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은 아름답고 슬픈 역사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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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은 아름답고 슬픈 역사의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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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은 우리나라에서 7번째 큰 섬이고, 가장 좋은 쌀을 생산하고 있다.

 
   
  ^^^▲ 교동향교.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다.
ⓒ 박철^^^
 
 

비가 주룩주룩 온다. 이제 벼가 패는(出水) 시기이다. 물이 가장 필요한 때에 하늘이 농부의 마음을 알고 비를 보내주신다. 집집마다 “내일은 아무래도 물을 대야지 안 되겠어!”하며 걱정했었는데 어제 저녁부터 제법 많은 비가 온다.

교동은 우리나라에서 7번째로 큰 섬이다. 교동은 사람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섬이라고 하니까 시골학교 운동장만한 줄 아는 모양이다. 교동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마다 다 놀라는 것은 교동이 이렇게 큰 섬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교동에 들어오면 일단 섬 같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너른 벌판이 끝없이 펼쳐진다.

 

 
   
  ^^^▲ 교동향교 가는 길에 서있는 각종 비문.
ⓒ 박철^^^
 
 

교동에는 전윤서(全允序)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학교인 향교(鄕校)가 자랑거리의 으뜸이다. 서울과 개성을 지키는 길목에 위치한 까닭에 수군(水軍) 제도가 발달하여 300년간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지 역할을 해왔다. 교동은 본래 3개 섬으로 이루어졌었는데, 고려시대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둑을 쌓아 연결하고 흙으로 메워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강원도와 경기도에서 한강을 따라 빗물에 떠내려 온 토사(土砂)가 섬을 이루게 되었고, 그걸 개간하여 만들어진 농토이기에, 땅이 비옥하여 교동에서 생산한 식물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특히 교동 쌀이 유명하다. 교동 전체가 청정지역이다. 공해가 없고 물이 오염되지 않아서 양질의 쌀을 생산할 수 있다. 교동 쌀로 밥을 지어 먹어본 사람들은 그 맛에 반해 다시 교동 쌀을 찾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다.

 

 
   
  ^^^▲ 대룡리 빈집. 담쟁이 덩굴이 정겹다.
ⓒ 박철^^^
 
 

교동에는 두 개의 큰 저수지가 있다. 고구리 저수지와 난정리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의 규모가 워낙 방대하여 교동 전체 논에 물을 공급해줄 정도의 수량을 담보하고 있다. 아직 경지정리가 되지 않은 곳이 일부 있지만, 경지정리가 모두 이루어지면 가뭄에 물 걱정을 안 해도 될 정도로 농업용수가 확보되어 있는 셈이다.

교동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았을 때에는 2만 명 가까이 살았다고 한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일만 명 가까이 살았는데, 소위 산업화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인구가 도시로 빠져나가 지금 3800여명 정도가 살고 있다. 내가 사는 지석리만해도 80년대 말 160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102가구만 살고 있다. 80년대만해도 500명 정도 모이던 지석초등학교가 이제 전교생이 40명밖에 되지 않는다.

 

 
   
  ^^^▲ 오리논에서 오리가 논에서 김을 매고 있다.
ⓒ 박철^^^
 
 

교동에는 고(高), 인(印), 전(全), 안(安)씨가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으나, 지금은 이른바 5대 성씨로 황(黃), 한(韓) 전(全), 권(權), 방(方)씨 등을 꼽고 있다.

쌀 외에 교동의 특산물로는 조선시대의 진상품인 숭어, 민어, 농어와 새우 그리고 영국 왕실에까지 명성을 떨친 화문석(花紋席)이 알려져 있다. 6,70년대 만해도 교동 사람들은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다고 한다.

6.25전쟁 때 3년 대(大)가뭄이 있었는데 그때 생긴 말이 “3년 숭년(흉년)에 모이꽈네(뭐있겠나)”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6.25전쟁과 휴전이후 연백에서 온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었고 가뭄은 계속되고, 그때 만해도 저수시설이 확보되지 않아 모든 논이나 밭이 비가 오지 않으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 필자가 담임하고 있는 지석교회. 교회마당에서 연백이 한눈에 펼쳐진다.
ⓒ 박철^^^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도회지에 나가 날품이라도 팔아 먹고살기 위해, 그리고 벌어서 자식들 공부라도 시켜야 하겠기에 많은 사람들이 교동을 빠져나갔다. 80년대 중반부터 대형 관정(管井)을 해서 지하수를 끌어들이고, 기계화 영농을 하면서 지금은 어지간히 살만큼 되었다.

농사규모도 가호 당 보통 1만평 정도 짓는다. 상당한 규모이다. 그리고 땅이 기름지고 허벅져서 벼 생산도 타 지역에 비해서 월등하게 많이 생산된다. 많은 사람들이 교동을 어떻게 가면 되냐고 물어온다.

어렵지 않다. 일단 강화까지 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창후리 선착장으로 오면 된다. 창후리가 종점이다. 자기 차를 이용하여 오시는 분들은 강화시내를 계속 직진하여 창후리 선착장까지 오면 된다.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면 된다.

 

 
   
  ^^^▲ 날씨가 좋으면 개성 송악산 자락이 보인다. 망원렌즈로 찍은 것이다.
ⓒ 박철^^^
 
 

창후리에 도착해서 ‘교동 가는 배 어디서 타냐?’고 물어볼 필요도 없다. 교동 가는 배 외에는 없다. 그런데 교동에 오실 때에는 필히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와보시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여기가 바로 북한하고 접경지역이기에 군부대에서 민간인 통제가 이루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교동을 들어오기 위한 통과의례(通過儀禮)라고 생각하면 된다.

6년 전부터 인사리를 중심으로 오리쌀농사가 보급되어 처음에는 6가구에서 지금은 그 규모가 27가구로, 경작면적도 10만평 규모로 늘어났다. 인사리를 방문하면 이 논 저 논에서 오리가 꽥꽥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청정지역에서 그것도 친환경농법에 의해 생산된 쌀이니 그 품질을 두 말 하면 잔소리다. 오리쌀작목반 회원들이 정농회(正農會)에 정식으로 가입하여 꾸준하게 교육을 받고 농사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 교동에서 바라본 석모도 풍경.
ⓒ 박철^^^
 
 

교동은 사시사철 그림이 전혀 다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풍경이 철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어 교동을 올적마다 사뭇 다른 색깔이다. 교동의 명물 화개산(花蓋山)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정상에 올라가면 사방이 확트여 바다에 둥실 떠 있는 것 같은 서해안 작은 섬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그리고 해무(海霧)가 없는 날에는 개성의 송악산자락이 보일 정도이다. 가을철에 화개산에 올라가 교동의 너른 들판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그 넓은 들판이 황금물결로 춤을 춘다.

또 최근에는 17개리 동네마다 게이트볼 장을 만들어 온 주민들 사이에 게이트볼 붐이 일어났다. 일이 없는 농한기나 짬짬이 젊은 사람들이나 노인들이 스틱을 잡고 게이트볼을 한다. 교동은 물 좋고 공기가 좋아 장수하시는 분들이 많다. 동네마다 인심이 후덕하고 젊은 사람들이 노인공경을 잘하고 사람살기 좋은 마을이다.

 

 
   
  ^^^▲ 인사리 물꽝. 누가 그물을 쳐놓았다. 가물치라도 들었을까.
ⓒ 박철^^^
 
 

교동사람들은 교동을 교동민국이라고 한다. 그만큼 교동이라는 정체성이 분명하다. 지금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해 있지만, 말씨도 음식문화도 풍습도 강화와 조금 다르다. 연백과 가까워서 6.25전쟁 이전 만해도 연백하고 교류가 많아 문화나 풍습이 황해도 연백에 더 가까운 편이다.

교동에는 북한에서 피난 온 분들이 많이 살고 계신다. 전쟁마당에 잠깐 다녀오겠다는 생각으로 바다를 건너오신 분들이 50년이 넘도록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못 가고 계신다. 불과 10분만 배를 타고 가면 자기가 태어나고 부모형제가 계신 정든 고향을 못가고 있으니, 그 분들의 속내를 어느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그 분들 연세가 60이 다 넘으셨다. 이미 많은 분들이 이 제나 저 제나 고향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다 세상을 떠나셨다.

 

 
   
  ^^^▲ 대룡리 시장풍경. 영화세트장 같은 분위기이다.
ⓒ 박철^^^
 
 

교동을 오실 분들은, 교동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교동을 단순히 섬마을이라는 가벼운 낭만으로만 이해서는 안된다. 교동은 왕조시대에는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연산군(燕山君), 철종(哲宗),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이 귀양 와서 살았던 곳이다. 철종의 잠저소(潛邸所)의 옛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민족의 아픔과 전쟁으로 빚어진 상흔(傷痕)을 어루만져 주어야 할 곳이기도 하고, 가난을 대물림하면서도 그러나 억척스럽게 땅을 개간하여 옥토를 이루고 너른 들판을 만들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든 교동사람들의 저력(底力)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아름답고 슬픈 고장이다. 나는 교동에서 7년을 살았지만 아직 완전히 교동사람이 되지 못했다.

 

 
   
  ^^^▲ 버스가 한가로이 신작로를 지나가고 있다.
ⓒ 박철^^^
 
 

작은 누룩이 밥알 알갱이 사이에 스며들어 발효되어, 마침내 잘 익은 농주가 되는 것처럼, 나 또한 교동의 역사와 정서를 내 몸 깊숙이 체득(體得)하여 교동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교동민국의 한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교동이 남과 북을 잇는 민족화해의 징검다리가 되는 꿈을 소망한다.

 

 
   
  ^^^▲ 교동가는 길^^^  
 

교동 가는 길

교동 가는 길은 김포에서 48번 국도를 이용하여 강화읍을 지나 신봉리 301번지방도에서 좌회전하여 계속가면 외포리와 창후리 선착장의 갈림길이 나온다. 석모도를 가려면 외포리 를 이용해야 하나 교동을 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을 이용해야 한다.

48번 국도는 김포를 가로질러 강화대교와 강화읍을 거쳐 이땅의 끝 인진나루로 연결되어 연백과 개성으로 연결되어야하지만 분단의 벽으로 인해 인진나루 가기 전 신봉리에서 창후리로 꺽어야 한다.

창후리에는 화개해운 대합실이 있다. 이곳에서는 교동까지 화개호가 운행 되는데 겨울과 여름의 출항시간이 틀리나 보통 7:30분경에 첫 출항하여 해질 녁인 오후 6-7:00가지 운항한다.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므로 인적사항을 적어야 하고 때로는 군인들에 검문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 외포리처럼 번잡함이 없고 조용한 여행과 문화를 감상하려면 교동이 적합하다.

교동 창후리선착장
교동까지는 약15분 정도(썰물 때인 경우에는 30~40분 소요) 걸리며 승용차(요금 편도 13,000원, 사람 750원)를 싣고 갈 수 있는 훼리호가 운행된다. 서울 신촌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강화행버스를 타고 강화읍에 오면 강화터미널에서 창후리 가는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창후리 선착장 연락처 : 032-933-4268, 6619)

더 자세한 정보는 교동사랑회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http://www.gyodong.net/ (교동오리쌀 작목반 안병집 032-934-5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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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짱 2003-07-19 22:54:06
사진구경 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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