에서 80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항상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않아 계시는 그 아이의 할머니에게 쏠려있다. 아이가 다시 한번 할머니의 손을 잡고 우리 병원에 찾아와서, 자신의 감기기운이 좀처럼 낫지 않는다고 또 한번 투덜거릴 때마다 할머니는 매번 더 수척해 지신다. 나도 더 이상 할머니의 체중을 재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눈에 보아도 몸이 눈에 띄게 수척해 가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아이의 진찰을 끝내고 나는 큰 소리로 말한다. “이젠 할머니 차례네요!” 내가 일부러 명랑한 소리로 할머니를 재촉하면 할머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진찰용 의자에 와서 않는다. 그리곤 또 빙그레 웃으신다. “할머니 요즘은 좀 어떠세요?” 하고 물어도 “뭘, 그냥 그렇지요” 하고 나즈막히 이야기 하시곤 또 웃으신다. 나는 그 웃음이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할머니는 암 말기시다. 수술도 할 수가 없어서 진통제로 그냥 참고 지낼 뿐이다. 그토록 방사선 치료나 항암요법을 권했어도 할머니는 빙긋이 웃고 그냥 약만 달라고 하실 뿐이다. 할머니는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런데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렇게 격렬한 고통을 겪고 계시면서도 그런 조용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것이 그저 감동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날마다 배가 불러오고, 호흡이 가빠져가는 그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진통제뿐이다. 이젠 마약성진통제로도 효과가 없어져, 호스피스 의학책에 나오는 대로 신경안정제를 같이 드시게 하고 있다. 날마다 양은 많아지고, 날마다 할머니의 기력은 쇠하여 간다. 배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암 덩어리로 식사를 거의 할 수 없는 할머니에게 얼마 전부터 수액제를 놓아드리고 있다.
아들 한사람이 같이 사신다고 한다. 그러나 한번도 본적이 없다. 할머니는 항상 손녀와 둘이서 손녀의 감기를 앞세워 병원을 찾는다. “할머니 이젠 손녀님 감기 다 나았어요!” 라고 크게 말하고 싶어도 할머니의 그 수줍은 미소를 보면 오늘은 꼭 그렇게 이야기해야 되겠다던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할머니는 혼자서는 병원에 오시지 않으실 것이다.
아픈 할머니의 팔을 재촉해 끌면서 껑충 껑충 뛰면서 병원으로 오는 그 손녀가, 진료실을 자기 집처럼 명랑하게 웃으며 돌아다니면서 늘어놓는 재담을 할머니가 얼마나 더 오래 들으실 수 있을지, 이쁜 손녀와 함께 할머니가 병원에 오시는 것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할머니가 자신의 두발로 병원까지 걸어오는 것이 점점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냥 끝까지 그 손녀의 감기를 치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감기 하나 못 낫게 하는 돌팔이 의사가 되어도 그편이 훨씬 낫다고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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