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우위' 통해 冷戰 종식시킨 로널드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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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우위' 통해 冷戰 종식시킨 로널드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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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사상가 列傳 (10)

^^^▲ Ronald Wilson Reagan^^^
『소련은 惡의 제국, 나는 공산주의는 이미 그 역사의 마지막을 쓰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 젊은 시절 뉴딜 정책 지지, 정부의 비대화가 개인과 기업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생각해 보수주의로 전환
●『우리의 진정한 敵은 대기업이 아니라 비대한 정부』
● 할리우드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항하며 『미국은 공산주의의 음흉한 惡의 위협 이상으로 더 큰 위험에 직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돼
●『안보와 예산 赤字 간의 兩者擇一을 해야 한다면 나는 국가방위 편에 서는 수밖에 없다』
● 스타워즈 등 군비증강을 통해 소련이 軍縮에 응하도록 강요, 냉전 종식

위대한 대화자

미국 국민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을 손꼽으라면 그들은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1911~)을 그중 한 명으로 내세울 것임이 틀림없다. 레이건 대통령의 정치 철학과 정책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미국 국민들조차도 그에게 호감을 가졌고 그의 스타일에 반했었다.

터프츠(Tufts) 대학 플레처 외교대학원의 팔츠그라프(Robert L. Pfaltzgraff) 교수는 레이건 대통령의 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부시 現 대통령의 부친)가 1988년 대통령 선거에서 제4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미국 국민들이 레이건 대통령을 세 번째 임기에 당선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 바 있다. 국민들이 레이건을 너무 좋아하지만 헌법상 대통령의 3選을 금지해 놓았기 때문에 그의 분신격인 조지 부시를 대통령을 선출했다는 얘기다.

미국인들의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향수는 아직도 미국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미국 정치가들이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워싱턴 내셔널 공항은 로널드 레이건 공항으로 改名됐다. 워싱턴DC에 있는 대규모 연방 정부 건물은 로널드 레이건 빌딩으로, 최신에 항공모함의 이름은 로널드 레이건號로 命名됐다. 아직 생존해 있는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이처럼 널리 사용되는 경우는 공공시설물 등에 위인들의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하는 미국에서도 드문 일이다.

사실 상당수 지식인들은 레이건을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많다. 레이건 대통령 재임중 그들은 레이건을 「총명하지 못한 대통령」, 「지식이 많지 않은 대통령」, 「심각하지 않은 대통령」이라고 비하했다. 중요한 국가 정책 회의의 테이블에서 졸고 있는 레이건 대통령의 모습은 이들에게 좋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지식인들이 레이건을 우습게 본 것은 그가 변호사 출신도, 동부 명문대 출신도 아닌, 별로 존경의 대상이 아닌 배우 출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은 지금도 레이건을 낮춰 보고 있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 대부분은 레이건을 좋아한다. 레이건은 국민들에게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고,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기초한 정치사상에 충실했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호감을 국민들에게 잘 전달했으며, 사회의 질병과 惡의 요인들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정치, 사회, 경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직설적이고도 분명한 代案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레이건은 「위대한 대화자」(Great Communicator)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국민에게 호소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물론 어느 나라 국민들도 정치문제에 해박하고 권위 있는 해설을 할 수 있는 실력은 없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가들의 거짓과 진실을 파악하는 능력은 있다. 레이건이 국민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話術(화술)때문만이 아니라, 좀더 나은 삶의 양식에 대한 확신, 미국에 대한 그의 애국심과 긍지 때문이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로워야 하며 인간의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되는 사회가 가장 풍요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미국은 그 같은 자유주의 사회 철학을 구현 시킨 정치 제도라는 레이건의 확신은, 그의 對內外 정책에 그대로 반영됐다. 레이건은 자신의 신념을 미국은 물론 세계에 전파하는 데 성공했다. 레이건은 미국의 정치·경제체제를 좀더 자유주의적으로 만듦으로써 오늘날 미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 발전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또한 지구 전체를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그의 신념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총체적 붕괴를 초래한 원동력이었다. 레이건의 정치철학과 신념은 나치 독일, 공산주의 소련 등 左右翼 전체주의의 실험과 이에 대항하는 전쟁과 폭력의 세기였던 20세기를, 1989년을 고비로 종결시켰다. 1989년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시점이었다.

『커서 대통령이 될지 누가 알겠어?』

로널드 레이건은 1911년 2월6일 미국 중서부 일리노이州 탬피코에서 태어났다. 탬피코는 인구가 겨우 82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 그의 부친은 『그 녀석, 뚱뚱한 네덜란드人처럼 생겼군, 그러나 커서 혹시 대통령이 될지 누가 알겠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레이건은 로널드(Ronald)라는 이름이 열정적인 미국 청년의 이름으로는 나약해 보인다고 생각, 사람들에게 자기를 「더치」(Dutch, 네덜란드人)라고 불러달라고 요구했었다. 아버지가 그를 부를 때 쓰는 별명이 「더치」였고, 그 쪽이 더 열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레이건은 네덜란드人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해 온 아일랜드人(Irish)의 후예였다. 레이건의 어머니는 스코틀랜드系였다. 아일랜드는 이웃 영국의 지배를 받은 수난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중에는 한국인들이 아일랜드人들과 기질이 비슷하다고 하여 한국인을 「동양의 아이리시」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좋게 말하면 화끈함, 나쁘게는 다혈질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레이건은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는 의미에서 화끈한 아이리시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레이건은 아버지가 가톨릭이란 이유 때문에, 아일랜드系라는 점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소외되고 주먹 싸움도 자주 벌였다고 회고했다. 또래의 많은 미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레이건의 가정 역시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레이건의 아버지는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비교적 세상 물정에 밝았고, 개인의 권리, 노동자의 권리를 열정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기성권위에 회의적이었고, 특히 일리노이州 공화당 정치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냉소주의자로서 사람들의 나쁜 면을 보려는 반면 레이건의 어머니는 그 반대였다. 레이건은 그의 회고록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열심히 일하는 것과 큰 뜻을 품는 가치를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기도의 가치_꿈을 가질 것과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_을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국민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라」

어렸을 때 인구 1만 명인 딕슨市로 이사한 레이건은 소도시에서의 생활을 통해 미국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기회를 주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농부든 소상인이든 자신들과 자식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어떤 일이든 달려들어 보려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레이건은 대통령이 된 후 국민들을 향해 『미국을, 여러분(미국 시민)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말했다.

레이건 또래의 미국 국민들 중 겨우 7%만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시골의 작은 대학이지만 「나는 발견했다」는 뜻의 그리스語에서 비롯된 「유레카」(Eureka) 대학을 다녔고 졸업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레이건은 경제 대공황기에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1932년 딕슨의 로웰 공원 수영장의 구조원으로 7년째 일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말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겪고 있었다. 그가 수영장에서 구조원 일을 한 것은 밀린 대학 등록금을 갚기 위해서였다.

레이건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대학 4학년이 되었을 때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확고해졌다. 고교 및 대학시절 8년간 미식축구 선수를 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레이건은 1932년 2월 라디오 방송사의 스포츠 방송 기자로 취직할 수 있었다.

1937년 레이건은 캘리포니아에서 실시되는 야구단 훈련을 취재하러 갔다가 영화 에이전트의 눈에 띄어 영화 배우가 됐다. 그는 평생 50여 편의 영화를 찍었는데, 마지막 한 편을 제외하고는 항상 좋은 사람의 역할을 맡았다. 레이건은 배우로서 대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는 배우 시절에 인생의 반려자 낸시를 만났고, 勞組간부로서 할리우드에 침투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정치 수업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이건은 육군항공대 공보장교로 복무했다.

레이건은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대학시절 철학교수로부터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배웠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날 때까지 사람을 의심하는 사람들」이며, 또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본성이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들을 좋고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레이건은 자신의 아버지는 前者에 속하지만, 자기는 그와 반대였다고 말한다. 레이건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란 본성이 착하다고 믿으며 되도록 善意로 사람들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레이건의 아내 낸시는 「사람을 좋게 보지만, 사람들에게 결점이 있는 경우 그것을 알아 볼 수 있는 본능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레이건의 인간관과 낸시의 인간관의 결합은 인간 사회의 갈등적 측면을 좀더 노골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최고의 성공담을 만들어 내는 원천이었을 것이다.

뉴딜정책 지지자에서 보수주의자로

레이건의 아버지는 공화당 정치인들에게 비판적인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다. 레이건도 젊은 시절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민주당」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는 1932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투표했고,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루스벨트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레이건은 1950년대 이후 점차 정부 기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미국의 전통적 가치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됐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할리우드에서 공산주의의 침투에 대항해서 싸우면서 레이건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자로 변신하게 됐다. 그는 공산주의를 이기는 길은 자유주의의 힘을 통해서라고 믿고 있었다. 레이건은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스탈린이 살인적 악당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후일 『나는 나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온갖 책략을 다 하면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어떻게 수행하려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내가 몸소 겪었던 육탄전을 통해 미국은 공산주의의 음흉한 惡의 위협 이상으로 더 큰 위험에 직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고 회고했다.

1960년 大選 당시 민주당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공화당 후보 리처드 닉슨을 지지했던 레이건은 1962년 공화당으로 黨籍(당적)을 바꾸었다. 1964년 大選에서 레이건은 공화당 후보 배리 골드워터의 캘리포니아 선거운동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이때 그는 미국 헌법정신에 기초한 그의 보수주의 철학을 피력한 TV 연설을 통해 이름을 떨쳤는데, 이 연설은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정표 가운데 하나가 된다.

1965년 캘리포니아州의 공화당 인사들은 레이건에게 이듬해 있을 州지사 선거에 출마하도록 종용했다. 그에 대한 레이건의 반응은 『당신들, 돌았소?』였다. 그는 결국 『두 차례의 大選 패배로 좌초 위기에 빠진 캘리포니아州 공화당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뿐』이라는 공화당 인사들의 강권을 받아들였다.

1966년 미국의 대학들은 反戰 운동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레이건은 선거유세 과정에서 『대학생들이 대학의 규칙을 지키지 않으려 한다면, 대학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1968년 버클리 대학에서 대규모 학생 소요가 일어났을 때, 레이건은 州방위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55세 때 캘리포니아 州지사에 당선

1966년 11월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州지사에 당선됐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정치가로 변신한 것이다. 레이건은 州지사를 두 번 연임하는 동안 캐스퍼 와인버거를 州재무장관으로 기용, 州정부의 재정을 黑字(흑자)로 전환시키는 등의 업적을 쌓았다.

두 번의 州지사 임기를 마친 후 레이건은 3選 권유를 물리치고 향리로 은퇴하려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그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대통령 출마를 종용했던 것이다. 레이건이야말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만신창이가 된 공화당을 재건할 인물로 간주됐다. 1976년 첫 번째 도전에서 레이건은 현직이던 포드 대통령에게 패배, 공화당 후보지명을 받는 데 실패했다.

후보 지명전에서 패배한 후 레이건은 잔여 선거자금을 가지고 「공화국을 위한 시민들」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보수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1980년 大選에서 레이건은 카터를 제치고 미국의 제40代 대통령에 당선됐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젊은 시절 레이건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의 지지자였다. 그러나 그는 개인의 자유가 富의 궁극적 원천이라는 데 대해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대공황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민주당이 실행한 복지와 구제 계획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임시방편적인 것이지, 미국을 항구적인 복지국가(Welfare State)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진정한 敵은 대기업이 아니라 비대한 정부』

루스벨트 대통령도 『정부의 구제 계획은 인간의 정신을 파괴한다』고 말했었고, 레이건은 그 말을 믿었다. 레이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특히 토머스 제퍼슨이 반복해 서 말했던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작은 정부』, 『정부는 국민의 주인이 아니라 국민의 종이다』는 말을 좋아했고, 에이브러험 링컨이 말한 『제퍼슨의 원칙들은 자유사회의 公理』라는 말을 믿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민주당이 대공황 기간을 거치면서 자유주의 원칙을 무시했고 私기업에게 맡겨 두어야 좋을 부분까지 계획하고 관리하려는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는 회고록에서 『민주당이 자유기업과 자본주의 에너지를 지배하여 복지국가를 만든다면서 미묘한 형식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도입하려 하는지를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민주당에 대한 나의 견해는 변해 갔다』면서 『우리의 진정한 敵은 대기업이 아니라 비대한 정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국민을 구제하기 위한 관료제도는 한번 만들어진 이후 그 자신의 생명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관료제란 한번 만들어지면 폐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레이건은 『국가 안보에 관한 일을 빼고는 이 지구상에서 민간기업의 힘이 연방 정부보다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지 못할 일이란 없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면서 『연방정부의 관료 제도는 戰後에 가차 없이 팽창했고, 동기야 좋은 데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미국을 소리 없는 사회주의 형태로 바꾸어 가고 있었다. 미국에서 나타난 그런 현상은 국민의 富를 과도한 세금으로 불공평하게 수탈해 가는 것이었고, 규칙과 규제를 통해 워싱턴의 관료들은 생사여탈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 연방정부 예산은 1965~1980년 사이에 5배, 연방예산 적자는 53배나 증가했다. 많은 돈이 행정적 과정에서 낭비되었다. 수백 수천억 달러가 빈곤 퇴치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돈의 낭비는 인간자원의 낭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많은 돈이 「공짜중독」에 탕진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의 일하려는 의욕이 감소되었고, 가정을 파괴했으며, 여성과 아동들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다. 이런 현상은 바로 과거 사회주의 진영 국가에서, 그리고 최근 독일 등 복지국가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이다. 미국 민주당은 사회의 문제를 정부의 개입을 통해서 푼다는 방안을 견지했다.

배우 시절 수입의 94%를 세금으로 납부

레이건이 꽤 잘나가던 배우 시절, 그의 실질 수입은 총 수입의 6%에 불과했다. 그는 수입의 94%를 세금으로 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화배우라는 특성이 있었지만 다른 미국인들 역시 수입의 엄청난 부분을 세금으로 내고 있었다. 광부나 제조업 노동자들이 시간 외 근무를 할 경우 그 수당의 60%가 세금이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유레카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좀더 완전한 자유주의 경제론자로 만든 것은 할리우드에서 경험한 稅法이었다고 술회했다. 稅率(세율)을 낮추어 사람들이 번 것을 더 많이 쓸 수 있거나 저축할 수 있게 해 주면 사람들은 더 부지런해지고,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을 위한 번영이 약속되고 정부의 稅수입도 많아진다는 것이 레이건의 신념이었다.

이 이론을 「공급자 측면의 경제학」이라 하는데, 레이건에 의해 이 정책이 채택되면서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로 널리 알려지게 됐다. 「레이거노믹스」라는 표현은 미국에서는 레이건의 경제 정책을 비꼬거나 비하하는 의미를 많이 내포하는 말이라고 하는데, 레이건 자신은 이를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州지사 시절, 그리고 대통령에 재임 중이던 시절 이 같은 과다한 세금을 낮추는 것을 정책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대통령에 출마할 결심을 하기 전 해인 1978년 레이건은 미국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국민은 이제 오직 세금을 내기 위해 1년 중 4개월을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데 지쳐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뉴딜 정책과 위대한 사회(린든 존슨 대통령의 경제 및 복지정책)의 청사진에 따라 국가 재산의 평균 45 %를 앗아가는 정부에 미국 국민들은 진저리가 났다』

레이건은 임기 중 美 국민의 세금을 수입의 약 25% 선으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레이건은 1980년 카터가 선거 공약으로 국방비 삭감과 함께 국가적 경제계획 정책을 내걸었을 때, 『미국은 사회 공학자나 경제계획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미국의 경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르면 되는 것이고, 개인들이 어디에서 일을 할 것인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가지는 데 근거하면 된다는 것이 레이건의 생각이었다.

『트루먼의 잘못은 맥아더를 밀지 않은 것』

그는 소련은 軍備(군비)경쟁에서 미국을 결코 이길 수 없고, 미국은 언제나 소련을 앞설 수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해 있는 인센티브의 요인은 미국이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영원히 기술적인 우위에 설 수 있는 공업적 기반을 주는 것이라 믿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경제의 우월성에 관한 레이건의 신념은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체제에 직접적인 대결을 결행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만든 용기의 근원이었으며, 결국 오늘과 같이 미국이 또 다시 세계 경제의 최강국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 기본이 되었다.

레이건은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17년 러시아 공산 혁명 이후 70년 이상 지속돼 온 소련·동구 공산주의 정치·경제 체제들을 붕괴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소련·동구 공산체제가 붕괴된 것은 레이건의 후임자인 조지 부시(조지 W.부시 現 대통령의 아버지) 시절의 일이지만,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 소련에 대한 미국의 승리의 몫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있다는 사실에 의문은 없다.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레이건의 혐오감은 할리우드 배우 시절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의 건국 이념인 자유주의 경제체제와 민주주의 체제가 인간의 본성에 더욱 잘 부합한다고 믿는 그의 신념의 결과이기도 하다.

레이건은 트루먼 대통령의 한국전쟁 수행에 관해 의미 있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민주당 지지자이던 레이건은 트루먼의 정책을 대부분 지지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에게 유일한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이기도록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끝까지 밀어 주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나는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다음에 미국은 베트남이라는 곳에서 싸우게 될 것」이라고 했던 맥아더의 예언적 발언을 기억한다. 그때까지 나는 베트남이라는 말을 들은 일도 없었고, 단지 프랑스령 인도지나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이 얼마나 옳았던 것인가!』

『나는 국가방위 편에 서는 수밖에 없다』

1980년 대통령 선거전에 임하면서 레이건은 「미국이 미국 자체에 대한 신념을 잃고 있다」는 점을 가장 본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인들의 미국의 꿈, 자부심, 그리고 운명에 대한 신념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무엇보다 미국의 정신적인 부활을 실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레이건과 대결했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전쟁과 평화를 이분법적으로 갈라놓고 레이건을 인신공격했다. 카터는 레이건을 「戰爭狂(전쟁광)」이라고 비난하면서, 레이건이 당선되면 그는 세계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레이건이 제2차 전략무기제한협정 비준에 반대한 것은 이 협정이 소련의 核戰力(핵전력)을 미국보다 우위에 놓을 우려가 있었고, 레이건 자신은 核무기의 「제한」보다는 「감축」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레이건의 정책과 성공은 국제정치 학자들의 오랜 논쟁에 명확한 해답을 주고 있다. 국제정치 학자들은 거의 2000년 이상 「무기와 전쟁의 관계」에 대해 논쟁을 벌여 왔다. 무기는 전쟁의 도구다. 그래서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나라들, 혹은 더 많은 무기를 가지려고 경쟁하는 나라들 사이에는 전쟁의 발발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까 무기를 통제하거나 줄이는 경우 전쟁의 가능성은 낮아지고 평화의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논리가 그중 하나다.

이 논리는 규범적이기 때문에 비판하기조차 곤란하다. 무기를 줄이는 것이 좋다는 당위론에 대해 어떻게 그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레이건을 「전쟁광」, 「세계를 파괴할 사람」으로 몰아붙인 카터의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국제정치의 또 하나의 전통적 이론은 「평화는 힘으로만 지켜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로마인 베제티우스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金言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주장은 전쟁을 원하는 비도덕적인 것으로 비난받기 일쑤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현실은 베제티우스의 金言이 더 올바른 것임을 보여준다. 레이건이 추구한 정책은 바로 평화를 위해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급격한 軍備증강을 이룩한 대통령인 동시에, 진정으로 軍備축소를 달성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戰爭狂」으로 비난받았던 레이건은 冷戰(냉전)을 종식시킴으로써 인류를 核전쟁의 공포에서 구출해 냈다. 이것은 레이건 대통령의 인류에 대한 가장 큰 업적이다.

레이건은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라」는 교훈이 타당한 것임을 실증해 보였다. 레이건의 전략은 미국이 소련에 대해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확보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하고, 궁극적으로 소련을 제압하여 진정한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은 카터 대통령 재임時 미국이 군사력을 감축하면서 지구 곳곳에서 공산주의에게 밀렸다고 보았다. 지원병 제도 때문에 美軍의 사기가 떨어지고 있으며, 核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수단도 부족하다고 보았다.

레이건은 국방예산 증가를 통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국가 전체 예산은 줄이려 했다. 레이건은 이런 이율배반적인 정책 때문에 가는 곳마다 『안보와 예산 赤字 간의 兩者擇一(양자택일)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그때마다 레이건은 『나는 국가방위 편에 서는 수밖에 없다』 고 말했다. 청중들은 박수갈채로 이에 호응했다. 레이건은 『나는 균형 잡힌 예산을 원하면서도 「힘을 통한 평화」를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국가 이익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軍備 증강 통해 冷戰 종식 이끌어내

레이건의 전쟁 회피 혹은 평화에 대한 열망은 美蘇 간의 전면 核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으로 치부되어 오던 「상호 확실 파괴」 전략에 대한 그의 저항감에서 잘 나타난다. 미국과 소련은 冷戰 기간 동안 서로 상대방이 먼저 기습 공격을 가하는 경우, 상대방을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함으로써 전쟁을 억지한다는 이상한 전략 상황 아래 살고 있었다.

이 전략을 「MAD(Mutual Assured Destruction: 상호확실파괴)」라고 한다. 이는 「죽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감히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며, 영문 머릿글자의 뜻대로 사실 미친(mad)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주머니 속에 지갑, 돈, 자동차 운전 면허증 혹은 어떤 열쇠도 넣고 다니지 않았지만, 세계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비밀암호를 넣은 작은 카드를 지니고 다녔다. 미국이 核무기를 사용해야 할 경우 자신이 할 일에 대해 브리핑을 받은 후, 레이건은 어디를 가나 플라스틱 코팅된 작은 카드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레이건 옆에는 항상 「축구공」(Foot Ball) 이라고 불리는 검은 가방을 들고 있는 장교가 동행했다. 이 가방이 바로 소련의 核 공격이 있을 경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의 核무기를 발사시킬 수 있는 암호가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레이건은 소련이 백악관까지 불과 5~6분이면 날아올 수 있는 미사일을 탑재한 核잠수함을 미국 동해안 근처에 배치시키고 있고, 레이더에 나타난 불빛을 가지고 核무기의 발사에 관한 결정을 5분 이내에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理性이 작동할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서로를 파멸시킬 수 있는 아슬아슬한 대결을 영원히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레이건은 평화를 위한 旅程(여정)에서 軍備를 급격히 증대시키는 과감하고 逆說的(역설적)인 代案(대안)을 추구했다. 「별들의 전쟁」(Star Wars) 계획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수많은 비판을 무릅쓰고 레이건은 「별들의 전쟁」 계획을 밀어붙였다.

미국과 軍備경쟁을 계속할 만한 경제력과 과학기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소련은 결국 軍縮(군축)협상에 진지하게 나설 수밖에 없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사이에 이루어진 일련의 軍縮 조치들은 고르바초프의 善意(선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레이건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미국의 左派 지식인들은 冷戰을 승리로 이끈 레이건을 좋게 평가하는 데 인색하다.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 레이건은 기껏해야 「마음에 드는 바보」(amiable dunce)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들은 미국이 冷戰에서 승리한 것은 역대 미국 대통령, 미국 시민들의 노고 덕분이거나, 소련이 본질적으로 취약했기 때문, 혹은 開明君主(개명군주)와 같은 고르바초프 덕택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레이건은 軍備를 증강했고, 소련과의 대결정책을 표방했다며 오히려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고슴도치型 인간」

그러나 레이건 대통령에 관해 오래 연구했고 「승리: 소련의 붕괴를 재촉한 레이건 행정부의 비밀전략」(1994년 미국 어틀랜틱 먼슬리 출판사 간행)과 「레이건의 전쟁」(2002년, 미국 더블데이 출판사 간행) 등의 책을 저술한 스탠포드大 후버 연구소 연구위원 피터 슈바이처는 영국의 정치사상가 이사야 벌린의 말을 인용해 『세상에는 이것저것 많이 안다고 자부하는 「여우 같은 인간」과 많은 것은 모르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알고 있는 「고슴도치 같은 인간」이 있다』고 말하면서, 『레이건 대통령은 비록 미사일의 투사 중량(Throw Weight: 미사일 파괴력을 물리학적으로 표현한 것)은 모르지만 냉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있었던 「고슴도치型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앞에서 말했듯이 레이건은 역사의 진행 방향에 영향을 끼친, 「시대를 창조한 영웅」이다. 레이건의 정책들은 일반적 통념을 거슬러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건은 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능력과 역사 속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환상을, 자본주의 와 미국의 장래에 대해서는 懷疑(회의)를 품고 있을 때, 공산주의와 소련의 본질적인 취약점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소련이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을 때, 세계사의 조류는 공산주의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열렬한 反共 투사였던 리처드 닉슨마저도 『자본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1970년대 소련의 군사력은 미국을 능가하였다. 당시 미국 해군 참모총장은 미국과 소련이 재래식 무기만으로 전쟁을 벌인다면 소련이 승리할 확률이 65 對 35로 우세하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 미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은 소련으로부터 아무런 문제점을 읽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는 1982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후 『나는 소련의 상점에는 더 많은 상품, 시장에는 더 많은 음식, 거리에는 더 많은 자동차가 있음을 보았다_거의 모든 것이 풍족했다. 다만 무슨 이유인지 철갑상어 알은 줄어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얼치기 민주당파 경제학자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는 1984년 소련을 방문하고 돌아 온 후 이렇게 말했다.

『소련 체제가 최근 물질적인 면에서 커다란 진보를 이룩했다는 사실은 통계와 전반적인 도시 풍경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 체제가 성공을 거둔 부분적인 이유는, 서구의 산업경제와는 대조적으로 인력을 완전히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해 줄 수 있는 세상」건설

유명한 소련 연구자인 컬럼비아大 셔린 비알러 교수는 1982년 「포린 어페어스」誌에 기고한 논문에서 『소련은 지금 현재, 혹은 앞으로 10년 뒤에도 심각한 체제 위기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서 『소련은 엄청난 위험에 당면하더라도 그것을 버텨 내고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아직 사용되지 않은 자원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새뮤얼슨 교수, MIT 大 레스터 소로 교수 등도 소련이 끄떡없음을 확신했다. 클리턴 행정부 시절 국무차관을 역임한 소련 및 안보문제 전문가인 스트로브 탈보트는 고르바초프의 출현을 보고 『미국의 온건파가 지난 40년 동안 가졌던 소련에 관한 관점이 전적으로 옳았다. 레이건 행정부의 반공주의자들은 소련이 할 수 있는 일을 망상적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면서 레이건과 그의 행정부를 싸잡아 비난했다.

이들 지식인들이 보기에 레이건이 1983년 3월8일 소련을 「惡의 제국」(Evil Empire)으로 지칭하면서 『나는 공산주의는 이미 그 역사의 마지막을 쓰기 시작한, 또 하나의 슬프고 이상한 인류 역사의 한 章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고 한 것은 바보 같은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레이건이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레이건은 전쟁 없이 冷戰을 끝낸 대통령, 역사상 가장 진정한 核무기 감축을 이룩한 대통령, 核전쟁의 공포를 종식시킨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레이건이 이룩한 이보다 더 큰 업적은 그가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해 줄 수 있는 세상」을 건설했다는 점이다. 지구上 극히 일부분 국가들을 제외하면 全세계는 레이건이 목표로 했던 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된것이다.



^^^^^^▲ Ronald Wilson Reagan^^^^^^
로널드 레이건 -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살림지식총서 304)

'세상의 모든 지식'을 소개하는『살림지식총서』시리즈. 인류가 남긴 오래된 지식에서부터 현재 지식의 최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흐름까지, 각 분야의 국내 전공자들과 필자들이 대중적 글쓰기를 통해 알기 쉽게 다루고 있다. 또한 언제 어디서...

^^^^^^^^^▲ Ronald Wilson Reagan^^^^^^^^^
Reagan : A Life in Letters | Free Press | 2003.01.01

RONALD REAGAN MAY HAVE BEEN THE MOST PROLIFIC CORRESPONDENT OF ANY AMERICAN PRESIDENT SINCE THOMAS JEFFERSON. THE TOTAL NUMBER OF LETTERS WRITTEN OVER HIS LIFETIME PROBABLY EXCEEDS 10,000. THEIR BREADTH IS EQUALLY ASTONISHING -...

^^^^^^^^^^^^▲ Ronald Wilson Reagan^^^^^^^^^^^^
Ronald Reagan

At the end of his two terms in office, Ronald Reagan viewed with satisfaction the achievements of his innovative program known as the Reagan Revolution, which aimed to reinvigorate the American people and reduce their reliance upon Government. He felt he had fulfilled his campaign pledge of 1980 to restore "the great, confident roar of American progress and growth and optimism."

On February 6, 1911, Ronald Wilson Reagan was born to Nelle and John Reagan in Tampico, Illinois. He attended high school in nearby Dixon and then worked his way through Eureka College. There, he studied economics and sociology, played on the football team, and acted in school plays. Upon graduation, he became a radio sports announcer. A screen test in 1937 won him a contract in Hollywood. During the next two decades he appeared in 53 films.

From his first marriage to actress Jane Wyman, he had two children, Maureen and Michael. Maureen passed away in 2001. In 1952 he married Nancy Davis, who was also an actress, and they had two children, Patricia Ann and Ronald Prescott.

As president of the Screen Actors Guild, Reagan became embroiled in disputes over the issue of Communism in the film industry; his political views shifted from liberal to conservative. He toured the country as a television host, becoming a spokesman for conservatism. In 1966 he was elected Governor of California by a margin of a million votes; he was re-elected in 1970.

Ronald Reagan won the Republican Presidential nomination in 1980 and chose as his running mate former Texas Congressman and United Nations Ambassador George Bush. Voters troubled by inflation and by the year-long confinement of Americans in Iran swept the Republican ticket into office. Reagan won 489 electoral votes to 49 for President Jimmy Carter.

On January 20, 1981, Reagan took office. Only 69 days later he was shot by a would-be assassin, but quickly recovered and returned to duty. His grace and wit during the dangerous incident caused his popularity to soar.

Dealing skillfully with Congress, Reagan obtained legislation to stimulate economic growth, curb inflation, increase employment, and strengthen national defense. He embarked upon a course of cutting taxes and Government expenditures, refusing to deviate from it when the strengthening of defense forces led to a large deficit.

A renewal of national self-confidence by 1984 helped Reagan and Bush win a second term with an unprecedented number of electoral votes. Their victory turned away Democratic challengers Walter F. Mondale and Geraldine Ferraro.

In 1986 Reagan obtained an overhaul of the income tax code, which eliminated many deductions and exempted millions of people with low incomes. At the end of his administration, the Nation was enjoying its longest recorded period of peacetime prosperity without recession or depression.

In foreign policy, Reagan sought to achieve "peace through strength." During his two terms he increased defense spending 35 percent, but sought to improve relations with the Soviet Union. In dramatic meetings with Soviet leader Mikhail Gorbachev, he negotiated a treaty that would eliminate intermediate-range nuclear missiles. Reagan declared war against international terrorism, sending American bombers against Libya after evidence came out that Libya was involved in an attack on American soldiers in a West Berlin nightclub.

By ordering naval escorts in the Persian Gulf, he maintained the free flow of oil during the Iran-Iraq war. In keeping with the Reagan Doctrine, he gave support to anti-Communist insurgencies in Central America, Asia, and Africa.

Overall, the Reagan years saw a restoration of prosperity, and the goal of peace through strength seemed to be within gr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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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랑 2008-02-19 12:46:39
역시 뉴스타운이다.
기자가 독자에게 고품질의 기사나 교양물을 이렇게 겸손하게 제공해야지 누구처럼 자기 폼잡거나 교만의 착각이나 남 가르칠라고 하면 되나? 같은 레이건 소개라도 너무 차이가 난다.

뉴스타운 언제나 나의 활기를 만들어 준다.

너무 잘보고 갑니다....

영감 2008-02-20 00:28:59
밑에글은 기본이고 권기자가 모를 사람돟 아니고 어느 십탱구 영감탱구가 빼라고 지랄했는지 까불지 마라 다 쥑인다. 살고 싶으면 복종해서 복받고 아니면 우파고 나발이고 개지랄들 하지마......어떤 새끼가 빼라고 햇어?

다 복받거나 아니면 우파 다 몰살혀....지랄들 하지마....

피볼래? 2008-02-20 00:31:21
괜히 영문넣나?
아이 서울대 넣은 권기자 괴롭히지마...
어떤 개쉐이야....영문 빼라한넘이.....
바꾸네고 회창이고 너거가 제대로 하고 하냐?
조심해들....

도끼 2008-02-20 00:33:21
어떤 십탱구가 권기자 신경쓰이게 하는고?
눈깔박 힘주면 시상 바뀌냐?
우파 살고 느긋하게 살려면 개잡소리 탱탱구 소리 개폼잡지 마라
아스팔트 복이다...

좇묵어라 2008-02-20 00:35:01
언넘이 삽살탕구 치냐?
그것도 뉴스타운에서?
돼지고 싶냐?
살구 농사리들 까지마라잉
언넘이 영문 빼라구 신경 건드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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