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 피천득 수필집
스크롤 이동 상태바
'인연(因緣)' 피천득 수필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종민의 책읽기 - 독서의 파편들 (1)

 
   
     
 

이런 수필을 쓰려면, 아이같은 마음과 섬세한 눈, 그리고 따뜻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리라. 내가 이런 류의 수필을 쓴다면, 딱딱하기 그지 없는 글이 되고 말 것이리라.

금아(琴兒) 선생이나 법정 스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데 있다. 그들의 눈길은 주변의 아주 사소한 것에 미치며, 보잘 것 없는 일상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빛나게 한다. 학창 시절 밑줄을 그어가며 외웠던 수필 문학의 정의 같은 것은 잊어도 좋으리라.

이 수필집의 첫 수필은 '수필'이다. 나는 지금까지 이보다 더 정확하고 멋드러지게 수필을 표현한 글을 읽어보지 못하였다. 이 글은 학창 시절처럼 밑줄을 그어가며 외워도 좋을 글이다. 그는 청자(靑瓷) 연적, 난(蘭), 학(鶴),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 마음의 산책, 독백 등으로 수필을 정의 또는 은유한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므로, 수필가는 그저 자기 자신이면 된다. "새색시가 김장 삼십 번만 담그면 늙고 마는 인생"을 살면서, 노름판에서건 요정에서건 회의석상에서건 잠을 자기 일쑤인 이 수필가는, "남이 써놓은 책을 남에게 해석하는 것"인 직업에 대한 보상으로 더 많이 자기 자신의 주변과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았던 것 같다.

 
   
     
 

"누구나 큰 것만을 위하여 살 수는 없다. 인생은 오히려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다."(p.216) 라고 말하는 이 키작은 할아버지는, "평범하되 정서가 섬세한 사람"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듯하고, 자신도 자기 자신을 그리 보았던 것 같다. 아마도 수필가에 대한 글을 썼다면, 그런 문구가 또 다시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올림픽의 하이라이트가 육상인 것처럼, 고등학교 운동회 때도 달리기는 중요한 항목이었다. 팀을 나누어서 하는 계주는 학생들이 가장 열띠게 응원하는 종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던가? 가장 빠른 학생들 중 하나였던 한 친구가, 선두를 유지하며 달려오다가 사진 찍는 사람 앞에서 포즈를 잡아준 적이 있었다. 그 팀은 졌지만, 난 그 날의 장면이 아직도 문득 생각난다. 올림픽 육상 경기를 보면서 그런 장면을 볼 날을 기대해 본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과속 난폭 운전이나 빵빵거리며 끼어들기를 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저 사람 똥마려운가보다"라고 이야기한다고 한다. 아이가 물어볼 때도 그렇게 대답해주었더니, 이제는 그런 차를 보면 아이가 먼저 그런다고 한다. "아빠, 저 아저씨 똥마려운가보다." 난 성격도 급하고 운전하면서 화도 많이 낸다. 하지만, 가끔 그 말이 생각나서 한번 따라해보곤 씨익 웃는다. 더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

이런 여유를 가진다면, 살아가기가 한층 즐거울 것 같다. 금아 선생은 바로 그런 여유를 지닌 사람이다. 그의 글에는 그런 여유와 멋,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어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책 한 권 읽을 여유 정도는 가져야 하겠지만,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수필'(pp.17-19), '이야기'(pp.228-232), '잠'(pp.233-238), '술'(pp.251-258) 등의 수필을 특별히 추천하고 싶다.

 
   
     
 

아사꼬(朝子). '인연'의 주인공이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p.152)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만나고 어떻게 생긴 여자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나같은 사람이 꽤 있었나보다. KBS에서든가 아사꼬의 얼굴이 공개된 적이 있다. 언제 사진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졸업 앨범에서 찾아낸 아사꼬의 얼굴이다. 미국에 가 있는 아사꼬의 현재 모습을 찾아보겠다는 말에, 금아 선생이 한사코 만류했다고 한다. 기억 속에 간직하고 싶다고.

이 책을 읽으며 보고 싶었던 또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청자 연적'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아직 그곳에 있다면 꼭 한 번 가서 보고 싶다. 연꽃 모양을 한 그 연적은,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고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의 여유를 필요로 한다"고 琴兒는 이야기한다. "작고 이름지을 수 없는 멋"에는 이런 것들도 포함이 될 것이다.

각박하고 딱딱하고 너무 바쁜 세상을 살면서, 이런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을 발견한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 "점잖을 빼는 학계 권위나 사회적 거물을 보면", "그의 어렸을 적 모습을 상상하여 보는 버릇"을 가졌다는 수필가의 눈과 마음을 배운다면, 화내고 신경질내는 많은 순간들을 웃을 수 있지 않겠는가. - 2002.10.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02-10-20 14:00:11
아사꼬라는 여성. 그렇게 이쁘지는 않네요.
마음으로 맺은 인연은 그 미인성도 마음으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