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철학교수에 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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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철학교수에 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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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지 못하는 그를 닮아가고 있다

그는 학교 앞 허름한 식당에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그리고 그는 늘 혼자였다. 그리 자주 술잔을 비우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침묵을 안주로 삼기라도 하듯이 조용히, 그리고 꼿꼿한 자세로 플라스틱 술잔을 한 손에 감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술을 마시는 그의 모습이 바로 내가 그를 내 마음에 담은 까닭이었다.

만약에 그가 술기운을 빌어 마음에 담았던 이야기라도 두런두런 입밖에 뱉어 내기라도 했었다면 아마도 당시 젊은 시절의 자만이 하늘을 찌르던 내가 그를 그토록 주의 깊게 의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내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늘 같은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같은 침묵에 쌓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본적은 없다. 그저 술잔을 앞에 두고 그림같이 조용히 앉아 있는 그의 그런 모습을 즐겨 바라보았을 뿐이다.

마치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눈부신 햇살을 피해 그늘을 찾아들었지만 세상을 등질 수는 없어서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열려진 분식집 문틈으로 세상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왠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나는 마치 좋아하는 여학생의 모습을 훔쳐보기라도 하듯이 그 식당 앞을 지나다니며 그가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흘끔흘끔 쳐다보곤 하였다.

나는 그가 막걸리 잔을 앞에 두고 있는 모습만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교정 잔디밭에 앉아 책갈피를 넘기면서 혹시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은 수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노라면, 내가 좋아하는 산책길을 그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모아 뒷짐을 지고 걷기를 좋아했었다.

나는 또 키가 큰 그가 흐느적거리듯 몸을 천천히 흔들거리며 걷는 모습을 좋아했다. 그가 그렇게 교정을 걸어가는 모습은,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고 종일토록 매달리는 내 간청에 못 이겨 책들이 한마디씩 던져주는 성의 없는 대답보다 훨씬 신선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듯 나에게 호기심 어린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가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퀭한 눈으로 바라보는 저 인생이란 책장 뒤에는 과연 무슨 비밀이 감추어져 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었다.

내가 그처럼 나이가 들면, 그처럼 많은 책을 읽고 난 뒤에는, 그처럼 술을 마시고 난 뒤에는 인생이 내 앞에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반백의 머리를 한 그는 왜 그리도 깡마른 것일까. 왜 그의 걸음은 그리도 느리기만 한 것일까. 왜 그의 미소는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의 술자리는 왜 그토록 외로운 것일까.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철학은 그의 인생에 과연 어떤 영향을 얼마나 끼친 것일까. 어쩌면 책에서 찾을 수 없는 진리를 그가 언젠가 흘려낼지 모르는 비밀스러운 미소에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강의를 훔쳐듣기를 좋아하던 나는 그의 강의는 훔치지 않았다. 그의 강의를 듣는 친구에게 가끔 물어볼 뿐이었다. ‘재미없어, 자신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 나는 친구가 그렇게 대답하는 것을 예상이나 한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가 그러는 것처럼 뒷짐을 지고 그 언덕진 산책로를 천천히 걸어보면서 나는 그가 바라보는 인생의 깊이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느끼는 인생이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그가 인생이니, 삶이니 하는 그런 허튼 소리를 수이 입 밖에 내뱉지는 않으리란 것쯤은 나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듯 그를 보지 못한 날들이 많이 흘렀다. 이젠 나에게도 흰머리가 드문드문 생겨나기 시작한다. 나도 그를 닮았는지 문득 뒷짐을 지고 길을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제 그가 기울이던 막걸리 잔을 찾기는 어려워졌다. 하지만 아직도 소주잔을 기울일 때면 그의 모습이 가끔씩 생각 날 때가 있다.

조용히 혼자서 술잔을 잡고 있는 모습이며, 찬란하게 부셔지는 눈부신 햇살을 등에 받으며 느릿느릿 교정을 걷던 모습이 이제는 그때보다 조금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인생이란 아직도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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