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어떤 탤런트의 자살 소식을 듣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 또한 우리나라의 자살사망률이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다는 통계가 발표되기도 했다.
왜 이처럼 죽음을 택할까. 개인의 사정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욕심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더 낫다. 거꾸로 죽고 싶으면 살고 싶은 욕망도 있게 마련이고, 죽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도 있다. 그 이유는 죽는 용기를 가지고 열심히 산다면, 오히려 더 좋은 계기를 마련하게 되기 때문이다.
죽지 못해서 산다는 말이 있지만, 그래도 저승보다는 이승에서 뒹구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한다. 본인은 죽음으로서, 모든 것을 끝내고 단절하겠다는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하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와 고통을 준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E.뒤르켐은 자살을 애타적 자살. 이기적 자살. 아노미anomie적 자살. 숙명적 자살로 구분하였다.
이 중에 이기적 자살은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지 못함으로써 일어나게 되는 것으로 보았고, 아미노적 자살은 사회의 규범이 상실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개인의 방향감각상실, 안정감의 소실消失에서 생기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아미노적 자살은 어떤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관. 도덕기준을 잃은 혼돈 상태, 불안감. 자기 상실감. 무력감 등에서 일어나는 자살이다.
누구든지 자기 상실감이 커지면 커질수록 모든 것을 잃게 한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가장 위험에 빠트리는 것이 무력감이고 자기 상실감이다. 그래서 신분에 관계없이 삶에 대한 의욕을 잃으면 자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자살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한 아노미적인 자살이다.
누구든지 살면서 풍족하게 살기는 어렵다.
부족하게 사는 것이 삶의 이치이고 순리다. 넘치는 것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도 있다. 사실이 그렇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살아온 것은 부족함의 미덕이었다. 산동네 판자촌에서 살면서 연탄 한두 장을 양손에 들고, 날라다가 때고, 하루하루를 살던 시절이 있었다. 헤진 양말을 꿰매서 신던 시절이 있었다. 시래기죽을 먹던 시절도 있었다.
산나물을 뜯어다가 죽을 쒀먹던 시절이 있었다. 추수가 끝난 다음에 배추밭에서 누런 겉잎을 주어다 먹던 시절도 있었다. 미군부대 짬밥을 끓여서 먹던 시절도 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을 흘리게 되고, 한 그릇의 자장면 값도 없었던 어머니를 생각하게 된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허기 때문에 어머니를 찾아 나서던 시절이 있었다. 학교수업 후에 책 보따리를 허리에 동여매고, 시장 난전으로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시장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그날은 정말로 행복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허기진 나의 눈빛만 보고도 곧장 자장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늘 한 그릇만을 주문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게눈 감추듯이 그것을 먹어치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장면을 한 그릇만 주문하는, 그 깊은 뜻을 오랜 뒤에야 알게 되었다. 배가 부르셔서 그렇게 하시는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자장면 한 그릇 값이 없는 날에는 시장에 오시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을 모르고 시장에 안 오신 날에는 집에 가서 심한 투정까지 부렸다. 어머니는 어떻게든지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머리에 이고, 한 나절이나 걸어서 오셨기 때문에 시장하기는 나보다 더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너무나 부끄러워 목이 메여 울음이 왈칵 목구멍으로 치솟는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용할 양식을 별 어려움이 없이 얻고 살아간다. 오히려 지금은 마음의 양식이 부족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자살을 한다.
누구든지 물욕 때문에 허황된 것을 꿈꾸고,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들에 핀 백합처럼 하늘에 나는 새처럼 거두지 않아도 일용할 양식을 준다. 그 범위 속에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행복은 작은 것에 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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