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 부시 미국 대통령, (우) 이명박 후보^^^ | ||
박 대변인은 "미국 대통령이 10월 중순에 이 후보를 만난다는 것은, 미국이 이 후보의 위상을 인정한 것"이라며 "차기정부까지 내다본 결정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면 역대 대선 주자들이 미국을 방문한 결과에 대하여 검토하여 보자.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대선주자들이 미국을 방문하여 워싱턴의 정·관계 요인들을 만나는 것이 한국의 대통령으로 낙점을 받는 첫 관문으로 여겼었고. 대선주자들 역시 세 과시를 위해서 '워싱턴 행'을 당연시 하였으며, 미국 또한 한국의 대선 주자들을 관리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졌던 시기였었다.
이로부터 한국의 국가 위상과 국민의 정치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후보들의 미국행이 썩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1987년도 노태우 민정당 대선후보와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면담에서 레이건 대통령이 한국의 여당 후보를 백악관 집무실로 불러들여 의미심장한 덕담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이 12월 대선에서 여당 후보를 측면 지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정치적 해석이 일어나면서부터 사대주의 적인 발상이라는 가혹한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미 국무부에서도 이로 인하여 여야 어느 쪽 정치 지도자라도 앞으로 미국을 방문하면 환영할 것이라며 뒤늦게 진화에 나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에는 한국과 미국이 모두 대선을 치루는 해로써 당시 여당인 김영삼 후보는 87년도 미국에서 노태우 후보를 지나치게 배려했다는 것을 의식하여 방미하지 않았고,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은 미국의 야당 후보인 빌 클린턴을 만나고 돌아왔지만 그해 11월 미국 빌 클린턴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한국의 대선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패배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1997년 대선에서는 클린턴 행정부가 한국의 대선후보를 만나게 되면 편파 시비에 휘말릴 수 있음을 우려하여 대선후보를 직접 만나지를 않았으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스탠리 로스)로 한정하여 둠으로써 그 해는 이회창 후보나 김대중 후보가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2002년 대선에서는 한국의 대선 후보 중 미국 대통령을 만난 사람은 없었지만, 그해 1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당내 경선을 하기 전에 미국을 방문하여 체니 부통령과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부시 행정부의 실세를 만나는 '성과'를 올리고 돌아 왔다.
이에 반하여 노무현 민주당 후보는 "국내정치용으로 사진 찍으려고 미국에 가지는 않겠다."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함으로써 여야 후보들의 엇갈린 태도가 국민의 인식을 변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선 승패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된다.
그리고 그해 연말 대선에서 여중생 미군 장갑차 압사 사건의 '무죄' 판결로 인하여 국민감정이 반미, 반외세로 전환 되면서 이회창 후보는 '친미 후보'라는 낙인이 찍혀 득표에서 손해를 입었고 선거에도 졌다.
현재 한나라당은 이 후보와 부시 대통령의 면담이 '이명박 대세론'을 대내외에 각인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뻐하고 있다. 이에 당의 한 관계자는 "이 후보가 부시 대통령까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정도면 남북정상회담에 버금가는 카드로서 이 후보의 본격적인 4강 외교 행보에 나선 것으로 보아 달라" 며 흥분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87년도 노태우 후보나, 2002년도 이회창 후보의 전례를 되돌아보면 대선후보의 방미 행보가 반드시 이로운 결과만 가져왔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 후보가 미국방문을 통해서 북핵문제와 6자회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등 현안문제에 대하여 흡족할 만한 성과를 가져오지 못할 경우 국내홍보용 사진 찍기에 불과하다는 평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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