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에서 본 마르크스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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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에서 본 마르크스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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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샘의 신좌익 사상비판 (3)

^^^▲ 칼 마르크스^^^
A. 왜 마르크스를 다시 비판하는가?

사람들은 경제생활을 하며 살아가면서 그럴 것이다.

“이상하다. 저 사람은 대학을 제대로 졸업하지도 못했는데 왜 저렇게 돈이 많은 재벌일까?”

실지로 필자가 아는 어느 동대문의 원단상은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는데 몇백억대의 자산을 가진 희안한 자본가가 있다.

“이상하다. 저 친구는 그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왜 저리 직업도 없이 빌빌 거릴까?” 물론 모든 사람들의 경제생활이 위의 기준으로만 해석되지는 않는다.

겉보기에는 괜찮은 대학을 나오고 또 사회에서 노력한 만큼 경제생활도 성공하지만 돈을 번다는 것을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있어서 좋은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만 가지고는 사실상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경제라는 부분은 오늘도 지구 어디서나 각 경제 연구소에서 그리고 일류대학의 경제학자들이 그 원인과 요인, 결과를 여러 가지 경제 패러다임과 기준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어느 누구도 제대로 완벽하게 분석해 낸 사람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제의 <좌파 교과서의 원론," 칼 마르크스"의 저서들>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을 오래살고 돈이 많은 분들은 아직도 이 일류경제학자들이 분석해내지 못하는 부분을 체험으로 경험으로 얻어서 비록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돈이 많은 경우도 허다하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그래도 설명을 해 내려고 오늘도 경제학자들은 대학에서 연구소에서 날밤을 새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파 지식인 입장에서도 새로 비판할 것은 비판을 해보자 하는 것이다.

어떤 돈이 많은 재벌은 그런 경제학자들을 보고 필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종이에 파묻혀만 있는 멍텅구리들..!” 이 말이 도무지 필자는 학문적으로 정립이 되지 않지만 대개 좀 고상한 표현으로 “페이퍼 도그마의 오류”라고 부르기로 했다.

돈은 교환가치가 있고 이 교환가치를 잘 다루면 인간 욕망의 일부(좋은 표현으로는 인간의 기본권리)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므로 무척 중요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시장경제체제의 국가에서 살면 그러하므로 이 돈과 관련된 "富에 관한 연구"가 사실상 경제학과 경영학인데 정치학이나 사회학, 법학을 다루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기본적으로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사상누각 아니겠는가?

얼마 전 “부의 미래”라는 책을 쓴 앨빈 토플러가 한국의 유명 정치인을 방문하여 무슨 아양을 떤 일도 있는데, 예전에 그의 책을 읽어 보고 잠시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에 다녀와 본 적이 있는 필자로써는 웃음만 나오는 느낌이 있다.

토플러는 미래학자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사회과학의 여타학문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그 증거를 오래 전 나는 그가 쓴 “권력이동”이란 책으로 알수 있었다. 그 책의 맨 뒷부분에는 수많은 각 부분의 참고목록이 들어가 있지만 실지로 그 목록의 저서들을 읽고 당신이 직접 토플러와 대화를 해보라. 그 사실이 증명될 것이다.

그는 기자로 출발한 사람일 뿐이다. 그 전에는 이 사람도 유물론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다만 당시 뉴욕의 경제 발전상이 뒤떨어진 우리 눈에 엄청날 정도로 전문적인것 같아서 무슨 토플러가 대단해 보일 뿐이지, 뉴욕에서 그를 인정하는 일류 경제학자들은 거의 없다.

대충 뉴욕에서 살고 제대로만 세상을 보아도 토플러 정도는 누구나 하겠다는 생각이 들수 있다. 그것을 무슨 예전 김대중씨에게 대충 아부나하고 아들이 자살인지 타살인지 당해도 찍소리 한번 못하는 현대그룹에서는 미래학자라고 초청하고 대우하고 아양을 떨었으니 우리의 지적 풍토가 얼마나 한심 했던가?

차치하고, 어떻든 좌파의 원론 마르크스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있는것도 사실인데(일반적으로 말해서...) 솔직히 말해 좌파의 문제점을 제대로 알고 지적하려면 적을 제대로 알아야 하듯, 이 마르크스도 결점들도 제대로 알아야만 제대로 된 우파 아니겠는가?

우파 자유주의자라고 해서 상대방 적인 마르크스도 제대로 모르고서야 무슨 지성의 자격이 있다 하겠는가? 그런데 좀 유감스럽게도 많은 우파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읽는다는 것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시기도 하니 필자는 아쉽다. 지금이 무슨 옛날 모든 사회를 군대식으로만 운영하는 사회가 아니라고 한다면(물론 군대조직의 장점도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우파에서도 좀 부끄러운 일이지만 마르크스를 제대로 모르는 우파인사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고, 오히려 지금은 이를 우리 입장에서 제대로 아는 것도 중요하다.

또 마르크스가 누구나 대학공부에서 경험했듯 한번 빠져들면 제대로 비판을 잘 하기도 매우 어려운 책인 동시에 비판을 하겠다거나 알고 싶다고 해서 읽기는 읽는데 제대로 읽기가 그리 만만한 책도 아니다(원론). 그래서 어린 학생들이 한번 읽다가 저도 모르게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80년대 선배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당시 비판하기위해 읽을려고 가진 자본론을 “가지고 있다고만 해서 안기부에 잡혀가는 사태”도 있었다.

마르크스를 읽었다고해서 모두다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는 사회주의자다” 라고 공언을 해놓고 또 아니니까 “나는 우파로 전향했다”> 라고 하는 한심한 사람들을 보면서 필자는 그 전향의 사회적 책임성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지, 사실상 이것도 정말 전향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가려내기도 사상만으로 볼 때,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빨갱이 치고 “나는 빨갱이다”라고 이마에 써붙이고 다니는 지식인들 없다.)

모든 정보가 공개되어있는 이 시기에 필자는 솔직히 “열린 사회”를 말한 우파 사상가로 불리는 “칼 포퍼”도 좀 이제는 비판하고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너무 우파사상의 깊이에 무지한 측면도 있고 해파리 마냥 무른 측면도 좀 있다. 노무현의 당 이름이 “열린 우리당( 사실상 닫힌 뚜껑당)” 아니었는가?

그래서 오늘 우리가 느끼기에 열린 우리당계열 정치인이나 한나라당도 우파는 우파인데 사실상 좌파의 숙주노릇을 한 한심한 현상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왕 열린사회는 열린사회이니 필자는 그 속에서라도 우파 자유주의, 책임 민주주의 젊은이답게 비판할 것은 나름대로 확실하게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칼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전6권^^^
B. 칼 마르크스, 그는 누구인가?

필자는 그를 인간의 윤리기준이 아닌, 기독교인으로써 볼 때 악마로 본다.

물론 인간기준의 윤리로 마르크스를 본다면 하등 마르크스 당시의 시대상이나 사회적 배경, 마르크스 자신을 들여다 보아도 윤리적으로 별문제가 없다.

그리고 모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들도 처음 혁명가로 나설 때 모두 다 훌륭한 휴머니스트로 자신을 착각하고 노력하며 출발을 한다.

그래서 마르크스 자신은 물론, 지구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속은 것이었다.

1848년 독일 트리어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고등학교 졸업 논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은 인류의 이익과 자기 완성이다. ” 이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좌, 우를 다 떠나서 이보다 정치적으로 훌륭한 발언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가 곧바로 인류의 이익을 위한 혁명가로 변신한 것은 아니다.

헤겔철학에 몰두했던 그는 처음에는 주로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사회와 역사를 보았다. 이는 당시의 독일로 본다면 우리 젊은이가 무슨 율곡사상을 공부하듯 공부를 제대로하는 젊은이 다운 지극히 일반적인 태도일 뿐이다.

그러던 중 (라인신문)편집장으로 일하게 된 마르크스는 산림도벌법이나 포도재배농민들의 문제, 자유무역과 보호관세에 관한 논쟁에 휘말리면서 점차 경제적 문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자유, 평등, 우애가 새로운 당시의 시대정신으로 떠올랐지만 , 당시 현실에는 수많은 대중들이 빈곤과 질병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으며 무지와 타락을 강요 받았다. 그 무렵 대부분의 사회사상가들이 고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또한 이런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불면의 나날을 보냈다.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철학, 도덕, 법률, 이데올로기등 외관상 한 사회의 성격과 발전방향을 규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토대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깔려 있음을 간파한 영악한 마르크스는 그 이후 줄곧 경제문제에 대한 연구로 파고 들었다.

맑스를 알고 있던 한 친구의 표현처럼 “그는 종종 책의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연구의 기념비가 바로 그의 (자본론)이다. 맑스는 단지 연구를 하고 두꺼운 책을 쓰는데 인생을 바친 사람이 아니다. 지적성장의 과정에서 그는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두루 섭렵하면서 , 당시에 이미 자생적으로 등장했던 사회주의자들및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

많은 그동안의 한국지식인들이 마르크스의 언어로 표현된 사상에만 몰두했는데 비해 솔직히 필자는 마르크스 자체도 자체이지만 이 부분에 관심이 많다. 요즈음은 사상원론만 겨우 보는 예전의 원시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왜냐하면, 이들은 무슨 사상가도 아니며 소위 젊고 어린 시절의 “룸펜”이라는 단어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말로하면 공부는 안하고 술 먹고 담배피고 마약하는 당시 프랑스의 문제아들과 고등학생 격이다. 그래서 항상 이들은 귀족사회의 장점들은 빼고 기존 윤리의 장점들을 빼고서 항상 그들은 잘못 되었다, 빼앗아야 한다는 진보의 탈을 쓴 논리의 귀결을 맺는다. 인간사회는 진보하지만 과연 그들만이 말하는 진보가 진보일까? 이 어린것들로 출발한 이들이 무슨 대 사상을 논하겠는가? 맑스는 이론적 정치적으로 매우 정교하고도 정렬적으로 그들을 위해 봉사했을 뿐이다.

1848년 혁명을 비롯하여 실천적인 운동에도 마르크스는 깊숙이 개입했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분석의 결론으로써 자본주의의 역사적 의의와 근본모습을 당시로써는 나름대로 분명히 해명했을뿐만 아니라 이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나갈 주인공은 노동자계급뿐이라는 점을 밝혔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는 <자기해방사상>이 그의 정치적 결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기 전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많은 일부의 독립운동가들이 당시에 지금처럼 선진적이고 전향적인 비판 검토없이 이 마르크스의 말에 속고 넘어갔던 것도 사실이고 오늘날도 좀 덜떨어진 사람들이 그러한 면으로 보이기도 한다.

쉽게 말해서 <자기해방>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과연 인간은 오로지 자기해방만으로 삶을 꾸려갈 수 있는가?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설명은 인간이 갓난아기 때 엄마젖을 먹는 유아기와 성장하고 생활을 해 나가면서 부딪히는 사회내부에서의 인간상호작용 그리고 늙고 소진해서 자식의 원조를 받아야만하는 불쌍한 노인들을 절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여하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비롯하여 (독일 이데올로기)(철학의 빈곤)(공산당 선언)(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그룬트리세)라는 저서등을 남겼다.

^^^▲ 자본론^^^
C. 자본론이란 무엇이며 그 문제는 무엇인가?

마르크스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영향력을 획득한 것은 무척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다.

(자본론)에서 주요한 분석모델로 삼았던 영국에서 그는 30년을 살았지만 당시 영국노동운동은 맑스의 주장에 사실상 무관심한 편이었다.

그의 필생의 역작 (자본론)의 운명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론)을 독파한 노동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마르크스에 대한 반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본론)에 대한 비난, 조롱, 무시, 간단한 언급들은 무척 많지만 실상(자본론)을 꼼꼼히 읽고 심층적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양상이 오늘날까지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본론)의 의의와 생명력은 결코 죽지 않았다고 하며 역설하는 좌파들도 흔히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자본론)을 읽고 비판하기에 앞서 우선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요즈음도 언린 학생들에게 있어 여전히 보기 드물다. 물론 이렇게 된 바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세권으로 이루어진 자본론은 펼쳐든 순간 그 내용의 방대함에 압도당하기 십상이다.

차분하게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 이해관계”의 차이도 분명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케인즈같은 일급 경제학자도 (자본론)을 읽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케인즈가 좋은 말로 투자(합법적일때) 나쁜말로 투기(비합법적일때)로 돈을 벌어들인 최고위층 인사였으며 엘리트주의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럴법도 하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라면 당연하게도 (자본론)의 주장이 혐오스럽고 끔찍하게 여겨질 것이다.

반면 맑스주의 전통이 힘을 발휘했던 과거 유럽노동운동에서 (자본론)은 소위 좌파들과 노동자들의 성서로 추앙받았다.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이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왜 고통을 겪는지, 그 뿌리를 파헤치고 해결의 방도를 시사해주는 이 책만큼 가치있는 저작도 사실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자본론은 철저히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씌여 있는 책이다.

다른말로 이 뜻은 유물론적인 시각만으로는 절대로 인간사회의 전체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데 마르크스의 모든 근원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지적하려고 해도 솔직히 동양사상에 많은 해결시사점이 있지만 당시의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에 그들이 그것을 알 수가 있겠는가?

정통 기독교관을 가진 사람들이 보기에도 유물론은 악의 화신이다. 그렇기에 마르크스 자신도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자본론이 단지 선동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략 훑어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듯이 (자본론)은 유물론적인 시각이지만 당시 마르크스가 접할 수 있었던 인류사회의 모든 지적 발전의 성과물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의 분석에서 누락 된 것, 불명료한 것, 보완될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우파의 애덤 스미스를 비롯한 많은 위대한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맑스 또한 “시대적 제약”이라는 한계를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이 저작은 제1권에서 “자본의 생성과정”을 분석하고 제2권에서는 “자본의 유통과정”,을 다루며 제3권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총 과정”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추상적이고 본질적인 측면에서부터 상품의 분석, 생산과정, 어떻게 잉여가치가 창출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자본의 축척이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기초적인 분석이 전개된다.

유통과정을 거쳐 자본의 회전이 이루어지는 메커니즘이 연구되고 생산과정과 유통과정을 통일적으로 파악하면서 생산영역에서 창출된 잉여가치가 각 사회계급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되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이 어떻게 격화되는지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솔직히 필자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과연 변증법적으로만 해석된 구도가 실제 현상에서 타당하느냐 하는 문제다.

즉, 각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어떻게 분배되는가? 하는 문제만 보더라도 오늘날 인터넷 열린 사회의 계급을 어떻게 설정하고 분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전혀 해답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고 사실 인터넷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방어하자는 군대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렇기에 마르크스의 오류를 아는 좌파 지식인들이 오늘날 새로이 그들을 옹호하기 위해서 “통제사회”를 말하면서 “질 들레즈”처럼 떠들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는 결과평등의 몰락에 대한 대안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학의 창시자 오귀스트 꽁트가 말하거나 프랑스 혁명 당시의 루소나 홉스, 몽퉤스키외가 말한 생물 유기체처럼의 “성장”은 아니지만 경제부분에서의 발전과 그에 대한 원동력이 없이는 절대로 해결할 수가 없고 그것은 맑스가 말한 유물론 구도의 페이퍼 도그마의 오류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 심리로 밖에 말할 수 없는 “참다운 자유” 즉 우파 사상의 대가 하이예크가 말한 “자생적 질서”로 밖에는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마르크스를 악이용한 레닌이나 이후의 공산정치가들에만 하이예크의 치명적 자만을 말할 것이 아니라 사상적으로 마르크스에게도 치명적 자만을 꼬집어야 할 것 아닌가? 자본론의 핵심은 길게 설명할수 없지만 대략 다음으로 요약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는 일정한 상품의 가치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 즉, 자본가가 그에게 임금으로 지불할 것 이상의 가치를 새롭게 창출한다. 이 부분은 자본가가 공짜로 가져가는 몫이다.> 라고 했는데,

이 점은 맑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비밀” 이라고 일컬어 지기도 했으며 이 부분의 해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단지 경제적 분석의 의미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윤리적 비판의 근원적인 핵심 문제가 제기 되는 것이다.

문제는 사실상 이 부분이 인간의 자유욕망과 권리의 문제를 보는 경제분석을 넘어서는 시각으로써 이 잉여가치 창출을 마르크스는 비판적으로 보기에, 이후 사회, 공산주의자들은 결론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나 잉여가치가 없는 도그마데로 간다면 인간 유기체의 성장이 아니라 경제성장의 동력은 있을 수 없다. 자유 시장경제에서 마르크스가 당시 지적한 모순데로만 자본이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을수 없는 생산방식---생산의 무제한 증가, 생산을 위한 생산, 노동의 사회적 생산력의 무조건적 발달로 향하여 돌진하는 생산방법---과 끊임없이 모순하게 된다.고 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자본가들과 기업가들을 제거하면 그 모순이 개선되는가?

여기에 유물론적 경제분석을 정치논리에 끌어 들이는 맑스의 함정이 있다. 절대로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도(수요와 공급원리)에 의해서 제어되기도 하고 미국의 대공황의 경험을 거치기는 했지만 케인지안같은 우파 사상으로도 공공부문에서 얼마든지 제어 조율될 수 있는 것이다.(필자는 케인지안학파도 경제 사상사에서 우파적 좌파로 본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마르크스가 생산방식을 소규모 수공업(자본과 노동, 소유가 일치하는 형태)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대규모 공장생산만 자본주의의 끝으로 보았던 문제가 있다. 이 좌파 시각으로만 본다면 불루,화이트 칼라 할 것없이 오너나 자본가가 아닌 이상 모두 노동자다.

그러나 이 들이 이 메커니즘 안에서 계속 그 소유자만을 위해 봉사하는것도 아니고 인터넷 시대의 소규모 자기 소유 기술 경영은 도무지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처럼 국가전체 경제를 운영한 예가 독일의 나치스하에서 사실상 경험했던 것이 사실이다.

애국정의국가를 외쳤던 나치스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 계획, 통제경제를 실시했다. 일주일에 한번의 배급에 의한 몇 개의 달걀과 고기로 사람들은 살지 못하고 아무리 국가가 배급(공급)을 해 주려고 해도 자유생산성이 없으면 한계에 부딪힌다.

국가가 공장을 강제로 운영하고 생산성을 강제로 높힌다고 해도 그 소유와 통제의 모든 권력이 자신이 아닌 엉뚱한 존재에 있으면 누가 열심히 신나게 일할 것인가? 결국 엄청난 경제문제를 독일은 이미 경험했고 무너진 다른 공산권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잉여가치는 자본가만을 위한 악이 아니라 노동자도 결국 자기가 점점 소유자가 되어 가면서 향유할 자산이기도 하고 경제성장의 심리동력이고 오늘날 우리는 이를 인센티브라는 말로 달리 부르기도 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 <자기 노동의 결과물로써 산출된 재화는 자기의 소유물로 간주된다는 법칙. 자본주의 사회는 이 법칙으로부터 출발했으나 자체의 논리에 의하여 이 법칙이 해체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소유권 자체를 프롤레타리아계급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자본가에게만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눈에 보이기만 하는 유물론적 분석의 논리일 뿐이다.

이 도그마에만 빠지면 맑스나 헤겔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서도 오히려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는 절대로 마르크스가 이야기한 원시 공동체 사회의 자유교환을 설명할 수가 없다. 인간의 자유정신은 원시시대나 맑스시대나 현재나 미래에도 사실상 자기 소유의 물건이라도 각각의 시간에 필요한 더 낳은 가치를 위해 교환을 원하게 되어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 <생산 수단들이 자본가에게 배타적으로 장악되어 있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의 결과가 결코 노동자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하며, 노동하지 않는 자본가들에게 귀속만 된다. 노동자는 자거노트 수레바퀴의 희생양일 뿐이다고 했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자유시장의 주식회사의 이익배분이나 금융시장의 형성, 선물, 노동댓가에 상응하는 급료를 설명하지 못한다.

오히려 요즈음 대규모 노조가 중소규모 오너들 수입보다 높고 귀족노조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대규모 노조간부는 일류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중소기업 사장이 비정규직 사원과 밤샘하며 라면 끓여 먹으면서 판매가 3000만원짜리 기계를 손익분기점도 나오지 않는 1300만원에 덤핑처리를 하려고 전국을 티코타고 돌아다니는 희안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마르크스 이르기를...:<자본주의의 발전은 노동자계급의 고통과 퇴화를 조건으로 해서만 이루어 진다. 더욱 확대해서 본다면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문명발전의 기본패턴자체가 모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있음을 지적했다.

예를들면 노동강도를 낮춤으로써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기계는 오히려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쫒아내는 수단및 노동자를 부품화하는 수단으로만 활용된다.> 고 했는데 이도 인간자체를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마르크스의 오류일 뿐이다.

로봇과 기계가 상용화 되고 노동현장에 배치 되어서 인간이 일할 자리가 없어지기는 하지만 이는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생산력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는 공공부문에서 새 일자리 유도를 한다던가, 교육을 통해서 얼마든지 노동자나 영세업자를 새로운 지식 자본가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인데 현재 필자는 우리도 여기에서는 과도기라고 본다, 하지만 인터넷 소규모 자기 경영이 점점 더 부를 축척해 가는 현상이 설명 되는가?

애덤 스미스는 상인들(부르죠아 계급)에 의한 시장독점의 위험을 경고하고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역사의 진행과정에서는 상인, 즉, 유통부문이 아니라 생산부문 자체에서 자본의 독점화가 이루어진 측면도 있다.

그것은 곧 다수의 중소규모 자본들이 대자본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는 것을 뜻했었고 자유경쟁이 독점적 경쟁으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19세기말 이래 국가와 자본의 직접적 결합이나(정경유착) 일종의 자본가적 공동소유라고 할 수 있는 주식회사의 급증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자본주의의 면모는 크게 변화해 왔는데 이를 이제 다 낡아빠진 쓰레기 유물론 자본론으로만 분석하는 것은 사기고 어불성설이다.

경제행위도 인간이 행하는 행위라면 인간자체의 심리가 유물적인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고 이를 유물적 시각과 변증법적 시각으로 본다는 것은 이미 낡은 쓰레기 사상일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분석해서 이를 혁명하고 고치자는 생각은 결국 정치적인 전제독재체제로 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간이 인갑답게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소유권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이유가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내 자유의지를 펼칠 수 있는 소유권을 가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며 평생을 노동만 하며 살아가라는 보장도 없다. 평생을 노동만 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자기 자유의지에 무지하고 게으른 노예로만 사는 사람일까?

^^^^^^▲ 자본론^^^^^^
D.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제 그들의 치명적 자만을 모르거나 숨기는 사기꾼일 뿐이다. (하이예크를 다시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한 우파 사상가 하이예크는 "치명적 자만"이라는 책을 썼다.

"치명적 자만"이란? 지식인의 이성으로 공산주의사회가 가능하다는 발상이 치명적 오류라는 의미다.인간의 이성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고, 오만한 지식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담고 있으며 사회는 지식인의 이성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생적 질서에 근거해서 발전해야 된다는 것으로 자생적 질서의 대표적인 예로 민법이나 형법같은 법질서, 시장경제질서를 논하고 있다.

자생적 질서에 반하는 공산주의의 댓가는 파멸임을 공산주의가 멸망하기 전에 예언한 그의 안목을 보여주었다. 지식인의 이성으로도 불가능한 사회흐름을 사상의 도둑들이 좌지우지 할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돈으로, 헛소문으로 사건을 희석 시키려는 무모한 짓을 계속하여 도둑들의 논리를 보편화 시키려는, 자생적 질서에 반하는 짓을 이땅의 쓰레기 좌파들도 계속하리라 생각이 든다. "그들은 스스로 함정을 만들면서,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계속 함정를 파고 함정에 깊히 빠져가고 있는 도둑들의 최후의 모습은 뻔하다. 도둑들의 논리에 속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이예크의 아들이 말했다. " 아버지, 지금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요!" 하이에크의 말은 간단했다. " 거 봐, 내가 뭐랬어!"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시대의 이단아였다. 그는 학문적으로 엄격하였으며 겸손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적 세상읽기의 풍조에 영합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맞서기도 했다.

현실이 불확실하지만 일관된 논리로 학문의 업적을 세운 것이다. 뒤늦게 빛을 보는 것은 케인즈의 처방이 이제는 신통력을 잃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주목했다. 어떤 권력이라도 사회와 경제, 개인의 삶에 깊이 개입해 급진적 변화를 시도한다면 불행과 파멸을 불러온다고 경고했다. 내세운 청사진이 그럴싸 할수록 그만큼 위험성도 커진다고 봤다.

하이에크는 90세를 넘는 장수(長壽)를 누리며 파시즘에 이어 공산주의의 몰락도 지켜봤다. 1944년에 펴낸 ‘노예로의 길’에서 “사회주의는 ‘억압과 노예의 평등’을 추구하므로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예언한 하이에크는 소련 붕괴 소식을 듣고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라고 말했다.

하이에크의 ‘노예로의 길’과 ‘치명적 자만’은 자유주의자들의 필독서로 떠올랐다. ‘잃어버린 10년’이 눈앞에 다가온 정권과 국민의 비극도 이와 맞물려 있다. 구체적 인간보다 추상적 관념을 중시하고, 희뿌연 미래에 매달려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는 세계관은 얼마나 위험한가? 위선적 지식인들의 실상을 파헤친 영국 저널리스트 폴 존슨의 말처럼 ‘최악의 압제는 인정머리 없는 유물적 관념의 포학(暴虐)’일 뿐이다.

아무리 하이에크의 논리에도 허점이 있다해도 위선적 지식인들의 궤변에는 특효약이 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최소한 어설프게 세상과 인간을 바꾸려는 집단주의보다는 훨씬 효율적이고 정의롭다는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눈감아준 정치권의 마르크스 사사 마약 중독자들은 무엇인가? 솔직히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기나 지금도 대학별로 제대로 자본론 원본을 읽은 학생들도 많이 없다. 고로 대한민국의 모든 좌파는 번역본이나 본 얼치기 녀석들이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쓰레기를 주우면서도 쓰레기인줄 모르는 추앙적 사고가 생기는 것이다.

노무현과 얼치기 좌파 세력들도 우스웠지만 중도와 마르크스를 옹호하는 지식인은 노무현과 이들 세력들 보다 더 가증스럽지 않는가?

^^^^^^^^^▲ 자본론^^^^^^^^^
Friedrich the Great Dismissed by critics as a free-market extremist, economist Friedrich Hayek is gaining new attention as a forerunner of cognitive psychology, information theory, even postmodernism. A reintroduction to one of the most important thinkers you've barely heard of.

AT A RECENT think-tank luncheon in Raleigh, economist Bruce J. Caldwell chatted with a local lawyer active in Democratic party circles. The man asked Caldwell what his new book was about. "It's an intellectual biography of Friedrich Hayek," replied Caldwell,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Greensboro. He got a blank look. "He was an economist. A libertarian economist."

What an understatement.

Hayek, who died in 1992, was not just any economist. He won the Nobel Prize in economics in 1974. His 1945 article, "The Use of Knowledge in Society," is a touchstone work on the role of prices in coordinating dispersed information. His 1944 bestseller "The Road to Serfdom" helped catalyze the free-market political movement in the United States and continues to sell thousands of copies a year.

Economist Milton Friedman calls him "the most important social thinker of the 20th century." Hayek's most significant contribution, he explains, "was to make clear how our present complex social structure is not the result of the intended actions of individuals but of the unintended consequences of individual interactions over a long period of time, the product of social evolution, not of deliberate planning."

Indeed, Hayek is increasingly recognized as one of the 20th century's most profound and important theorists, one whose work included political theory, philosophy of science, even cognitive psychology. Citing the "proof of time," Encyclopedia Britannica recently commissioned Caldwell to replace its formulaic 250-word Hayek profile with a nuanced discussion more than 10 times as long. Harvard has added him to the syllabus of Social Studies 10, its rigorous introductory social theory course.

Hayek is fairly well known in Britain, where he spent much of his life, because of his influence on MargaretThatcher. In the United States, however, well-educated, intellectually curious people who nod at mentions of Max Weber, Hannah Arendt, or Michel Foucault have barely heard of him.

Politics has a lot to do with that ignorance. Hayek drew on the traditions of 18th- and 19th-century liberal thought, leading critics to dismiss him as a man of the past. He defended competitive markets against the champions of central planning, noting that supposedly "irrational" customs, traditions, and institutions often embody the hard-won knowledge of experience. He advocated cosmopolitan individualism in an age of nationalism and collectivism.

But Hayek turned out to be ahead of his time, not behind it. Arguing with the social engineers of the mid-20th century, he grappled with problems equally relevant to the 21st century. He anticipated today's rage for biological metaphors and evolutionary analysis, today's fragmented and specialized markets, today's emphasis on the legal institutions needed to make markets work, even today's multicultural challen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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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좋아해 2008-03-10 23:27:11

사실 국내의 좌파들은 모두 옛날 일본 번역판이나 본 얼뜨기들이요...
국내에도 심층 마르크스 연구자들이 별로 없어요...
서울대의 모 경제학과 교수는 폐강이 되었지요...
있다면 컬럼비아 대학의 로버트 터커 박사가 세계적인 권위자이지...
동구권에 마르크스 심층 연구하러 간 사람이 동구권 몰락을 보고 전향을 했으니......

권기자님도 알것이요....ㅎㅎ

확실한 연구, 비판도 앞으로 더 해야 될 것이요....
좌파던 우파던 솔직히 너무들 공부안해....

잘보고 갑니다.

고택에서 2008-03-10 23:29:53
좌파니 우파니 모두 경제사상사에서 나온 것 아니요?
그것을 모르고 정치니 사회니, 법이니 떠들어 보아야 다 황이야 !
권기자가 역시 잘 보았어요.....경제부 한다면서요?
생각잘했어요...
자유주의 우파, 나라 살려야지요....

파랗게 파랗게 2008-03-10 23:31:01
로버트 터커 박사도 원래 CIA출신 아니던가?
구 소련에서는 요주의 인물이었지 아마 !

선생 2008-03-10 23:33:07
보스턴 글로브지에서도 하이예크를 다시 보는데,
국내에서 연구가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마냥 옛날 대학에서 공부했던 지식만 가지고 우파라 하면 안되지....암...
권기자님의 자유주의 사상 열전 소개, 아주 특색있었습니다.
자유주의도 연구들 열심히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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