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강의 기적'의 아버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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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의 기적'의 아버지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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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사상가 열전 (5)

^^^▲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사회복지정책이 과도해진 복지국가는 「계급이 없는, 그러나 魂이 없는 기계화된 사회」를 만든다』

● 소아마비로 불구임에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 제2차 세계대전 말기 反나치운동가 괴어델러의 의뢰로 戰後 경제재건계획 수립
● 제2차 세계대전 후 사회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과감하게 시장경제에 입각한 경제개혁 단행, 美軍政이 규제변경에 대한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을 따지자『나는 규제를 변경한 것이 아니라 철폐한 것』이라고 대꾸
●『의회의 多數決에 따라 추진되는 경제정책이 이익집단들의 독재로 인해 無力化된다면 민주주의란 한낱 코미디에 불과하게 될 것』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인간적 자유는 통합된 하나의 통일체. 그 중 일부분만의 자유를 따로 떼어내어 유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철부지의 생각』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경제장관인 저는 기업인 여러분들의 대변자

『저는 기업인 여러분의 대변인입니다』

기업인들의 모임이 있던 날. 한 사람의 연설이 이어지고 있다.

『저는 여러 기업인들이 우리 조국의 재건을 위해 보여준 熱誠(열성)과 탁월한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동안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우리가 이룩한 성공의 비결은 바로 자유시장경제에서의 경쟁을 통한 경제의 力動性(역동성)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힘을 억제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시장경제란 內的 팽창욕구와 지속적인 역동성, 기민함, 그리고 유연성 없이는 결코 그 임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쟁이야말로 시장경제의 원동력이며, 이 시장경제를 조정하는 것은 자유롭게 형성되는 가격입니다. 역동성, 계속성, 그리고 자유에 대한 확고한 의지, 이것이야말로 건강하고 안정된, 동시에 사회복지를 위해서도 유용한 국민경제의 근간이 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이룩한 성과를 보고 경제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가 쏟았던 노력의 자연스런 결과이며 우리가 흘린 땀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오늘의 결실을 이루어 낸 것은 바로 기업인인 여러분들이며, 여러분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실 자격이 충분합니다.

아직까지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국민과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과도한 세금문제가 그 하나입니다. 기업이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자금을 공급하고 기업들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을 제공해 주어야 하는 숙제도 남아 있습니다. 외국의 기업들과 어깨를 겨루며 경쟁하고 우리 기업들이 외국으로 진출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도 제거되어야 합니다. 많이 해소한다고 했지만 여전히 부족합니다.

기업인들의 자유를 위해 저보다 더 강력하게 투쟁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경제장관인 저는 기업인 여러분들의 대변자입니다.

저는 건강하고 경쟁력 있는 산업을 통해서만 우리가 번영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자유로운 기업가들이 우리나라 기업의 운명을 선도해 나갈때에만 충족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국내적으로 경쟁이 어떤 규제 등을 통해 제한되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간의 무역도 협상이나 협정 등을 통해 규제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유로운 무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종종 이런 저런 특단의 조치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저는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서 있는 땅은 「자유」라고 하는 땅입니다. 이는 특히 기업인인 여러분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저는 말씀드립니다. 자유기업인인 여러분들이 계시기에 제가 경제장관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연설을 한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西獨 경제장관을 지냈고 후에 연방수상을 역임하면서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였다.

불구임에도 自願하여 參戰

루드비히 에르하르트(Ludwig Erhard)는 1897년 2월4일 독일 바이에른州의 작은 도시 휘르트(Fuerth)에서 아버지 빌헬름 에르하르트(Wilhelm P. Erhard)와 어머니 아우구스타 에르하르트(Augusta Erhard)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빌헬름은 섬유제품을 도소매하는 상인이었다. 에르하르트가 사회적 출신이나 계층의식보다는 근면과 實用(실용)을 중시하는 성품을 지닌 것은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이면서도 최대한의 성과를 올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고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기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에르하르트의 성격 형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선 종교적인 면에서 아버지는 天主敎(천주교) 집안 출신이었으나, 어머니는 改新敎(개신교) 집안 출신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어머니를 따라 개신교식으로 교육을 받았다. 종교에 관한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종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널리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에르하르트는 자신의 성격이 內省的(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外向的(외향적)인 점, 대중들과 쉽게 접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沈潛(침잠)하여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보기도 하는 상반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는데, 이 또한 부모의 상반된 성격을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에르하르트는 『아버지는 무언가를 작정하면 반드시 성취하고자 하는 열의를 가진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데 반해 어머니는 대중들의 시선을 피하는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에르하르트는 태어나면서부터 모진 고난을 겪는다. 두 살 때에는 척수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아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다리는 심하게 굴절되고 허약해져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에르하르트는 불구임에도 1916년 軍에 자진 입대했다. 포병으로 복무하던 에르하르트는 1918년 가을 서부전선에서의 전투 중 포탄에 맞아 왼쪽 어깨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는 여러 병원을 전전하면서 일곱 차례에 걸쳐 수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어깨를 잔뜩 치켜올린, 약간은 부자연스런 그의 모습은 이때의 부상으로 인한 것이다. 원래 에르하르트는 전쟁이 끝나면 家業(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이었지만, 전쟁터에서 불구가 된 몸으로 그가 육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크게 낙담을 하고 있던 에르하르트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다른 대학과 달리 신설된 뉘른베르그 고등상업학교(상과대학)에서 고등학교(Gymnasium) 졸업장이 없는 그에게도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에르하르트는 당초 청강생으로 입학을 하여 공부를 하면서 학문에 대한 흥미를 강하게 느낀다. 하지만 아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능력을 이해하지 못한 그의 아버지는 학업을 계속하는 것은 의미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만 둘 것을 권했다.

이러한 아버지를 설득하여 그로 하여금 청강생이 아닌 정식학생으로 학업을 계속할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은 뉘른베르그 고등상업학교의 초대 학장이면서 자유주의 시장경제론자였던 리거(W. Rieger) 교수였다. 자신의 학생들 중 가장 열심이면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에르하르트를 평소 눈여겨 보아오던 그는 학문적인 업적을 쌓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자식의 장래를 왜 막으려 하느냐며 에르하르트의 아버지를 설득했다. 그는 에르하르트에게 경영학과 경제학에 눈을 뜨도록 하여 학문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훗날 독일 경제부흥의 아버지로까지 칭송을 받는 인재를 발굴한 공로가 더 크지 않을까?

프란츠 오펜하이머의 제자가 되다

1922년 에르하르트는 뉘른베르그 고등상업학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때 같이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에르하르트의 아내가 되는 루이제(Luise)였다. 그녀는 에르하르트보다는 4년 연상으로 어린 시절 휘르트에서 이웃으로 같이 자랐고 누나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1914년 변호사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고 뷔르츠부르그(Wuerzburg)에서 살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남편이 전사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있었다. 직업을 갖기 위해 뉘른베르그 고등상업학교에 다니던 루이제는 그곳에서 에르하르트와 재회했고, 두 사람은 1923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평생동안 서로를 루(Lu)와 룰루(Lulu)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남다른 부부애를 보여 주었다.

당시 에르하르트는 경제학, 특히 통화금융론에 관심이 많았다. 가격을 안정시키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의무라고 배웠지만 현실에서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1달러당 5마르크이던 환율이 패전 후에는 달러당 수백만, 수십억 마르크가 되었던 것이다. 富益富(부익부) 貧益貧(빈익빈)이 심화되고 가난해진 중산층과 근로자들은 極右(극우)나 極左(극좌) 논리에 쉽사리 동조하게 되고 결국은 히틀러의 등장을 맞게 된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에르하르트는 경제장관 시절 통화안정에 주력하는 경제정책을 펴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인플레가 어떻게 국가질서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며, 조금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선동정치가(Demagogue)와 정치 사기꾼들에게 힘을 실어주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인플레야말로 한 민족의 물질적·정신적 위기상태가 정치적 야바위꾼들에 의해 어떻게 惡用될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경영학 석사를 받은 후 에르하르트는 1922년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가서 프란츠 오펜하이머(F. Oppenheimer)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된다.

오펜하이머는 원래 의사로서 약 10년간 의사 생활을 하다가 사회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학과 이론경제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의사 시절 가난한 근로자들을 많이 진료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와는 생각이 달랐다. 그의 「자유주의적 사회주의」(Liberaler Sozialismus)는 본인 스스로도 밝혔듯이 공산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된 형태의 유토피아 사회주의(Utopischer Sozialismus)로서 國有化와 계획경제가 배제된 자유로운 시장경제, 경쟁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원칙에 입각한 경제시스템을 지향하고 있다.

『내 이론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근절한다」고 하는 목표를 자유경쟁의 배제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자유경쟁을 사람들이 부당하게 오해함으로써 덧씌워져 있는 족쇄를 풀어버림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심리와 경제의 관계에 눈을 뜨다

자유경쟁에 대한 이상,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 형성의 가능성, 압력단체들의 활동에 내재되어 있는 위험, 국민경제의 일반이익에 대한 공헌 및 국민경제의 임무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생각들은 에르하르트에게 강하고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5년 12월12일 에르하르트는 오펜하이머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박사학위를 취득할 당시 오펜하이머는 해발 3000m의 스위스 알프스 산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에르하르트에게 「이곳으로 와서 박사학위 청구논문에서 밝힌 당신의 테제(These)를 방어해 볼 것」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스위스의 알프스 산정에서 케이블카를 타면서 口頭試驗(구두시험)이 이루어졌고, 이 시험이 끝나자 오펜하이머는 에르하르트에게 「이제 자네는 최고점수를 받은 박사가 되었네」라며 제자의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해 주었다.

오펜하이머와 에르하르트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관계 이상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친구가 되었고 이후 약 10년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유대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나치의 탄압이 심해지자 해외로 피신, 1943년 미국의 LA에서 사망하였다.

1928년 가을부터 에르하르트는 자신이 공부했던 뉘른베르그 고등상업학교에 설립된 「뉘른베르그 경제조사연구소」 연구조교로 근무를 시작한다. 이 연구소의 소장인 훼르스호펜(W. Vershofen)은 고등상업학교 경제학교수로서 시장조사 및 분석분야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에르하르트는 조교로서 또 동료로서 훼르스호펜과 향후 14년간 일하게 된다.

훼르스호펜은 아주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실물분야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가진 경제학자일 뿐만 아니라 문필가이면서 詩人이었고 또 철학자였다. 그는 냉장고, 세탁기, 자동차와 같은 물질적 재화 못지않게 인간의 윤리적·심리적 측면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의 심리를 중시하는 훼르스호펜의 관점은 에르하르트의 경제에 대한 思考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경제에서는 오늘날 많은 국민경제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심리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경쟁에 바탕을 둔 자유시장경제가 도입되어 시행되는 사회에서 개개인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따라서 그들이 공포감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없고 또 미리 정확히 예견할 수도 없는 세계에서 그 누구도 미래에 대한 공포감을 지울 수는 없다.

1948년 당시 에르하르트는 이러한 공포감이 극도에 달해 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자유시장경제의 도입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았다. 「자연적·경제적·도덕적 이해관계에 가장 적합한 경제질서가 바로 자유시장경제질서」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고 안심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느낀 에르하르트는 전국을 순회하며 호소하고 설득하는 작업을 부단히 했다.

괴르델러 의뢰로 戰後 재건 계획 작성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갖고 씨름하면서 자유주의, 관용,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에르하르트로서는 자유와 민주를 짓밟는 나치정권과 타협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치를 「정신적으로 미숙하며 정치적으로 무지하다」고 경멸했다.

그는 나치당 입당을 거부했고 나치교수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의무화되어 있던 인사말인 「하일 히틀러」(Heil Hitler)대신 그는 일반인은 물론 연구소를 찾아오는 黨간부들에게조차 「신의 은총을」(Gruess Gott)이라는 기존의 인사말을 고수했다.

그의 이러한 소신은 자신의 母校인 뉘른베르그 고등상업학교의 교수가 되려던 그의 꿈을 무산시켰다. 그는 연구소 일에만 전념했다. 1942년 그에 대한 정권의 압력이 더욱 거세지고 나치의 노동전선에 가입할 것을 종용받자 에르하르트는 연구소를 떠난다.

그해 末 에르하르트는 매부인 구트(K. Guth)의 도움을 받아 「독일산업연구소」를 설립한다. 여기서 에르하르트는 나치정권의 경제적촵재정적 혼란에 대해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경제통제주의」라는 경제시스템과 「전체주의」라고 하는 정치시스템 간의 밀접한 관련성에 대해 연구하면서, 敗戰 後 독일의 경제시스템에 대한 구상도 하기 시작한다.

1944년 初 에르하르트는 反나치 운동가인 前라이프치히 市長 괴르델러(C.F.Goerdeler)로부터 敗戰 이후 독일경제를 재건할 수 있는 경제 및 재정정책에 대한 연구를 해보라는 요청을 받는다. 1944년 7월 에르하르트는 「戰費(전비)조달과 國債(국채)정비」라는 제목의 戰後경제재건보고서를 작성, 괴르델러에게 보낸다.

비슷한 무렵 괴르델러는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 비밀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에르하르트도 한동안 가족과 떨어져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딸인 엘리자베트(Elisabeth)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서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다.

한편 괴르델러는 피신생활 중에 자신의 정치적 유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독일 미래를 위한 임무」라는 글을 쓴다. 여기서 그는 「戰後 나치 제3제국이 남긴 엄청난 규모의 전쟁부채문제를 해결하고, 전쟁 중 급격히 팽창한 통화량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화폐개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로 에르하르트를 적극 추천했다 (괴르델러는 결국 체포되어 1945년 2월 처형된다).

『뉘른베르그 독일산업연구소의 에르하르트 박사는 이 문제에 대한 매우 훌륭한 논문을 작성했으며, 그의 의견에 본인도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 사람이라면 여러분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입니다』

질서자유주의와 접하게 되다

1945년 5월 終戰(종전)이 되자 에르하르트는 美 점령군에 의해 고향인 휘르트의 경제책임자로 발탁된다. 이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여 능력을 인정받은 에르하르트는 이후 미국인들과 돈독한 신뢰를 구축하면서 자신의 정치역정을 시작하게 된다. 그 자신의 말대로 그는 미국인에 의해 발탁되어 정치인생을 시작한 것이다. 이 때 그의 나이 48세.

1945년 10월 에르하르트는 점령군下의 바이에른 州정부의 경제장관으로 발탁된다. 이 州정부는 사회민주주의자인 회그너(W. Hoegner)가 이끌고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그때까지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고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각료명부에는 「左派 민주주의자」로 분류되어 있었다. 1946년 州의회 선거가 실시되어 기독교사회당(CSU·독일의 保守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의 姉妹黨으로 바이에른州에서만 존재하는 정당)과 사회민주당(SPD)의 연립정부가 들어섰다. 아무런 黨籍(당적)도 없는 에르하르트는 公職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공직에서 물러난 에르하르트는 경제 및 통화개혁에 대한 구상을 다듬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뮌헨大 경제학과 교수 베버(A. Weber)를 중심으로 한 연구모임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일단의 자유주의 학자들과 활발한 의견교환을 하게 된다.

베버 교수는 오이켄(W. Eucken)의 질서자유주의를 따르는 학자로서 나치정권 下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결코 굽히지 않았던 사람이다. 다른 프라이부르그 學派 학자들처럼 베버 교수도 자유경쟁에 기반한 시장경제를 지지하며, 「정부의 경제정책은 안정된 질서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시장경제 과정에 자의적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철저히 견지했다.

베버 교수와 그가 이끌던 연구모임을 통해 에르하르트는 질서자유주의를 접하게 되고, 이는 그의 「사회적 시장경제」의 이론적·이념적 바탕이 된다. 1947년 에르하르트는 뮌헨대학의 경제학과 명예교수로, 1950년에는 본대학의 법학-경제학부의 명예교수로 위촉된다.

『현재의 貧困을 균등하게 나누는 것은 안 된다』

패전 독일의 경제상황은 비참과 혼란 그 자체였다. 1000만 명이나 되는 난민들이 떠돌아다녔고, 전체 가옥의 40%가 파괴되었으며 국민의 60%는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미군을 비롯한 점령군들은 戰時(전시)경제의 통제경제조치들을 그대로 고수했다. 식량과 여타 소비재는 배급권을 받고 분배되었다. 원료 및 주요 원자재는 생산 및 공급규정 비율에 따라 할당되었다. 가격 및 임금 동결은 여전히 有效했다. 수·출입도 통제를 받았다.

暗시장과 物物교환이 성행하고 살인적인 超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커피나 담배 등이 화폐 대신 사용되었다. 美軍의 담배가 대체화폐로 사용된 것과 관련하여 시장경제원리가 어김없이 적용되는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발견되었다. 즉 1948년 6월경 美軍 담배한 갑의 가격은 평균 6마르크 정도였는데, 이 가격이 지역에 따라 약간씩 편차가 있었다. 美軍이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는 남부에서는 공급이 풍부해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았고,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약간 비싸게 거래된 것이다. 수요공급 이론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현상이었던 셈이다.

물자가 부족하고 혼란한 상황에서는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조종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은 물론 기독교민주당內 상당수 左派인사들도 사회주의적 경제질서를 옹호했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을 거슬러 독일에서 경쟁에 의한 국가권력의 제한과 사유재산에 바탕을 둔 자유시장경제가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全的으로 에르하르트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시장경제질서의 효율성을 신뢰했고, 독일 경제의 再建을 위한 분명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사회주의 경제 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기적을 믿는 사람들」, 「현실을 모르는 공상가들」이라 비판하면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통제 및 後見이라는 족쇄를 제거하는 것만이 경제재건을 위한 가장 확실한 代案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경제재건의 첫걸음을 화폐개혁으로 보았다.

이러한 에르하르트의 구상은 그가 1948년 4월 美·英 점령지역의 경제국장으로 발탁되면서 현실화된다. 경제국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에르하르트는 경제위원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독일 경제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 개의 중요한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중 하나가 화폐개혁이다. … 국민들을 좀더 나은 삶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화폐개혁 하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통제경제가 철폐되어야만 한다. 「현재의 貧困(빈곤)을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좀더 많은 것을 생산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제경제는 철폐되어야 한다』

『天地가 開闢했다』

1948년 6월17~18일 경제위원회 총회에서 에르하르트는 「화폐개혁에 관한 근본지침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화폐개혁에 착수한다.

새로운 독일 마르크貨(DM)가 분배되기 바로 전날인 6월20일, 에르하르트는 점령군측과 사전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전격적으로 가격 및 경제통제에 관한 조치들을 대부분 철폐시켜버린다. 1936년 이래 유지되어오던 가격정지제도는 물론 가격통제조치의 약 90%가 해제되었다. 임금동결조치가 해제되고 영업의 자유가 도입되었다. 에르하르트의 화폐개혁은 이러한 경제개혁에 의해 뒷받침되었으며, 결국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화폐 및 경제개혁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당한 연합국 측은 불만을 터트렸다. 美軍政장관 클레이 장군(General L.D.Clay)은 에르하르트를 불러 규제조치들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연합국 측의 승인을 받도록 되어 있는데, 왜 그러한 절차를 밟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했는가를 따졌다. 이에 대한 에르하르트의 대답이 걸작이다.

『규제조치들의 「변경」에 관해서는 당신들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한 일은 규제조치들의 「변경」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이번에 한 일은 규제조치의 변경이 아니라 아예 「철폐」시켜 버린 겁니다』

훗날 에르하르트는 이때의 경제자유화조치가 좀더 과감하고 광범위하게 실시되었어야만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위기가 진정되고 경제가 안정되자 남아 있는 규제를 철폐하고 자유시장의 영역을 확대시키는 일이 수많은 이익단체들의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르하르트가 실시한 화폐개혁과 경제자유화조치의 놀라운 효과에 대해 프랑스 경제학자 뤼프(J. Rueff)는 『天地가 開闢(개벽)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暗市場이 갑자기 사라졌다. 가게들의 진열장은 상품들로 가득 찼고, 공장 굴뚝에서는 연기가 났으며, 길거리에는 화물차들이 내달렸다. 폐허의 고요함은 사라지고 곳곳에서 건설현장의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이러한 경제재건의 범위도 놀랍지만, 그 갑작스러움은 더욱 놀랍다. 이 再建의 활기는 화폐개혁이 시작되는 날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서 모든 경제활동영역에서 일제히 시작되었던 것이다』

1948년 末까지 공업생산은 평균 50% 증가, 1936년 수준의 거의 80%에 이르렀다. 화폐개혁에 의한 시장경제체제의 도입이야말로 죽어서 무덤에 누워 있던 독일이라는 시체에게 「일어나 걸어라」고 하는 福音(복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시장경제의 폐해는 시장경제적 정책을 통해 제거해야』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증가된 구매력과 그동안 억눌려 왔던 구매욕구가 한꺼번에 터지면서 물가가 상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사회민주당을 비롯한 시장경제 비판자들은 다시 통제경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동조합은 총파업을 선언하고 경제정책의 책임자인 에르하르트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해 에르하르트는 라디오방송에 출연하여 현재의 물가상승은 물가수준이 통화량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이며, 만일 여기서 가격통제를 다시 도입한다면 가게의 진열장은 텅텅 비고 暗市場이 성행했던 비참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폐해는 시장경제적인 정책을 통해서 제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의회의 多數決에 따라 추진되는 경제정책이 사회적·경제적 또는 정치적 이익집단들의 독재로 인해 무력화된다면 민주주의란 한낱 우스꽝스런 코미디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罷業은 우리 국민들의 아픔을 완화시켜 주고 감싸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加重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단호히 반대합니다. 여러분의 파업으로 인해 우리 국민들이 시급히 필요로 하는 수많은 소비재의 생산이 중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자 민주 자유시민으로서의 自覺(자각)을 하시고 자기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가는 안정되고 화폐개혁 이전인 1948년 6월 1.99마르크이던 근로자들의 시간 당 평균수입이 1950년에는 2.38마르크까지 상승하자 시장경제질서와 에르하르트에 대한 반대가 지지로 바뀌었다.

에르하르트와 시장경제질서의 승리는 곧 반대자들의 퇴조와 변화를 의미했다. 1949년 10월 「독일노조연맹」(DGB)은 창립식에 경제장관 에르하르트를 귀빈으로 초청, 그의 연설을 경청했다. 기독민주당(CDU)內에서 시장경제와 에르하르트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생산부문 社會化 요구를 철회했다. 사회민주당(SPD)도 그보다 한참 후인 1959년 「고데스베르그 강령」에서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민주당에 가서 그곳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로 만들라』

1949년 9월 西獨 총선이 실시되었다. 西獨 최초의 총선을 맞이하여 그동안의 경제정책 성과로 인해 全국민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에르하르트를 영입하고자 기독교민주당과 자유민주당은 경쟁을 벌였다.

기독교민주당보다는 자유민주당에 가까웠던 에르하르트는 자유민주당 총재 호이스(Heuss) 교수를 만나 자신의 진로에 대해 논의했다. 두 사람은 에르하르트의 경제정책 구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자유민주당 같은 작은 정당보다는 기독교민주당이라는 거대정당에서 일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호이스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자유민주당은 이미 충분히 자유주의적이에요. 기독교민주당에 가셔서 그곳 사람들을 자유주의자로 만드는 것이 더 뜻있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기 黨의 勢(세)를 불리기 위해 「표적수사」는 물론 「의원 꿔주기」까지도 서슴지 않는 우리의 정치현실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멋진 모습이 아닌가.

에르하르트는 19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정식으로 기독교민주당에 入黨한다. 하지만 그는 非당원이면서도 바덴-뷔르템베르그(Baden-Wuertemberg) 지역에서 기독교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어 에르하르트는 기독교민주당의 아데나워(Adenauer) 정부에서 14년 동안 연방 경제장관으로, 1963년부터 1967년까지는 연방수상으로 「사회적 시장경제」를 차근차근 추진하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어 낸다. 질서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대표적 주자인 오이켄(W. Eucken)과 뢰프케(W. Roepke) 등에 의해 그 틀이 형성된 「사회적 시장경제」가 에르하르트를 통해 실천에 옮겨진 것이다.

에르하르트에 의해 기초되었다고 하는 기독교민주당의 1949년 뒤셀도르프(Duesseldorf) 기본강령을 보면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유롭고 근면한 인간이 성과를 통해서 최대의 경제적 효용과 사회적 正義를 실현시키는 질서를 내용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이 「사회적 시장경제」는 우선 중앙관리 통제경제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중앙에 의해 통제되는 경제에는 합리적인 경제계산을 할 수 있는 가격기구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자원을 非효율적으로 배분시키고 생산과 소비수준을 전반적으로 하락시키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통제경제下에서는 필연적으로 全體主義 내지 集産主義(집산주의)가 형성되어 인간의 자유가 박탈된다는 점이다. 하이에크(F.A.v. Hayek)가 「노예로의 길」에서도 밝혔듯이 경제에 대한 통제를 허용하는 것은 곧 인간생활 전반에 대한 통제로 이어지는 지름길을 닦아 주는 것과 다름없다.

한편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유방임 경제질서와도 구별된다. 자유방임下에서 경제주체들이 獨占(독점)을 형성하여 시장경제가 제대로 기능을 하도록 만드는 가격기구를 훼손시키고 私的 권력의 집중이 발생했으며, 이 獨占이라고 하는 私的권력은 公權力과 함께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적 시장경제」는 公益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국가 행정기관의 강제권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독점에 대해서도 시민을 보호해야 한다. 즉 「사회적 시장경제」에서는 독점을 방지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정부의 개입은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는 것에 한정해 야 하며 경제과정 및 민간의 경제활동 그 자체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노동력의 독점 단체인 勞組의 독점권도 제한되어야

기업들의 경제력 집중은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므로 反독점정책을 통해 이를 제거·방지해야 한다고 보았던 에르하르트는 勞組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 勞組도 노동력의 독점단체이며, 이것이 지나치게 강대해져 독점권을 행사하게 되면 기업에 대한 反독점정책과 마찬가지로 정부가 간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다.

에르하르트는 勞組의 힘이 강대해질 경우, 賃金(임금)은 자칫하면 기업의 수익이나 경제 전체의 생산력 이상으로 오르려는 경향을 보이며, 그렇게 되면 기업의 경쟁력은 저하되고 경제성장이 지체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원자폭탄이 가능한 세상이라도 생산하는 것 이상으로 소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노조는 경제성장을 통해 장래에 더 큰 果實을 먹으려 하기보다는 현재의 조그만 果實을 즉시 먹고 싶어 분배만을 강하게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에르하르트는 이를 「참으로 유치한 사고방식」이라 비판한다.

그러면서 에르하르트는 『한편으로는 임금을 높이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경제성장을 도모하라고 요구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일부러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여 사태를 어지럽게 만들고, 그것을 틈타 혁명의 계기를 잡으려고 하는 짓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에르하르트는 『과도한 임금인상은 그것이 인플레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에르하르트는 勞組에 대해 自重할 것을 이렇게 요청한다.

『나는 노동조합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나라 통화안정에 책임 있는 태도를 취할 것을 기대한다. 왜냐하면 책임이 없는 자유란 혼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르하르트는 「독일의 세계시장으로의 복귀」(1953)라는 책에서 경제개혁이 정상궤도에 올랐음을 선언하면서 그 비결은 국내외를 막론한 자유시장 경제정책이었음을 밝힌다.

『對外무역의 신장은 자신의 動脈(동맥)과 세계경제라는 동맥을 상호 연결하면서 세계 전체의 복리증진에 기여한다. 戰後에 우리는 이 길을 선택했고 세계 전체의 자유무역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우리가 우리의 시장을 개방할수록 외국도 우리에게 문을 열어오는 것이다. … 경제적 국가주의에 의한 통상정책은 세계경제를 파괴하며, 그 정책수단이 되는 것은 보호무역주의와 外換(외환)통제로서 궁극적으로는 강제경제 그 자체이다. 우리의 통상정책은 이와 같은 통제를 배제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경제발전정책이 가장 좋은 사회보장정책

이어 「萬人을 위한 복지」(1959)에서는 사회보장과 복지정책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국가에 의한 사회보장=복지국가」를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에르하르트의 이상이 아니다.

에르하르트는 국가 주도에 의한 복지국가의 건설을 대단히 非합리적이고 非경제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다. 우선 국가에 의한 복지정책은 엄청난 재정팽창을 유발하며, 이는 결국 경제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을 저해하는 심각한 해악인 인플레를 유발하게 된다.

주택이나 의료서비스 등을 국가가 제공하고 국민은 그것을 無料 내지는 低價(저가)로 이용하면 좋을 듯하지만, 사실은 매우 非경제적인 방법이다. 민간기업이 이러한 財貨(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는 경우에는 경제성에 기초하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경영을 추구하지만, 국가나 관료들의 손을 거치게 되면 낭비와 非효율이 초래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필요한 경비는 결국 세금을 납부하는 국민의 부담이 된다. 정부 관료들은 이러한 낭비와 非능률로 인한 과도한 비용을 제거하려 노력하기보다는 公益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불해야 하는 必要惡(필요악)으로 호도하면서 세금인상을 통한 간편한 해결책을 찾는다.

결국 정부에 의한 사회보장정책에 의해 국민들은 편익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구입하는 것뿐이다. 그것도 민간기업에서 구입할 때보다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하르트에 있어서는 정부에 의한 사회보장정책은 불필요하다. 에르하르트는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정책이야말로 가장 좋은 사회보장정책이며, 경제정책이 성공할수록 사회보장정책은 필요가 없어진다』고 역설한다.

에르하르트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果實만을 향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결코 가까이 하지 않았다. 사회보장이나 복지정책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에르하르트가 볼 때 그들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않으면서 오로지 남의 것에 의지해서 조용하고 안이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교활한 태도를 숨기고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다. 자신의 생활을 가능한 한 국가의 손에 맡기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국가에 의한 사회복지정책이 과도해진 복지국가는 「계급이 없는, 그러나 魂이 없는 기계화된 사회」를 만든다는 것이 에르하르트의 결론이다.

그는 국민들에게 국가에 의존하려 하지 말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는 용기를 가질 것을 호소한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해 주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는 내 자신의 노력에 기초하여 내가 내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나는 나 자신의 운명의 책임자이고자 한다」』

「에르하르트라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까?」

에르하르트는 1977년 5월, 8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신의 평생을 지배했던 생각을 그는 이렇게 술회했다.

『자유시장경제만이 우리에게 자유와 福利를 안겨 줄 수 있다. 자유란 하나이며 그것은 결코 나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자유, 경제적 자유, 인간적 자유는 통합된 하나의 통일체이다. 이 통일체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그 중 일부분만의 자유를 따로 떼어내어 유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철부지의 생각이다』

그가 경제장관으로서 또 수상으로서 독일과 독일 국민에게 남긴 엄청난 발자취와 업적은 현재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하이에크(F.v. Hayek)는 에르하르트를 이렇게 평했다.

『終戰 後 독일이 그 결정적 순간에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한 자연스러운 능력을 지닐수 있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행운이었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을 만나보았고, 그 중에는 정말 박식하고 훌륭한 분들도 많았지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認知(인지)해 내는 능력에 있어서는 에르하르트가 단연 최고였다. 그는 외국은 물론 독일 국내에서 알려진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독일의 자유로운 사회 재건에 엄청난 역할을 해냈다』

뢰프케(W. Roepke)는 그가 이룩한 업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칠이 말한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경구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극소수의 사람, 아니 단 한 사람이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가를 알기 위해서, 만일 그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신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만 해본다면, 그에게 자신들의 삶을 감사해야 하는 사람은 인류 역사상 그렇게 많지 않다』

1990년대 초반 통일이 이루어질 때 東獨,西獨 모두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었고 東獨의 통제경제를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이미 사망한 에르하르트를 다시 찾았다.

「에르하르트라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까?」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사회복지정책이 과도하게 팽창했고 경제는 유연성을 상실하여 미래가 불투명해진 독일은 경제 및 사회복지정책의 대대적인 개혁의 필요성에 직면해 있다.

현재 그들은 또 다시 에르하르트를 애타게 찾고 있다. 안팎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평등과 복지에 대한 욕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에르하르트라면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할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청소년을 위한 세계 경제사^^^
석혜원 | 두리미디어 | 2007.06.15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간에 무역도 협상이나 협정 등을 통해 규제되어서도 안 됩니다. (중략)루드비히 에르하르트는 1963년 서독의 2대 총리로 취임했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로 기록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독일...

^^^▲ 앙겔라 메르켈^^^
게르트 랑구트 | 서유리 | 이레 | 2005.12.20

'교부(敎父)'에 비유한다면 그 대상은 서독의 첫 번째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보다는 경제 전문가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일 것이다.

어떤 정책이나 개혁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 헬무트 콜의 정치 스타일은 메르켈과는 달랐다. 물론...

^^^^^^▲ 앙겔라 메르켈^^^^^^


Ludwig Erhard

The German statesman Ludwig Erhard (1897-1977) is credited with the decisions that resulted in West Germany's (now part of Germany) spectacular economic recovery following World War II. He served as chancellor of the Federal Republic of Germany from 1963 to 1966.

Ludwig Erhard was born in the northern Bavarian city of Fürth on Feb. 4, 1897. After serving in World War I, during which he advanced to the rank of sergeant and was badly wounded, Erhard resumed his business training. He continued his studies in economics and sociology at the progressive University of Frankfurt. After he received a doctorate, Erhard decided to devote his career to research rather than to business. He joined the staff of the Nürnberg Business School. From 1928 to 1942 he advanced from research assistant to director of the institution. The Nazis removed him from this position, however, after he refused to join the party. Erhard spent the remaining war years as a consultant to business enterprises.

Erhard's lack of compromising political ties and his reputation as an economic expert made him a likely candidate for the administrative posts set up by the Western Allied governments that occupied Germany after 1945. First Erhard was charged with the reconstruction of the war-ravaged industries of his native Fürth-Nürnberg area. Late in 1945 he was named economics minister in the Bavarian state government. After losing this post in 1947, Erhard was named to key positions in the council set up jointly by the British and American occupation authorities to coordinate economic activities in their zones.

Pushed Social Market Economy

Erhard's economic views were summarized in his advocacy of a "social market economy," which one author has called a "free economy with a social conscience." Erhard wished to use private initiative to rebuild the shattered German economy but to check it when it tended toward monopoly, cartelization, or extreme labor union demands.

Erhard well understood the inefficiencies that come with price controls. He had authored a memorandum during the war outlining his vision for a market economy in Germany. In 1947, the Allies, who wanted Germans with no ties to the fallen Nazi regime for the new German government, named Erhard the main economic adviser to U.S. General Lucius D. Clay, military governor of the U.S. zone. Erhard advocated a quick reform of the currency system and the decontrol of prices.

After the Soviet withdrawal from the Allied Control Authority, General Clay, along with his French and British counterparts, undertook a currency reform on Sunday, June 20, 1948. The amount of currency in circulation was dramatically reduced (by a factor of slightly more than 90 percent). Under the reform mapped by Erhard, the new legal currency, the Deutschemark, was substituted for the old Reichsmark. With the sharp contraction in the German money supply, he reasoned, there would be far fewer shortages because the controlled prices would now be stated in Deutschemarks. On the same day, over the strong objections of its Social Democratic members, Germany's Bizonal Economic Council adopted a price decontrol law that gave Erhard the authority to eliminate price controls. Between June and August of 1948, Erhard decontrolled the prices of vegetables, fruits, eggs, and almost all manufactured goods. He substantially relaxed, or simply suspended enforcement of, other price ceilings.

At the same time, the government, following Erhard's advice, cut taxes sharply. Walter Heller, a young economist with the U.S. occupation forces who was later to become chairman of President Kennedy's Council of Economic Advisers, wrote in 1949 that to "remove the repressive effect of extremely high rates, Military Government Law No. 64 cut a wide swath across the German tax system at the time of the currency reform." Individual income tax rates, in particular, fell dramatically. Previously the tax rate on any income over 6,000 Deutschemarks had been 95 percent. After tax reform, this 95 percent rate applied only to annual incomes above 250,000 Deutschemarks. For the German with an annual income of about 2,400 Deutschemarks in 1950, the marginal tax rate fell from 85 percent to 18 percent.

Economy Surged

The immediate effects of these Erhard-designed reforms on the German economy were dramatic. Another U.S. economist with occupation forces wrote that the "spirit of the country changed overnight. The gray, hungry, dead-looking figures wandering about the streets in their everlasting search for food came to life." On Monday, June 21, only a day after the announcement of currency reform, shops filled with goods as people realized that the money they sold them for would be worth much more than the old money. The reforms, wrote Heller, "quickly re-established money as the preferred medium of exchange and monetary incentives as the prime mover of economic activity."

Another phenomenon was observed in the wake of the reforms: Absenteeism, which only a month earlier was averaging more than nine hours a week, was reduced significantly. Workers who had stayed off the job to forage and barter for life's necessities found that it was no longer imperative for them to do so. By the fall of 1948, the absenteeism rate had dropped to about four hours. In the second half of 1948, Germany's industrial output rose by more than 50 percent. This growth continued to be extremely strong over the next ten years, with industrial production per capita in 1958 measuring three times its level in the six months preceding the June 1948 reforms. What looked like a miracle in reality was not. Erhard expected these results because he knew full well the damage that had been wrought by inflation, coupled with price controls and high tax rates. In turn, he also was well aware of the large productivity gains that could be unleashed by ending inflation, removing price controls, and slashing high marginal tax rates.

Named Economics Minister

Immensely popular with the German people as a result of the economic reforms, Erhard joined Konrad Adenauer's Christian Democratic Union (CDU) only shortly before the first West German parliamentary election in 1949. When the party was victorious in those elections, Erhard became economics minister in the Adenauer government, in which post he remained until he succeeded the aging and increasingly unpopular Adenauer as chancellor in 1963. Erhard led his coalition government (CDU/CSU and Free Democrats) to victory in the 1965 election, after which he actively supported a normalization of relations with the countries of the Warsaw Pact. On March 25, 1966, his government sent a peace overture to the Warsaw Pact, proposing a renunciation of force. The failure to include East Germany in this initiative resulted ultimately in its failure. Erhard and his foreign minister, Gerhard Schröder, were labeled "Atlanticists" for their support of stronger ties with the United States and the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 This focus on West Germany's relationship with NATO and the United States weakened the country's ties with France, which Adenauer had worked so hard to build up during his years as chancellor. Erhard soon found his position untenable as recession wiped away memories of the economic miracle and those he once had considered his friends, including Adenauer, sniping at him whenever possible. He was accused of both indecision and lack of experience in foreign affairs. He resigned in 1966 and was succeeded as chancellor by Kurt-Georg Kiesinger. Erhard later confided that "soon after I took office in 1963, I had the feeling that my party friends were no friends." A year after his resignation, he was named honorary chairman of the CDU.

Erhard spent the final decade of his life as a dignified elder statesman. He displayed no bitterness at what many felt was betrayal by his fellow members of the CDU. He wrote and consulted extensively in the area of his traditional expertise - the social market economy. When he died on May 5, 1977, he was lauded by his countrymen as "the father of the economic miracle." He was 80.

Further Reading

There is no biography in English of Erhard and no major scholarly work in any language. There are informative discussions of Erhard in Arnold J. Heidenheimer, The Governments of Germany (1961; 2d ed. 1966). See also Michael Balfour, West Germany (1968), and Henry Walton, Germany (1969). Further information on Erhard may be found in Wayne C. Thompson et al., Historical Dictionary of Germany (1994); James A. Moncure, editor, Research Guide to European Historical Biography: 1450-Present (1992); and in the entry on Ludwig Erhard on Britannica Online at http://www.eb.com.

Life and work

Born in Fürth, Germany, from 1913 to 1916 Erhard was a commercial apprentice. After his apprenticeship he worked as retail salesman in his father's draper's shop.

He joined the German forces during World War I 1916 as an artilleryman, fought in Romania and was seriously injured near Ypres in 1918. Erhard could no longer work as a draper and began to study economics, first in Nuremberg, later in Frankfurt am Main. He received his Dr. oec. from Franz Oppenheimer in 1925.

During his time in Frankfurt he married Luise Schuster. After his graduation they moved to Fürth and he became executive in his parents' company in 1925. After three years he became assistant at the Institut für Wirtschaftsbeobachtung der deutschen Fertigware, a marketing research institute. Later, he became deputy director of the institute.

Due to his injuries, Erhard did not have to join the German military forces during World War II. Instead, he worked on concepts for a postwar peace; however, such studies were forbidden by the Nazis, who had declared Total war. As a result, Erhard lost his job in 1942 but continued to work on the subject privately. In 1944 he wrote War Finances and Debt Consolidation (orig: Kriegsfinanzierung und Schuldenkonsolidierung). In this study he assumed that Germany had already lost the war. He sent his thoughts to Carl Friedrich Goerdeler, a central figure in the German resistance against the Nazi government, who recommended Erhard to his comrades.

After the war Erhard became economic consultant for the American military administration of Bavaria who made him Minister of Economics in the Bavarian cabinet of Wilhelm Hoegner. After the American and British administration had created the Bizone, Erhard became chairman of the Sonderstelle Geld und Kredit in 1947, an expert commission preparing the currency reform.

In 1948 he was elected Director of Economics by the Bizonal Economic Council. On June 20, 1948, the Deutsche Mark was introduced. Erhard abolished the price-fixing and production controls that had been enacted by the military administration. This exceeded his authority, but he succeeded with this courageous step.

In 1949 he stood for election in a constituency in Baden-Württemberg for the first West German parliament after the war and gained a direct mandate. Later in the year he joined the Christian Democratic Union (CDU). In September, Erhard was appointed Minister of Economics in the first cabinet of Konrad Adenauer. His party made his concept of social market economy part of the party platform.

After the resignation of Adenauer in 1963, Erhard was elected Chancellor with 279 against 180 votes on October 16. In 1965 he was re-elected.

On October 26, 1966, Minister Walter Scheel (FDP) resigned, protesting against the budget released the day before. The other ministers who were members of the FDP followed his example — the coalition was broken. On December 1, Erhard resigned. His successor was Kurt Georg Kiesinger (CDU), who led a grand coalition.

Erhard continued his political work by becoming a member of the West German parliament up to his death in Bonn on May 5, 1977. He is buried in Gmund, near the Tegernsee. The Ludwig Erhard-Berufsschule (professional college) in Paderborn and Münster are named in his honour.

^^^▲ IM KLARTEXT ,Informationen zur Sozialen Marktwirtschaft^^^
Ludwig Erhard
Lebenslauf

Ludwig Erhard wurde am 4. Februar 1897 in Fürth geboren. Er starb achtzigjährig, am 5. Mai 1977 in Bonn. Erhard gilt als Begründer der Sozialen Marktwirtschaft und des "deutschen Wirtschaftswunders".

Nach Schulbesuch und kaufmännischer Lehre trat Erhard als Einzelhandelskaufmann in das väterliche Textilgeschäft ein. Als Artilleriesoldat wurde er im Ersten Weltkrieg so schwer verwundet, daß er seinen Beruf nicht mehr ausüben konnte. Erhard begann ein Studium der Wirtschaftswissenschaften und der Soziologie, zunächst an der Handelshochschule in Nürnberg, dann an der Universität Frankfurt/Main. 1929 promovierte er zum Doktor der Wirtschaftswissenschaften bei Prof. Dr. Franz Oppenheimer.

Nach seinem Studium wurde Erhard wissenschaftlicher Assistent, bald danach stellvertretender Leiter am Institut für Wirtschaftsbeobachtung der deutschen Fertigware in Nürnberg. An diesem Institut erfüllte Erhard vielfältige Aufgaben: Er war verantwortlich für die Herausgabe der monatlichen Verbandszeitschrift, die sich in einem beachtenswerten Wirtschaftspolitischen Teil mit aktuellen Fragen der praktischen Wirtschaftspolitik beschäftigte; er organisierte Tagungen, zu denen er namhafte Persönlichkeiten aus ganz Deutschland einlud, daneben förderte er wissenschaftliche Arbeiten zu neu aufkommenden Fragestellungen und grundsätzlichen wirtschaftspolitischen Problemen.

Aufgrund seiner Verwundung war Erhard während des Zweiten Weltkriegs weder für den aktiven Kriegsdienst noch für Einsä tze in der Kriegsproduktion tauglich. Um so mehr sah er als seine Aufgabe an, die Grundlagen für den Aufbau einer Friedensordnung nach Abschluß des Kriegs gedanklich vorzubereiten. Solche Forschungsarbeiten waren im "Dritten Reich" verboten: Deutschland befand sich im "totalen Krieg". Erhards Überlegungen wurden bekannt. Er bekam Schwierigkeiten, verlor 1942 seine Anstellung und mußte selbstständig weiterarbeiten. Unter anderem stellte er 1944 seine Denkschrift "Kriegsfinanzierung und Schuldenkonsolidierung" fertig, die in Kreisen des Widerstands gegen den Nationalsozialismus als Grundlage für den Wiederaufbau angesehen wurde.

Nach Ende des Zweiten Weltkriegs nutzte die amerikanische Besatzungsmacht die Kenntnisse des politisch unbelasteten Wirtschaftssachverständigen Ludwig Erhard. Zunächst wurden ihm Aufgaben auf kommunaler Ebene übertragen. Im Oktober 1945 wurde Erhard zum Wirtschaftsminister in Bayern ernannt. Zwei Jahre später wurde er in die Sonderstelle Geld und Kredit berufen und zu deren Vorsitzendem gewählt. In dieser streng geheim tagenden deutschen Expertengruppe wurde die Währungsreform vorbereitet. Die Universität München verpflichtete ihn im November 1947 als Honorarprofessor.

Im März 1948 wählte der Wirtschaftsrat ein aus Abgeordneten deutscher Landtage gebildetes Parlament Erhard zum "Direktor der Verwaltung für Wirtschaft des Vereinigten Wirtschaftsgebiets". Erhard hatte damit lange vor Gründung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eine Position inne, die seiner späteren als Bundesminister für Wirtschaft entsprach.

Am 20. Juni 1948 wurde in den drei westlichen Besatzungszonen Deutschlands eine Währungsreform durchgeführt. Erhard verband diese Geldreform mit einer umfassenden Wirtschaftsreform: mit weitgehender Aufhebung von Bewirtschaftungen und Beseitigung zahlreicher Preisbindungen. Das war ein außerordentlich mutiger Schritt, denn keine deutsche Stelle war zu solch grundsätzlichen Veränderungen der wirtschaftlichen Ordnung im Besatzungsgebiet berechtigt. Erhards Reform erwies sich schnell als großer Erfolg. Freilich waren mit diesen Reformmaßnahmen die Hoffnungen vieler Politiker und Funktionäre auf eine sozialistische Wirtschaftsordnung zerronnen. Im November 1948 kam es deshalb zu einem Generalstreik gegen Erhards Wirtschaftspolitik. Dabei zeigte sich, daß überraschend viele Deutsche ihre Zukunft im Sozialismus suchten.

Am 23. Mai 1949 trat die neue deutsche Verfassung, das Grundgesetz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in Kraft. In der Wahl zum ersten Deutschen Bundestag kandidierte Erhard im Wahlkreis Ulm/Heidenheim. Der Wahlkampf stand ganz im Zeichen der Erhardschen Wirtschaftspolitik, ihrer Erfolge und Perspektiven. Die politischen Parteien, die Erhards Wirtschaftspolitik stützten, erhielten die Mehrheit der Stimmen. Erhard errang ein Direktmandat.

Am 20. September 1949 wurde Erhard als Wirtschaftsminister im ersten Bundeskabinett unter Bundeskanzler Konrad Adenauer vereidigt. Dieses Amt hatte er bis 1963 inne. Kennzeichen dieser Zeit waren hohe Wachstumsraten des Bruttosozialprodukts, bemerkswerte Lohnsteigerungen bei stabilen Preisen, hohe soziale Sicherheit bei ausgeglichenen öffentlichen Haushalten, Vollbeschäftigung und eine nachhaltige Verbesserung der deutschen Außenhandelsbilanz.

Am 16. Oktober 1963 wählte der Deutsche Bundestag Erhard mit großer Mehrheit zum Bundeskanzler. Am 1. Dezember 1966 trat Erhard von diesem Amt zurück. Auch in diesen drei Jahren hat Erhard viel erreicht: Er hat den inneren Frieden in Deutschland gefestigt und außenpolitisch die Grundlagen für eine neue Deutschland- und Ostpolitik gelegt. Er hat Hürden auf dem Weg zur europäischen Integration überwunden, das diplomatische Verhältnis zu Israel und zu den arabischen Staaten geklärt und der Welt in einer Friedensnote dargelegt, daß die Deutschen an einer dauerhaften Friedenssicherung tatkräftig mitwirken wollen. Erhard scheiterte als Bundeskanzler vor allem an parteipolitischen Auseinandersetzungen, konkret an seiner unbeugsamen Meinung, daß Staatsausgaben grundsätzlich von den Bürgern bezahlt werden müssen, denen die Staatsleistungen dienen, und nicht durch Staatskredite finanziert werden dürfen.

Erhard hat den Ruf, den er genoß, "Vater des deutschen Wirtschaftswunders" zu sein, häufig zurückgewiesen. Er hat erklärt, daß die Erfolge seiner Politik kein Wunder, sondern Folge einer gut bedachten Konzeption und konsequenter Politik seien. Zwei Grundzüge sind Kennzeichen seiner Sozialen Markwirtschaft:

Erhards wirtschaftspolitische Grundlage ist die Marktwirtschaft, wie sie theoretisch seit Adam Smith entwickelt wurde. Erhards Überzeugung ist aber, daß marktwirtschaftliche Politik jederzeit sorgfältig auf die jeweiligen sozialen Verhältnisse abgestimmt sein muß. Marktwirtschaft fördert die Effizienz der Wirtschaft. Die Politik der Sozialen Marktwirtschaft hat dafür zu sorgen, daß sich zugleich mit der Herstellung und Vervollkommnung der marktwirtschaftlichen Ordnung auch die soziale Lage der Bevölkerung verbessert und sich "Wohlstand für alle" ausbreitet. Erhard hat dies erreicht, indem er bei jeder aufkommenden Frage nach systematischen marktwirtschaftlichen Lösungen gesucht und punktuelle staatliche Interventionen ausgeschlossen hat. Heute fürchten Wissenschaftler, daß die Politik bei solcher sozialen Rücksichtnahme ihr Ziel, möglichst schnell und in möglichst vielen Wirtschaftsbereichen marktwirtschaftliche Verhältnisse einzuführen, aus den Augen verliert. Sie plädieren deshalb für eine prinzipielle markwirtschaftliche Politik ohne soziale Rücksichtnahmen. Politiker, die solchen Empfehlungen folgen, spüren jedoch schnell die Grenzen der Belastungsfähigkeit der Bevölkerung.

Neben der spezifischen Betrachtungsweise von Aufgaben und Methoden der Wirtschaftspolitik ist für Erhards Soziale Marktwirtschaft eine über die reine Wirtschaftspolitik hinausgehende Sicht kennzeichnend. Erhard hat die Wirtschaft als einen zentralen Lebensbereich angesehen, der angemessen geordnet sein muß, damit sich die gesellschaftlichen und sozialen Bedingungen zufriedenstellend entwickeln und Kultur und Humanität eine feste Verwurzelung erhalten. Wirtschaften war für Erhard nur Mittel zur Sicherung der Existenz, aber kein Selbstzweck. Erhard hat den weit verbreiteten Hang zu Materialismus entschieden bekämpft.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www.ludwig-erhard-stiftung.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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