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1년 대한민국 역사에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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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1년 대한민국 역사에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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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새벽 하늘을 뚫고 군사혁명의 첫 총성

혁명의 첫 총성

육군 참모총장의 지휘권과 감찰이 미치지 않는 해병대는 혁명의 사전 누설의 부작용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계획대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새벽 1시 모든 준비를 완료한 해병 제 1여단은 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진두 지휘에 의하여 완전 무장한 제 1대대는 제 2중대 제 1중대, 제 5중대의 순서로 서울 시가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으며, 공격 개시선인 염창교에 도착한 해병대는 박정희 소장의 일행과 합류하여 최초의 계획과는 달리 선두 부대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이날 안성과 도봉산에서 훈련을 끝내고 밤 10시경 부대로 돌아 온 공수전투단은 혁명의 사전 발각으로 장 참모총장의 부대 장악의 엄명과 출동한 특전감 장호진 준장의 감독으로 혼란 속에 출동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던 중 박소장의 내방과 함께 출동의 강행을 독촉받고 계획 시간보다 늦은 새벽 2시경에야 출동을 개시하여 해병대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한편 전방 야전군 사령부 예하인 제 6군단 포병단은 장 참모총장의 관심이 미치지 않았으므로 감쪽같이 맨 먼저 서울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군단 작전 참모 홍종철 대령과 군단 포병 사령관 문재준 대령의 긴밀한 연락하에 신윤창 중령에 의하여 지휘된 포병 제 636대대, 정오경 중령 지휘하에 제 1중포 대대와 구자춘 중령의 제 933대대 그리고 백태하, 김인화 중령에 의하여 지휘된 제 822 및 제 911대대가 새벽 3시 30분 예정대로 육군 본부 광장에 집결 완료하고 대기하였다.

그동안 제 506방첩대 본부에서 필사적인 저지를 지시하고 있던 장도영 육군 참모총장은 사태의 불리함을 판단하고 새벽 1시 30분경 헌병 제 7중대장 김석률 대위에게 헌병 50명으로 한강교를 차단, 최후의 저지를 명령하고 제15범죄 수사대장 방자명 중령에게 이를 지휘 감독하게 하였다.

이에 출동한 헌병대는 7대의 트럭으로 한강교위에 3단계의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응전 태세로 대비하였다. 그들은 드디어 한강교까지 진출한 해병대의 선두 제2중대와 충돌, 서울 장안의 고요한 새벽 하늘을 뚫고 군사혁명의 첫 총성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피아간의 치열한 총격전 끝에 중과부족의 헌병들은 도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혁명군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서울의 중심가를 향하여 진격을 계속, 요소요소를 점령하였으며 4시 30분경에는 서울시가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다.

아직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던 시민들은 새벽의 정적을 깨뜨리는 요란한 총성과 병력의 이동 및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에 놀라 모두 문을 꼭 닫아걸고 영문을 모른 체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었으며 새벽 5시 서울 중앙 방송국에서 들려오는 군부 궐기와 무력 혁명의 소식은 이 정권의 오랜 독재 집권에 시달리고 4.19 이후의 혼란에 지친 가난한 시민들을 더욱 무서운 불안과 공포의 와중 속에 몰아 넣었다.

4시 30분경, 박정희 소장과 혁명 주동 장교들은 공수단 1개 소대를 인솔하고 남산의 중앙 방송국을 점령, 도피한 아나운서를 찾아내 준비된 혁명 성명서를 낭독하게 하였으며 이 성명서는 이날 새벽까지 혁명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던 당시의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의 이름으로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군사 혁명의 소식은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전국에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15일 밤부터 서울 종로구 견지동 소재 광명인쇄소에서 사장 이학수와 함께 김종필 및 이낙선 소령의 지휘로 인쇄된 혁명 공약과 포고문 및 수많은 전단들이 서울 거리에 나붙었으며, 서울 시가는 집총하고 늘어선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 속에 1961년 5월 16일, 무력에 의한 군사혁명의 첫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와같이 거사에 성공한 군사혁명의 주동자들은 16일 상오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내의 모든 항만 및 공항의 봉쇄와 함께 이날 오후에는 군사 혁명 위원회의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 제4호를 통하여 정권의 인수를 선언함과 동시에 민. 참의원과 지방의회의 해산과 정당. 사회단체의 모든 정치활동의 금지를 선포하였다.

드디어 18일 오후, 그동안 "갈멜 수녀원"에 피신중이던 장면 국무총리가 중앙청에 나타나 9개월간 집권하여 온 정권을 정식으로 군사혁명위원회에 인계함으로써 거사는 완전히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 혁명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 오전 9시에 군사 혁명 위원회(5월 19일 국가 재건 최고회의로 개칭)에 의하여 선포되어 1962년 12월 6일까지 계속된 5,16혁명 군사정부는 1963년 12월 17일 제 3공화국이 수립될 때까지 2년 반 이상 집권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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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2007-05-07 09:01:03
혁명이 아니라 쿠대타다. 똑바로 알고 글써라...

2007-05-08 21:09:25
내가 60 년말경에 육군입대하여 훈련과정과 자대배치후 얼마나배가고팟던지 부식운반군용트럭위에서 두부한모 흠쳐먹다들켜 귀창이나가고 턱이빠질정도로 두들겨맞앗고 식당에선 배식당번고참에게 나도모르게 밥그릇 던져서 그날얼마나두들겨맞앗는지 밤새울엇다, 5.16 혁명다음날부터 흰밥이 식기위로 수북히나와서 배가터지게먹고 얼마나고마웟던지 또한번 감격의눈물흘렷다, 그동안은 몇단계를경유하면서 군 보급관련자들이 식량을 갈취하였든것이다, 그후론 배고픔을잊고 군생활을 마쳣다, 과연 혁명이란 새 세상이 너무나 좋앗었다, 제대하고보니 해마다 되풀이되든 보리고개도 없어지고 지붕개량 부엌개량 도로개량, 그져감격하고 힘이절로솟아나더라, 그당시엔 좀더 오래토록 집권하셧으면 하고 바랫는데 도시의 그 잘난자들은 유신헌법이 어쩌고하면서 매일같이데모하더라, 대통령이 저격되여 9일장을 치룰때는 산천초목이 울부짖고 슬퍼햇었다, 이것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나의젊은시절을 회상하며 글을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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