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을 좋아하던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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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을 좋아하던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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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너무 아름답고 눈물나지 않나요?

다음 수업을 기다리는 시간, 복도에서 누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좀 특이하게 보였습니다. 내가 재빨리 나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누구를 찾아오셨나요?” “OO를 찾아 왔는데요” 나는 그 여자가 찾는 여학생 친구를 찾아 주었습니다.

그 여자가 찾던 친구는 내가 속해있던 교지 편집부원이었습니다. 그러니 같은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었던 일종의 동아리 친구였습니다. “누구야?” 친구에게 나중에 그렇게 물어보았던 것은 순전히 그 여학생의 옷차림 때문이었습니다. 원래 눈썰미가 없기로 소문난 내가 보기에도 그녀는 특이했습니다. 그 여학생은 옷 전체를 보라색으로 차려입었던 것입니다.

어머님은 보라색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나는 보라색이 좋기만 하구만.” 이라고 하며 보라색 옷을 사려고 하면 어머니는 기급을 하고 말렸습니다. 보라색은 우울하고 불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나는 보라색 옷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한 터였습니다. “내 고등학교 친구야. 고등학교 문예부에 같이 있었어. OO라고 해.” 친구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뒤에도 종종 그 여학생을 보게 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내 주변에 그 여학생과 아는 사람이 많았고, 내가 소속한 서클이 그녀가 소속한 서클과 관련이 있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녀는 내가 배울 것이 많은 선배라고 생각하고 따르던 선배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것을 물어볼 기회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여학생의 특이한 점에 대해 묘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여학생을 마음에 두거나 좋아하거나 한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도서관으로 올라가는 긴 길에서 내 조금 앞에서 걸어가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녀는 역시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옷만이 아니라 스카프, 상의, 치마, 양말, 구두까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가 보라색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색에 대한 기호가 다르겠지만 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하는 보라색을 그토록 좋아하는 데는 무슨 사연이 있을 것만 같아, 자꾸만 궁금증이 더 생겼습니다.

말도 없는 새침떼기 같이 생긴 그녀는 예상외로 활동적이기도 하였습니다. 국문과에서 전통극회를 한다고 해서 가 보았더니 그녀가 연출을 맡고 있더군요. 그 극회를 만드는 데에도 그녀의 역할이 컷다고 했습니다. 당시 학교교지에 실리는 시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시를 참 잘 썻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녀의 결코 길지 않는 시에는 압축된 서정성이 절절히 느껴졌었습니다.

한번은 학교로 향하는 버스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니 그녀도 나를 알아보았습니다. 첫 번 그녀를 만난 날의 대화 후, 첫 대화이자 마지막 대화가 되었습니다. 비좁은 버스 속에서 사람들 틈에 밀리면서도 나는 대뜸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왜 보라색을 그렇게 좋아하세요?”
“왜 색깔에 대해 관심이 많으세요?”
“너무 보라색만 좋아하니까 특별해 보이잖아요.”
“저는 보라색이 가장 의미 있는 색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 가장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강렬하고, 열정적이잖아요. 나에겐 그렇게 느껴져요.”
“그렇게 강렬한 게 좋아요?”
“어차피 한번 사는 삶이지 않나요?”

이쯤에서 나는 이미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금 짓궂은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이번 기회에 궁금증을 확실히 풀어보고 싶기도 해서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다 같이 한번 사는 삶을 살아가고 있잖아요”
“어떻게 받아들이는 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죠.”
“그럼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데요?”
“삶의 모든 순간들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삶의 어떤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우세요?”

나는 자꾸만 짖굳은 질문을 이어나갔습니다. 이젠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녀의 입에서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말들이 그대로 흘러나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감동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버스안의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특이한 대화내용을 들으며 힐끔힐끔 바라보는 것은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삶 그 자체가 감동이예요. 삶을 자세히 지켜보세요.”
“그러면 뭐가 보이나요?”
“저기 창밖에 해가 뜨는 게 보이지 않나요?”

그녀는 바닷가를 따라 학교로 향하는 그 버스노선에 이른 아침 구름이 낀 바다위로 해가 뜨는 것을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해가 참 아름답군요.”
“저에게는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아요.”
“그러면요?”
“삶이 너무 감동적이고 눈물겹게 아름답지 않나요? 저렇게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아름다운 삶을 어떻게 그냥 살수가 있나요?”

그걸로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대화는 끝이 났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에 감동을 받은 나는 더 이상 짓궂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역시 삶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그 뒤로 그녀와 더 이상의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그날의 대화가 아직도 이렇게 생생히 생각이 나는 것은 그날의 대화에서 받은 감동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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