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수들의 현주소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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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수들의 현주소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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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며 가르쳤던 그 세월(1982년-2004년)

^^^▲ 베네딕토16세 교황님 80세 생신을 축하드리는 한국제자 김정희 교수^^^
전남대학에 발령을 받고 만 일년이 되었다.

80년대 군부독재 정권치하에서 한국사정에 밝지도못한 이 풋내기 여교수가 데모진압을 위해 명령에 살고 죽는 의경들과 극한 대립과 투쟁꼴이 노련한 교수들의 눈에는 어설프기만 했고 위태롭게만 보였다.

측근 교수들은 조금 평정될 때까지 잠시동안만 독일에 다시 나가 있다가 돌아오도록 권고하였다.

그러한 교수들의 권고와 아욱스부르크(Augsburg)대학 스테판 호른 교수의 배려가 있었기에 나는 귀국한지 2년 반만에 객원교수 신분으로 다시 독일 아욱스부르크 대학에서 연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공부하는 것 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독일 아욱스부르크 대학에서 6개월을 보내고 1984년 2월 말 귀국하였다.

다시 광주로 돌아왔을 때는 그 사이에 전남대학교 학생회관 건물에 진달래꽃으로 장식된 친북적 벽보가 걸려 있을 정도로 사뭇 달라진 분위기이었다.

최루탄 장갑차와 군대는 학교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땅바닥에 그려진 미국 성조기가 오가는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히고 있는 상황을 보면서 교수들은 굳게 입다물고 방관자로 살았다.

전대 5.18광장 앞을 지나가던 미국인 선교사 두 젊은이가 그들의 짓밟히는 성조기를 바라보고 묵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기도 했다.

미국학생들이 우리 태극기를 짓밟고 간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학생들에게 옳고 그름을 식별할 능력을 길러주고 가르쳐야 할 지성인들이 두려워서 할 말을 잃고 입을 닫았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지나날 6.25전쟁 후 우리가 미국의 도움을 받고 살아남은 것을 생각한다면 또 미국으로 이민간 수많은 한국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울분이 터질지라도 미국의 성조기를 짓밟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고 말해야 했다. 어찌되었든 6.25 전쟁후의 한국은 미국의 도움을 받고 살아 남았다.

그뿐이랴, 60년대 이후 한국대학들의 지적 자원은 거의 절반 이상이 미국에서 공부한 교수들의 두뇌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당시 한국의 대학들이 미국교육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그것에 의존해서 운영되었던 것도 인정해야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도 우리와 비슷하게 미국 원조를 받았다. 70년대 서독 베르린 광장 벽보에 대조적으로 그려진 두 나라 대통령의 모습, 예컨대 미국 동전 푸대를 쏟아 붓는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과 그것을 감지덕지 껴안고 고마워 하는 아덴나워 독일수상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다.

독일 학생들은 치욕스런 벽보를 보면서 찢지도 떼지도 않고 묵묵히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이 비록 전쟁의 적국이었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재건할 수 있었다는 그 사실을 인정한채 감사하였다. 그러하듯 독일 학생들은 합리성과 효율성을 따지며, 정치와 도덕성을 분리하는 것으로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따졌다.

독일 학생들은 나에게 물었다."왜 한국 학생들은 정치와 도덕성을 구별하지 않고 무조건 반미주의인가?" 그 물음에 대해 할 말을 잃은 나 자신이었다.

모처럼 어렵게 얻어낸 대학가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주사파 데모학생들의 비이성적인 행동 때문에 또 다시 박탈되지나 않을지 하는 우려와 걱정이 컸다.

데모학생들은 무엇이 진정 인간의 참 자유인지 그리고 그러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선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다만 자유는 투쟁을 통해서 쟁취해야 한다는 정치적 자유만을 부르짖게 되었다.

남북의 분단상황에서 정치적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다고 투신하고 있는 그들의 용기와 젊음의 패기에는 감탄할 정도록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생명을 경시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투쟁방식은 용납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투쟁방식이 너무 한시적이고 유아적이었기에 방관할 수만은 없었으며 그리고 일방적으로 그들 편에서 그들의 주장만을 옳다고 편들 수 없었다.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에로의 해방이 아님을 역설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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