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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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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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50주년에

 
   
  ^^^▲ 한국전쟁 당시 육국군의학교에서뒷줄 오른쪽 첫번째가 나의 아버지다
ⓒ 이종찬^^^
 
 

오십육일 고생은 내일의 영광
마산아 다시 보자
저 멀리 일선으로

지난 해 시월, 끝내 치매를 물리치지 못하고 합병증으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마산에 있었던 육군군의학교 제14기생으로 졸업하셨다.

인용한 윗 글은 당시 육군군의학교를 졸업할 때 찍은 흑백사진 뒤에 아버지의 자필로 씌어져 있는 글씨이다. 연갈색으로 빛이 바래져가는 흑백사진 그리고 그 사진 뒤에 파랑색 잉크로 씌어진 글씨. 그래. 사진 뒤의 글씨 또한 아버지의 치매처럼 희미하게 빛이 바래져가고 있었다.

오십육일 고생은 내일의 영광, 이라는 글씨 내용으로 보아 아버지께서는 육군군의학교 학생연대 제2대소 10중대 1내무반에 소속되어 8주에 걸친 교육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의무하사란 계급장을 달고 곧바로 한국전쟁이 치열했던 일선으로 투입되었던 것같다.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께서 찍었던 명함 크기만한 흑백사진은 큰 형님 댁에 열 장 남짓 남아 있다. 근데 지금도 한가지 의문이 가는 것은 그 치열했던 한국전쟁 속에서 어떻게 그런 사진들을 찍을 수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그 아수라장 같은 전선에서 어떻게 일기를 쓸 생각을 하셨을까.

 

 
   
  ^^^▲ 일선에서/오른쪽 첫 번째가 나의 아버지
ⓒ 이종찬^^^
 
 

아마도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에 다녀갔다는 흔적만이라도 남겨두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래서 한국전쟁 당시 찍었던 아버지의 흑백사진 뒤에는 그 사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흑백사진 뒤에는 주로 그리운 고향, 희망을 찾는 4인의 전우들, 마산아 다시 보자, 등의 글씨들이 씌어져 있다.

그 중 유난히 눈에 많이 띄는 글씨가 희망, 그리움, 고향이란 단어였다. 하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사선에서 희망마저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그 단어 속에는 반드시 살아서 당신이 태어나 자란 그리운 고향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꿈이 오롯이 담겨 있는 단어가 아니었겠는가.

"니, 하늘에서 포탄이 비오듯이 쏟아질 때에는 우째야 살아남는 줄 아나?"
"고마 그 자리에서 귀로 막고 땅바닥에 오징어맨치로 납짝하게 엎드리가 있는기 대수 아이것나."
"그라다가는 니 시체 쪼가리 한 점도 못 찾을 수도 있다카이. 그때는 포탄이 떨어진 구덩이에 들어가서 가만히 엎드리가 있으모 절대 죽을 염려가 없다 아이가."
"와?"
"절마들이(쟤들이) 포를 쏠 때 한번 쏜 자리는 절대 다시 쏘지 않거든."

그랬다. 살아 생전 아버지께서는 당신과 가장 절친했던 용술이 아재와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전쟁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종전으로 치달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다. 왜냐하면 휴전협정이 되기 전에 하나의 고지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남북한 모두가 죽기 살기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니까.

 

 
   
  ^^^▲ 4인의 전우들/오른쪽 첫번째가 나의 아버지
ⓒ 이종찬^^^
 
 

"내 그때 생각을 하모 말도 꺼내기조차 무섭다 아이가. 아, 고지 꼭대기에서는 수류탄이 돌띠(돌멩이)맨치로 수없이 굴러 내리오제. 뒤에서는 무조건 돌격하라고 장교들이 총을 들이대제. 우짤끼고."
"그때 소대장들도 엄청나게 많이 죽었다 카더마는?"
"말도 마라. 데굴데굴 굴러 내려오는 수류탄을 발로 차다가 발목이 날아간 넘, 손으로 집어 던지다가 손목이 날아간 넘, 따발총에 맞아 죽는 넘… 어휴! 생각만 해도 응걸징(몸서리)이 다 난다카이."

그랬다. 아버지께서는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가 되면 서둘러 부상당한 사람들을 들것에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또한 전투 중에도 부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전선에 투입된 적도 많았다. 그 중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하반신과 팔다리가 모두 날라가고 없는 사람이 입만 살아서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였다.

"안락사!"
"그래도 살아 있는 사람을 우째 쏩니꺼?"
"이 하사는 환자의 처절한 고통은 생각할 줄 몰라?"
"탕!"

그 뒤 마침내 휴전협정이 되고, 아버지께서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악몽은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되었다. 들판에서 쎄 빠지게(혀 빠지게) 일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위생병! 위생병! 하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기도 했고, 수꿩이 호오오 호오오 하고 우는 소리가 위생병! 위생병! 하면서 아버지를 찾는 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 그리운 고향을 바라보며/오른쪽 첫 번째가 나의 아버지
ⓒ 이종찬^^^
 
 

"니 그 와중에서 우째 일기로 다 썼노? 그림까지 그려넣고."
"그래도 나는 행운아였다 아이가. 정말 운 좋게도 군의학교에 들어가서 훈련을 받고 의무하사가 되었으니까. 그라이 간이천막 속에 마련된 의무실에서 틈틈히 일기로 썼다 아이가. 내가 겪은 전쟁을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었거든."

나는 어릴 때 심심하면 장롱 깊숙히 넣어둔 아버지의 일기장을 꺼내 읽었다. 한국전쟁 당시 만년필로 쓴 아버지의 그 전쟁일기장을 말이다. 아버지의 전쟁일기장에는 군데 군데 전투를 하고 있는 그림까지 그려져 있었다. 또한 전쟁을 치르는 아버지의 두려운 마음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아버지의 전쟁일기장 속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전선, 포탄, 삶과 죽음, 희망, 그리움, 고향, 전우란 말이었다. 그리고 파란색 글씨가 빼곡이 들어찬 아버지의 전쟁일기장 틈틈히 예쁜 오색실들이 몇 묶음씩 들어 있었다. 당시 구하기 어려웠던 그 오색실들을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전쟁일기장 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소중했던 아버지의 전쟁일기장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쯤 아버지께서는 덜컥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아버지의 치매는 1970년대 이후부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우리 오남매를 또렷하게 알아보았고, 창원공단이 형성되기 전 고향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아주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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