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강의 기적, 이론적 토대 마련한 발터 오이켄
스크롤 이동 상태바
라인강의 기적, 이론적 토대 마련한 발터 오이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유주의 사상가 열전 (4)

^^^▲ 발터 오이켄^^^
『집단은 양심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집단은 어떤 경우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 反나치 투쟁,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後 비밀경찰에 체포되기도
●『만일 중앙관리정책을 추진하는 국가가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는 수단을 포기한다면 그 국가는 사람들을 계획한 대로 몰아갈 수 없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안정된 「질서의 틀」을 형성하는 것, 시장경제 과정에 恣意的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경제학의 냉철한 분석방법과 결과는 경제에 대해서는 門外漢이면서도 뜨거운 열정만을 가지고 토론의 場에서는 제일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國有化나 勞組의 경영참여에 의한 감시는 결코 獨占을 감독하는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
●『우리 독일인이 현재 이룬 업적은 바로 오이켄과 질서자유주의가 끼친 영향과 성과입니다』(1975년 프리드리히 獨 경제장관)

아버지는 19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시장경제에서 심판인 정부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해답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이다. 그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결과는 그의 死後에 발간된 대표적인 저작 「경제정책의 근본」(Grundsatze der Wirtschaftspolitik)에 있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에 결집되어 있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안정된 질서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어야 하며, 결코 시장경제 과정에 恣意的으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발터 오이켄은 1891년 1월17일 독일의 예나(Jena)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루돌프 오이켄(Rudolf Eucken)은 예나대학교의 철학과 교수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해설가이자 윤리학과 종교에 대한 저술가였으며, 19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오이켄의 어머니 이레네 오이켄(Irene Eucken)은 미술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젊은 오이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예술에 대한 오이켄 가족의 관심은 오이켄이 17세 때 호들러(F. Hodler)가 그린 예나대학교 대강당 벽화의 중심 모델이 되는 행운을 가져다 주었다. 이 벽화는 1813년 나폴레옹에 항거한 해방투쟁에서 학생들의 활약상을 그린 「예나 학생들의 궐기」라는 그림이다.

고향인 예나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오이켄은 대학에서 史學과 經濟學 중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고민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로 古代 경제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가 경제학 관련 서적들을 접하면서 생긴 진로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국 그는 경제학을 선택하고 킬(Kiel)대학과 본(Bonn)대학을 거쳐 예나대학을 졸업한다. 흥미롭게도 史學과 경제학에서 택일을 고민하던 그가 경제학을 택하고, 훗날 歷史學派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서게 된다.

졸업 후 오이켄은 다시 본으로 가서 그의 나이 22세 때인 1913년에 최고점수를 받으며 박사학위를 받는다. 곧바로 軍에 입대한 그는 제10 바이에른 야전포병연대에서 장교로 복무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맞이하고 1918년까지 戰場에서 보냈다.

오이켄이 부인인 에디트(Edith Eucken-Erdsiek)를 만난 것은 자신의 지도교수였던 슈마허(H. Schumacher)가 주관하던 한 세미나에서였다. 당시 29세였던 오이켄은 슈마허 교수의 조교로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학사와 철학, 경제학을 공부하던 25세의 에디트가 자신이 작성한 리포트를 발표하게 되었다.

그녀는 모르겐슈테른(Ch. Morgenstern)의 말을 인용하면서 발표를 마치는데, 세미나가 끝난 후 오이켄이 다가와 『아까 그 인용구, 누구의 말이죠?』라고 물어본 것이 서로 사귀게 된 단초였다고 한다. 약혼식 날 오이켄은 약혼녀인 에디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열심히 하면 학자로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은 공부는 좀 하지만 학자가 될 정도의 재능은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경제학자로서 효율적인 자원배분과 分業을 제안한 것일까? 아무튼 에디트는 그 이후 학문에는 뜻을 접고 남편을 內助하는 일에만 전념한다.

歷史學派와의 결별

독일에서 리스트(F. List) 이래 로셔(W. Rocher), 힐데브란트(B. Hildebrandt), 크니스(Knies) 등으로 이어져온 歷史學派는 리스트의 경제발전단계說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경제는 반드시 일정한 단계를 거쳐 발전하게 되며, 각 민족과 경제발전의 相異한 역사적 단계에 따른 相異한 경제학과 경제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근본적인 원리적 이론을 부정하면서 경제학의 국민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슈몰러(Schmoller)에 이르면, 경제학은 거의 전적으로 經濟史와 통계에만 의존하면서 하나의 이론체계를 수립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들의 국민주의적 성격과 국가규제 중심의 경제정책론은 自意든 他意든 나치의 이념과 정책에도 적잖은 기여를 하게 된다.

특정시기와 특정단계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이론을 인정해야 한다면 이는 결국 끊임없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경제환경 속에서 이론이 현실을 뒤좇아가기만 하면서 事後 설명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경제운용의 방향을 설정하고 구체적인 정책의 適否(적부)를 판단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오이켄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들만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기만 하던 歷史學派들이 현실 경제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도 찾지 못한 채 헤매다가, 이제는 위험천만하게도 증명도 되지 않는 발전단계 假說(가설)로 도망치고 있다고 질타한다.

「피곤해진 後期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주장 등은 무언가 유식한 냄새를 풍기는 단어들을 채용하여 멋있게 장식한 추측에 불과하며 고상한 척하는 사기행위이고 아주 세련된 선전선동의 속임수에 다름 아니라고 비판한다.

오이켄이 歷史學派에 대해 처음부터 비판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이켄의 박사과정과 교수자격 논문의 지도교수인 슈마허는 歷史學派의 일원이었으며, 당연히 오이켄의 논문도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훗날 오이켄은 종종 위 두 개의 논문, 특히 교수자격 논문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되뇌곤 했다.

오이켄의 생각에 변화를 준 커다란 사건 중 하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발생한 마르크貨의 엄청난 가치하락이었다. 통화의 가치가 끝도 없이 추락하는 현상에 대해 歷史學派는 아무런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국제수지의 赤字(적자)가 물가상승의 원인이므로 관세 장벽을 쌓아 自國 산업을 외국 산업의 경쟁으로부터 지키는 보호무역을 실시해 赤字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오이켄은 이 문제는 通貨이론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1923년 자신의 첫 번째 학문적 성과인 「독일 화폐문제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는 국제수지 赤字 자체가 通貨증발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국제수지의 赤字가 물가상승의 원인이라고 보는 歷史學派의 견해를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또한 국민경제가 부작용 없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화폐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결하며, 이를 위해서 통화량을 좌우하고자 하는 정치권의 입김을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폐가치의 안정과 중앙은행의 독립에 대한 그의 견해는 차후 전쟁보상 문제는 물론 연방은행의 설립 등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근본적인 정책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독일 연방은행의 독립성과 마르크貨의 안정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이는 오이켄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다.

『그러니까 영국 경제가 휘청거리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오이켄의 생각과 이론은 歷史學派에 속해 있는 슈마허와는 당연히 대립하게 되었다. 오이켄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저는 슈마허 교수의 입장이 절대적으로 근거가 박약하며 실제로도 매우 불행한 것이라고 봅니다. 저와 교수가 이번에 서로 논쟁을 한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 서로 간에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 우리는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슈마허 교수와 오이켄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인연은 또 한번 이어진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오이켄은 독일 대표단의 일원으로 점령지역 경제정책에 관한 논의를 위해 영국에서 파견된 행정관들과 만나게 된다. 회의가 시작되자 행정관들 중 영국의 노동당을 대표하여 참석한 사람이 아주 권위주의적인 태도로 점령지역에서의 해외교역에 관해 상세한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으며, 수입과 수출의 품목과 수량까지도 철저하게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이 끝나자마자 오이켄은 곧바로 반박한다.

『방금 전 당신이 말씀하신 내용은 아주 흥미롭군요. 왜냐하면 방금 하신 말씀이야말로 현재 여기에 어떤 국민경제적 질서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자신이 정말로 무지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말씀이니까요』

그러면서 오이켄은 가격체계도 부실하고 시장도 아직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물건을 얼마만큼 수입하고, 또 어떤 것은 얼마만큼 수출해야 올바른 것인지 판단하는 당신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행정관이 『자꾸 이론을 들먹이지 마시오. 우리 영국에서는 그렇게 합니다』고 하자 오이켄은 다음과 같이 쏘아붙인다.

『그러니까 영국 경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휘청거리는 것 아닙니까』

알고 보니 오이켄과 논쟁을 벌였던 이 사람이 바로 그 사이 영국 시민이 되어 있던 슈마허 교수의 아들이었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나치와 맞서다

1931년 오이켄은 뤼스토우(A. R..ustow), 뢰프케(W. R..opke)와 더불어 경제자유를 신봉하는 학자와 실무자들의 단체인 「독일 자유경제정책연합」을 결성하고 「독일 新자유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나치의 등장으로 곧 중단되고, 뤼스토우와 뢰프케를 비롯한 유대인 학자들은 해외로 탈출한다.

국내에는 오이켄만이 외로이 남아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때까지 프라이부르크大를 중심으로 자유경제사상에 대한 이론적 작업을 계속하면서, 反나치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33년 나치가 정권을 획득하자 뜻을 같이하는 전국의 교수들을 규합하여 히틀러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궐기대회를 열어 불신임 결의를 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즈음 저명한 철학자 하이데거(M. Heidegger)가 프라이부르크大의 신임 총장으로 부임해 왔다. 하이데거는 취임 강연 「독일 대학의 자기 주장」에서 나치운동의 위대함을 역설하며 나치의 지도자이념을 대학의 개혁이념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년여의 하이데거 총장 재임기간 내내 오이켄은 하이데거가 추진한 勞動과 格鬪技(격투기)의 교과과정 도입, 대학에 대한 통제 등에 반대투쟁을 전개하면서 하이데거에 반대하는 교수들의 실질적인 대변자 역할을 했다.

1935년경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은 더욱 적극적으로 되어갔다. 유대인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평등권이 法的으로 거부되고 수많은 유대인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받았다. 독일인으로서 오이켄은 자신의 심경을 일기장에 이렇게 적고 있다.

『방어능력도 없는 사람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하는 독일 민족이 저지르는 이 죄악은 반드시 독일 민족에게 엄청난 복수로 돌아올 것이다. 神은 복수하는 神이기도 하다』

이때 오이켄은 친분이 있던 유대인들을 박해로부터 보호하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와 준다. 그가 도와 준 유대인 중의 하나가 조각가이면서 바이마르 예술대학의 교수였던 엥겔만(R. Engelmann)이다. 1950년 엥겔만은 靑銅으로 오이켄의 흉상을 제작하여 그의 도움에 감사를 표했다. 이 흉상은 현재 칼스루헤의 발터 오이켄 학교에 있다.

또 다른 사람은 아버지 때부터 친교를 맺어온 철학자 후설(Edmund Husserl)이다. 유대인이었던 후설도 1936년 강의권한을 박탈당하고 자기 집에서마저 쫓겨난다.

거의 모든 사람이 외면하였지만, 오이켄만은 끝까지 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을 돌보았다. 1938년 후설이 죽자 그가 재직했던 철학부에서는 수제자였던 하이데거를 비롯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이켄을 비롯한 단지 몇 명의 사람들만이 20세기 大철학자의 장례식을 쓸쓸히 지켜보았을 뿐이었다.

『나치만은 결코 찍지 않았소!』

강의와 연구 및 세미나를 조직하고 참석하면서 오이켄은 자신의 사상과 이론을 전파해 나간다. 1936년부터는 「大사상가들의 생애에 비춰 본 학문의 투쟁」이라는 강의를 개설했다. 소크라테스·갈릴레이·스피노자 등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소개하면서 진리를 향한 끝없는 추구와 전제정치와 권력의 誤·濫用(오·남용)에 대한 투쟁에 대해 설파하는 오이켄의 강의는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집합장소이기도 하였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오이켄은 폰 디체(C. von Dietze), 람페(A. Lampe), 뵘(F.B..ohm) 등과 더불어 프라이부르크-본회퍼(Freiburger-Bonhoeffer) 서클을 조직하고 戰後 독일 경제를 어떻게 재건해야 할 것인지 그 방향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들은 「독일法 아카데미」의 제4그룹인 경제학 부문의 일원으로도 활동한다. 여기서도 전쟁 後의 경제 및 사회정책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主임무였다. 여기서 논의되고 정리된 것들의 많은 부분이 질서자유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1944년 히틀러 암살 기도에 연루된 멤버들이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처형되면서 두 단체는 해산된다. 이때 오이켄도 비밀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오이켄은 부인인 에디트가 半유대인이었던 관계로 유대인 친인척을 가진 교수로 분류되어 특별 감시를 받고 있었다.

만일 같이 잡혀간 동료 중 하나라도 히틀러 암살 기도사건과 관련하여 오이켄의 이름을 불었다면 오이켄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을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선거에서 누구를 찍었느냐는 비밀경찰의 질문에 오이켄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치만은 절대 찍지 않았소!』

「라인강의 기적」의 기반이 된 질서자유주의

오이켄 필생의 학문적 고민과 연구의 결과는 「국민경제학의 기초」(1940)와 그의 死後인 1952년 발간된 「경제정책의 원리」에 집약되어 있다. 「국민경제학의 기초」는 1950년대 출판된 「법학 및 사회과학 백과사전」에서 이미 「古典」이라는 호칭을 붙여 줄 정도로 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크게 높여 준 저작이다.

그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나타났던 경제체제들에 대한 면밀한 관찰을 통해 모든 경제에 공통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원과 財貨를 언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는 점을 발견한다.

『인간의 경제활동 중 계획에 의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 계획을 담당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근본적으로 두 가지의 경제질서를 대별한다. 하나는 경제계획의 주체가 국가인 경우로서 여기서 생산자와 소비자는 국가가 세운 계획을 완수하는 임무를 맡는다.

다른 하나는 家計와 기업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이 계획들이 시장과 가격이라고 하는 조정 메커니즘을 통해 조절되는 경우이다. 오이켄은 前者를 중앙관리 경제, 後者를 교환경제(시장경제)라 불렀다.

흔히들 경제체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분류하지만 오이켄은 이러한 분류는 『神化가 理性을 몰아낸 자리에 들어선 매우 非과학적인 분류』라고 비판하였다. 그의 분류법에 따르면 나치下의 독일 경제와 혁명 이후의 소련 경제를 포함한 사회주의 경제는 중앙관리경제라는 점에서 동일한 경제질서이다.

그는 산업화 이후의 경제정책을 제1차 세계대전까지의 「자유방임」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정책실험단계」 (이는 또다시 「중도정책」과 「중앙관리경제」로 구분됨)로 구분하면서 둘 다 폭증하는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국민경제의 성과를 장기적으로 보장하는 데에도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오이켄은 경쟁과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되도록 하기 위한 전제조건인 경제질서와 경쟁의 틀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에 한해서만 정부의 개입을 허용하고, 그외 투자나 생산과 소비, 성장의 조정 등 경제과정의 운영은 전적으로 시장의 자율에 일임해야 한다는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 Order-Liberalism)」를 주장한다.

질서자유주의는 프라이부르크大의 오이켄, 뵘(F. B..ohm), 그로스만-데르트(H.Grossmann - Doerth) 등을 주축으로 모인 다양한 학자들의 중심 사상이다. 그 핵심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후 西獨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로 체현되면서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는 기반을 제공한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케인즈와 그의 이론을 따랐던 英美의 개입주의와는 반대로 철저한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근간으로 삼았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1980년대 初에 들어와서야 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부흥하지만, 西獨에서는 이보다 40년이나 일찍 자유주의 경제정책이 시행되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의 진정한 動因은 왕성한 권력욕』

현대의 공업화로 인한 경제공황과 사회적 긴장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등장한 중앙관리경제는 국민들의 경제수준을 현저히 하락시킬 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자유까지도 박탈해 버리는 총체적인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이켄의 평가이다.

우선 중앙관리경제에서는 가격기구와 자원의 희소성을 나타내는 척도가 없기 때문에 소비자 主權은 무시되고, 과거의 통계치를 근거로 적당히 작성되는 계획은 그 수립과 실행 자체가 엉터리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자원은 非효율적으로 배분되고 생산과 소비 수준은 전반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더구나 개인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사태를 개선하려는 자발적 의지가 배제됨으로써 생산과 소비 수준은 가일층 악화된다. 또한 일반 국민들, 특히 서민대중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공평한 분배를 내세우지만 권력집중이 발생하여 분배는 오히려 악화되고 인간의 자유만 억압될 뿐이다.

『중앙계획기관이 좀더 공정한 분배를 행한다는 확신은 역사적 경험을 명백하게 무
시하는 것이다』

중앙관리경제에서의 분배에는 인간의 恣意(자의)가 개입되지만 시장경제의 분배에는 인간의 恣意가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경제에서의 분배가 더 공정하다는 것이 오이켄의 평가이다.

중앙관리경제에 있어 자원배분의 非효율성이나 분배의 不공정성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중앙관리경제下에서는 필연적으로 독재국가가 형성되고 인간의 자유는 박탈된다는 점이다.

방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관료조직이 필요하다. 비대해진 관료들이 막강한 권력을 갖고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산요소를 배분하므로 직업선택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영업의 자유 등 개인의 자유가 박탈되는 전체주의가 형성되고 입법부와 사법부는 위축된다.

개인권리의 박탈과 부자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앙관리경제에서는 사상과 교육의 자유마저 인정되지 않는다.

『만일 중앙관리정책을 추진하는 국가가 인간의 정신을 통제하는 수단을 포기한다면 그 국가는 사람들을 계획한 대로 몰아갈 수가 없다』

결국 사람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다른 물건과 마찬가지로 관리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사람들을 필요에 맞는 인간으로 개조하고 관리하는 일반적인 수단이 교육이다. 중앙관리경제에서의 교육은 국가가 자신에게 부과한 과업을 각자가 모두 자신의 책무로 인식하여 그것을 기꺼이 이행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의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만 으로는 부족하며, 그 목표와 수단이 그 자신의 애착 대상이며 그의 理想이 되도록 교육되어야 한다.

이로써 모든 개인의 자유는 소멸되고 각 개인과 기업은 국가가 부여한 책무만 수행하는 수단으로 전락한다. 오이켄은 결국 중앙관리경제와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명분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정의와 경제안정을 달성하겠다는 것이지만, 「진정한 動因(동인)은 끊임없는 왕성한 권력욕」에 불과하며, 종국에는 총체적인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판단은 오이켄의 死後 40년이 흐른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의 종말과 더불어 사실로 입증되었다.

경제에서 「제3의 길」은 없다

中道의 경제정책이란 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정부가 경제과정에 부분적, 사안별로 개입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경제정책들로서 오이켄은 이를 「케인즈의 완전고용정책」, 「부분적 중앙관리정책」, 「직능단체적 질서」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 비판하였다.

공황의 원인이 투자의 부족에 있다고 보고 赤字재정, 低금리 및 신용확대를 통하여 투자를 촉진시켜 완전고용을 달성할 수 있다는 케인즈의 「완전고용정책」에 대해 오이켄은 『失業의 폐해가 생활자료의 부족이라는 폐해로 대체될 뿐』이라고 반박한다.

첫째, 완전고용 정책론자들은 巨視的 관점에서 집계치만 사용하고 微視的인 가격기구는 무시하여 가격동결, 환율조작, 금리규제 등과 같이 가격을 직접 규제하는 정책들 을 사용함으로써 가격기구를 파괴하고, 둘째 인플레를 유발하여 가격기구를 왜곡시켜 효율적인 자원배분과 생산과 투자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케인즈와 달리 오이켄은 투자부족의 진정한 원인은 生産財 산업의 獨占化(독점화)와 勞組의 결성으로 인한 임금의 상승으로 생산요소의 가격이 높아졌고, 정부의 개입주의 정책으로 인해 정책의 일관성이 무너져 투자위험이 증대한 것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투자를 증대시키기 위해서는 독점을 해소하고 임금의 상승을 억제하며 정부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여 민간투자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英美 등 세계각국이 1960년대와 1970년대 케인즈의 총수요 확대정책을 시행하다 스태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정책전환을 시도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러한 정책은 인플레를 야기할 뿐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일찍이 1950년대 초에 간파했던 오이켄의 혜안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부분적 중앙관리정책」은 주요 基幹(기간)산업을 國有化하여 국가가 직접 운영하고 나머지는 시장경제에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주요 生産財를 생산하는 國營기업들의 공급을 장악한 정부가 나머지 부문에 대한 실질적인 제어력을 갖게 되어 사실상 중앙관리경제와 거의 다름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國營기업들의 생산과 분배 및 가격을 정부가 통제하지 않고 시장 수요의 변동에 맡기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國營기업으로 존속시킬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오이켄은 반문한다.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F.A. Hayek)도 밝혔듯이 『자유와 계획의 진정한 결합은 성공할 수 없고, 중앙관리경제가 지배적인 원리로 되어 결국 노예상태로 가는 길을 닦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오이켄의 확신이다.

^^^^^^▲ 발터 오이켄^^^^^^
민간단체들의 정책결정 참여에 반대

마지막으로 「직능단체적 질서」란 기업간의 同業조합이나 노동자들 간의 職能조합과 같이 국가와 개인 사이의 중간위치에서 산업별촵직업별로 조직된 민간단체들에게 경제정책의 수립과 시행에 대해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는 경제질서를 말한다. 이 질서는 시장경제질서의 결함을 회피하고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등장한다.

하지만 오이켄은 이러한 질서는 민간단체의 집단이기주의 행태를 간과한 것으로서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일시적인 해결책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처방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경제정책의 결정과 시행에 私的團體(사적단체)를 참여시키는 발상은 민주적인 듯하지만, 경제가 정치투쟁의 場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중간형이나 혼합형은 장기적으로 존속할 수 없으며, 만일 있다고 하면 그것은 대혼란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 오이켄의 확신이다.

오이켄은 민간단체들의 의견은 청취하되, 정책결정에서는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집단은 양심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집단은 어떤 경우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勞使政위원회 설치, 사회보험 등 각종 정부정책의 시행과 운영에 시민단체 등 민간단체를 참여시키는 경향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꼭 경청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오이켄의 신념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다. 하지만 그의 「질서자유주의」는 자유방임 경제정책이나 하이에크의 自生的 질서와는 구별된다.

오이켄은 자유방임정책의 성과를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방임정책을 통해 산업화가 진행되었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도 놀라워했듯이 역사상 처음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난 유럽의 인구를 충분히 부양할 수 있을 정도의 財貨(재화)도 공급될 수 있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반면에 오이켄은 자유방임의 뒤에는 공황과 사회적 갈등이라고 하는 어두운 면이 있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면서 경제질서의 구축을 특별히 정부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고, 법률의 테두리內에서 경제질서가 충분히 생성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자유방임 정책의 최대 실책이었다고 지적한다.

『자유방임정책은 수량과 가격 등을 둘러싼 투쟁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게임의 규칙, 게임의 틀 또는 형태를 둘러싼 투쟁마저도 각 개인들에게 일임했다』

이런 상황이 통상 경쟁을 회피하고 獨占을 형성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 경제주체들로 하여금 獨占을 형성케 하여 시장경제가 제대로 기능을 하도록 만드는 가격기구를 훼손시키고 私的 권력의 집중을 야기했다. 獨占이라고 하는 私的 권력은 公權力과 함께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진정한 法治국가는 公益을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려는 국가 행정기관의 강제권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시민 상호 간의 위협에 대해서도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만 경제질서가 단순히 경제적 성과만 낼 수 있도록 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자기책임下의 삶,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쟁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핵심

이러한 질서를 오이켄은 경쟁질서에서 찾았으며, 경쟁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정책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경쟁이 존재하지 않으면 시장과 가격은 정보시스템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어 시장경제질서 전체의 흐름은 왜곡되고 변질되어 버려 결국 전체 경제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과 가격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한 시장에서 자유경쟁을 도입하고 강화시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이켄은 제대로 기능하는 가격과 시장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한 결정적인 전제조건인 경쟁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이야말로 「경제헌법적 근본원칙」을 확립하는 일이며, 모든 경제정책수단은 이 경쟁질서라고 하는 척도에 비추어 검토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오이켄은 경제질서의 대부분은 自生的으로 형성되지만 인간의 의식적인 시도에 의해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바로 이 점에서 自生的 질서를 강조한 하이에크의 입장과 구별되며, 또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강력한 국가를 주장한 것으로 오해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이켄은 경제질서를 형성해야 하는 정부의 역할은 인정하였지만 그 역할은 공정한 경쟁질서를 확립하는 것에 한정해야 하며 경제과정 및 민간의 경제활동 그 자체에는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오이켄은 구체적으로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획득된 다음과 같은 「構成原則(구성원칙)」을 확립하는 임무로 정부의 역할을 제한한다.

「최우선 정책목표로서의 通貨안정, 개방적 시장, 私有財産제도, 계약의 자유, 자기책임의 원칙,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책의 일관성」

오이켄은 특히 중요한 것은 이상의 모든 원칙들은 상호보완적인 것들로서 전체가 통일적으로 이루어져야만 경쟁질서가 확립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社會正義를 명분으로 사유재산제도에 대한 명백한 침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이켄에 따르면 이들은 시장경제질서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다름 아니다. 私有財産제도의 확고한 보장 없이는 시장경제는 존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발전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와 理性의 역할을 인정하되, 理性을 과신하는 교만에 빠지지 말고 理性을 비판적으로 사용하여, 인간의 本性과 사회의 발전에 부합하는 자연스럽고도 바람직한 질서를 찾아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는 포퍼(K. Popper)의 「열린 사회」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오이켄에게서 배웠다』

오이켄은 구성원칙 외에 「規制原則(규제원칙)」에 대해서도 언급했는데, 이것이 종종 강력한 국가를 옹호한 것으로 오해된다. 특히 獨占규제가 그렇다.

獨占에 대해 오이켄은 먼저 「규모의 경제」로 인해 형성되는 獨占의 경우에는 이것을 인정해야만 하고, 國有化나 勞組의 경영참여에 의한 감시는 결코 獨占을 감독하는 올바른 방법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국가적 獨占기업은 私企業보다도 獨占的 지위를 더욱 확실하고 완전하게 이용하며, 勞組도 獨占이윤의 배당이라는 자신의 이해 때문에 소비자보다는 獨占기업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獨占기업에 대한 감독은 정부와 이해집단의 압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독립적인 獨占감독기관이 오로지 「法治의 원칙」에 의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오이켄의 생각이다.

또한 시장의 형태와 구조를 미리 상정하고 그 방향으로 유도하고자 해서는 안되며,獨占力의 행사가 구체적이고 명백히 드러난 경우에만 개입하는 소극적 事後규제만 인정하고 있다.

시장점유율을 통제하고 독점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하여 적극적 事前규제를 가하면서 「정치적 목적에 의해 權限이 행사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자아내는 우리나라의 獨占감독기관의 행태는 결코 오이켄이 생각하는 獨占감독기관의 역할이 아니다. 이는 이미 행정관청으로 변질된 기관으로서 자유경제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하는 존재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이켄은 美英佛 점령당국들의 수많은 자문에 응하면서 敗戰 독일의 경제부흥의 기초를 닦아 나간다. 그가 독일의 경제질서의 형성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되는 것은 1948년부터 독일 경제장관인 에르하르트(L. Erhard) 경제자문위원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시장경제냐 아니면 사회주의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사회가 분열되고 방황하던 시기에 자유주의 경제 신봉자였던 에르하르트가 경제장관이 되고, 자문위원으로 철저한 자유주의 경제학자인 오이켄과 프라이부르크學派 학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西獨으로서는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이켄이 독일 경제에 끼친 영향에 대해 1975년 당시 경제장관인 프리드리히(H.Fridrich)는 연방의회에서의 연설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오이켄을 통해 우리는 모두 어떻게 하는 것이 질서정책적으로 思考하는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특히 우리는 그로부터 우리 국민경제를 시장과 자유로운 가격을 통해 分權的으로 운영해야 하며 경쟁을 확립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우리 독일인이 현재 이룬 업적은 바로 오이켄과 질서자유주의가 끼친 영향과 성과입니다』

「독일 자유주의 전통을 體現(체현)한 사람」이라고 오이켄을 높이 평가했던 하이에크와 오이켄은 193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의견을 교환해 왔다. 두 사람은 1947년부터 시작된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인 몽펠린 회의의 창립멤버이기도 하다. 1950년 3월20일 하이에크의 초청으로 런던경제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을 방문 중이던 오이켄은 자신이 머물던 런던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享年 60세.

『「경제의 정치化」를 경계하라』

오이켄이 살아 있다면 그는 현재의 한국 현실에 대해 무슨 말을 할까?

학문이 경제와 사회의 바람직한 질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향점들을 제공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망했던 오이켄은 학자들, 특히 경제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경제학은 항상 적대자를 갖는다. … 경제학의 냉철한 분석방법과 결과는 경제에 대해서는 門外漢이면서도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 토론의 場에서는 제일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어떤 학문도 경제학과 같은 이러한 투쟁을 겪지는 않는다.

… 이 투쟁에서 경제학자는 思考의 독립성을 철저히 유지하고 여론주도자들의 주장이나 입장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들 주장의 대부분은 특수이익을 대변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분석을 통해 얻어낸 결론이 사회분위기나 여론과는 정반대되는 것일지라도 결코 주저하지 말라. 「의문의 급진성」이야말로 학자의 표상이 아닌가』

나아가 오이켄은 사회를 하나의 기계장치와 동일하게 보고 이 기계장치를 제어하는 것과 같이 한 나라의 경제 전체를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 理想的인 사회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 놓고 이에 맞추어 사회 전체를 개혁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 대한 경각심을 늦추지 말라며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중앙관리경제라는 실험의 유력한 협력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자네 할 일이나 하지』

정부가 경쟁질서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서 벗어나 사안별로 개입을 하게 되면 경제정책은 이익집단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

『누군가에게 하나의 特權이 부여되면 그는 이 특권을 기반으로 두 번째의 특권을 요구하고, 두 번째의 특권도 주어지면 그는 세 번째의 특권을 요구한다』

지난 수십 년간에 걸쳐 계속 바뀐 조세법, 보조금의 남발 및 이해할 수도 없는 수많은 법률조문들은 이를 잘 말해 준다. 국가의 권위는 손상되며, 그럴수록 국가는 점점 더 타협하고 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다시 말해 국가가 경제과정에 개입하면 할수록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증대되지만, 동시에 국가의 권위는 약화되고 이해집단들의 압력에 시달리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정부활동의 영역과 强度가 증가한다는 것은 알고 보면 아주 의존적이 되어버린 국가가 자신의 실추된 권위를 포장지로 덮고 있는 눈가림에 불과한 것이다』

反세계화론자들은 세계화로 인해 경제가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50년 전에 오이켄은 정치에 대한 경제의 지배경향을 간파했으며, 경제에 대한 정부의 恣意的인 개입으로 인한 「경제의 정치화」가 그 원인이라고 보았다. 「빅딜」 등 우리 정부가 행하는 수많은 개입정책에 대해 오이켄은 분명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어이, 그건 자네 일이 아니잖아. 자기 할 일이나 좀 하지』

^^^^^^^^^▲ 발터 오이켄^^^^^^^^^
Walter Eucken (1891–1950)

"Without freedom, there can be no solution of the social question.... Under a proper marketing system, it becomes impossible for individual freedom to degenerate into the arbitrary domination of many by a few. As a result of the general interdependence between all markets, the social question can only be resolved by means of an adequate and free economic system."

An intellectual architect of West Germany’s post-war economic miracle, Walter Eucken was the primary founder of the Freiburg ordo-liberal school of economics. The son of Rudolf Eucken—winner of the 1908 Nobel Prize in Literature—Walter Eucken studied history before turning his attention to economics during his studies at the universities of Bonn, Kiel, and Jena. Eucken became a professor of economics at the University of Freiburg in 1927, remaining there until his death in 1950.

Though proficient in technical economics, Eucken was primarily interested in the broader issue of the legal rules that make both freedom and market economies possible.

The state’s economic role, Eucken argued, needed to be limited to protecting and upholding the key rules from which we derive the type of legal order that facilitates the free market’s dynamism. Eucken held that the state’s authority should be used—and used vigorously—to uphold the rule of law, private property rights, freedom of contract, and open markets. But once the state moved beyond these parameters, Eucken warned, both freedom and economic prosperity were endangered.

Following the National Socialists’ seizure of power in 1933, Eucken maintained contact with other anti-Nazi Germans who understood the need to think about how to transition a post-Nazi Germany towards a society marked by ordered liberty rather than socialism or communism.

Thus, at the end of World War II, Eucken was one of a small number of individuals able to present the intellectual case for the market economy in occupied Germany. While West Germany’s 1948 currency reform and abolition of price-controls was engineered by Ludwig Erhard, Erhard himself acknowledged Eucken as an intellectual godfather of the changes that took West Germany from rubble to riches in less than ten years.

Walter Eucken never made any secret of his Christian convictions. At the first Mont Pèlerin Society meeting convened by Friedrich von Hayek in 1947, participants were struck by Eucken’s forceful insistence Christianity’s essential compatibility with the market order. Eucken’s use of the word ordo partly reflected his effort to re-establish links between Christian social doctrine and free market thought. Given the right conditions, Eucken believed, markets gave economic expression to man’s innate dignity in ways that collectivist alternatives never could. Eucken’s early death at the age of fifty-nine was a grievous loss to the cause of freedom and Christian faith in a Europe that deeply needed both.

^^^^^^^^^^^^▲ 발터 오이켄^^^^^^^^^^^^
Walter Eucken Institut

Das Walter Eucken Institut wurde vier Jahre nach dem Tode Walter Euckens von einigen seiner Freunde und Schüler und mit der Unterstützung des damaligen Wirtschaftsministers Professor Dr. Ludwig Erhard am 11. Januar 1954 in der Rechtsform eines Vereins in Freiburg im Breisgau gegründet. Professor Friedrich A. von Hayek war von 1964 bis 1970 Vorstandsmitglied und von 1970 bis zu seinem Tode Ehrenpräsident des Instituts. Entsprechend der im Jahr 2002 neugefassten Satzung sind Organe des Vereins der Vorstand, das Kuratorium und die Mitgliederversammlung. Anlässlich des 50-jährigen Gründungsjubiläums wurde Nobelpreisträger Professor James M. Buchanan zum Ehrenpräsidenten des Instituts ernannt.

Das Walter Eucken Institut ist eine unabhängige Einrichtung, die sich wirtschafts- und sozialwissenschaftlicher Forschung widmet, insbesondere der Untersuchung von Problemen, deren Lösung für die Erhaltung und Weiterentwicklung einer marktwirtschaftlichen Ordnung von grundsätzlicher Bedeutung ist. Mit seinen Vorträgen, wissenschaftlichen Tagungen und Veröffentlichungen setzt sich das Institut zum Ziel, die Grundlagen und Prinzipien einer solchen Ordnung in der Öffentlichkeit deutlich zu machen und das Verständnis für wirtschaftliche und gesellschaftliche Zusammenhänge zu fördern.

Hauptziel des Instituts ist es, als ein Kompetenzzentrum in ordnungspolitischer und ordnungsökonomischer Grundlagenforschung zu fungieren und durch geeignete Veranstaltungen ordnungspolitisches Denken in die öffentliche Diskussion einzubringen. Besonderes Gewicht in der Arbeit des Instituts wird nicht nur der systematischen Verbindung der Forschungstradition der von Walter Eucken und Franz Böhm begründeten Freiburger Schule mit der evolutorischen Ordnungsökonomik F.A. von Hayeks und der modernen konstitutionellen Ökonomik J.M. Buchanans eingeräumt, sondern auch der Ausrichtung des ordnungspolitischen Forschungsprogramms auf Fragen der internationalen Wirtschaftsordnung und der Wirtschaftsverfassung Europas.

*Werden Sie förderndes Mitglied des Walter Eucken Instituts !*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댕큐 2008-01-26 11:07:51
권기자님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특히 연구소 소개 참 고맙습니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감사.........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