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14년(1636년) 청(淸)의 태종(홍타이지)이 일으킨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강화도로 옮겨 항전(抗戰)하려 했으나, 청군의 예상보다 빠른 남하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항전하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삼전도(三田渡)에서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굴욕적인 항복(降伏)을 하였다.
이어,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鳳林大君)및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던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과 수 십만의 백성들이 인질(人質)로 심양(瀋陽)으로 잡혀갔었으며, 소현세자는 인조 20년(1642년)과 인조 22년(1644년) 두 차레에 걸쳐 조선에 다녀가기도 했다. 세자는 심양관(瀋陽館)에서 조청(朝淸)간의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調停者)로서 재량권을 행사하며 청의 왕족과 군부와 친교를 맺으며 관계 정상화에 노력했었다.
1644년에는 북경(北京)에 70여 일간 머물면서 특히 독일인 신부 ’아담 살(Schall. J. A)‘과의 친교로 천문, 수학, 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 천주상(天主像)을 전하는 등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하려고 했었다.
조선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책(反淸親明策)을 유지하면서 소현세자의 처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청의 요구를 막지 못하고 그들과 영합, 국고(國庫)에 부담을 주고 사무역(私貿易)을 실시하는 등 인조로서는 친청적(親淸的)인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기도 했다. 특히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昭容 趙氏: ?~1652년)는 세자를 모함-세자의 과도한 영리 추구는 잠도역위(潛圖易位:세자가 인조를 대신해 왕위에 오르기 위한 공작) 또는 인조를 청에 입조(入朝)시키려는 공작-하기도 했었다.
소현세자는 9년 간 심양에서의 인질생활을 마치고 1645년 2월에 환국(還國)하였으나 환영보다는 냉대와 함께 군신의 진하(進賀)도 막아 버리는 등 홀대로 일관하는 등 부왕인 인조와의 갈등으로 그해 4월 23일 병석에 누운지 4일에 급서(急逝)하였는데 인조는 사인(死因)을 규명하지 않고 입관을 서둘렸는데, 인조실록(仁祖實錄)에는 시신은 구혈(九穴)에서 출혈해 진한 흑색으로 변해 있었다고 해 독살(毒殺)되었음을 시사하고 그 하수인은 이형익(李馨益:소현세자 주치의를 역임한 의관)을 지목하고 있는 듯 한다.
인조는 세자빈이였던 민회빈도 역모(逆謀)를 도모했다고 해 사약(賜藥)을 내리고 두 아들인 경선군(석철)과 경완군(석견)은 제주도 유배(사망), 모친 신예옥과 형제인 강문성, 강문명과 많은 궁녀들이 죽임을 당했다.
다행히 막내 아들 경안군(慶安君,석견,李檜)만 살아 남아 그 후손들이 소현세자의 적통(嫡統)을 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자빈 민회빈은 경기도 광명시 노은사동 산언덕의 금천 강씨 (衿川 姜氏)묘역에 묻혀 사후에도 부부가 이별을 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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