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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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인정투쟁; 예술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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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예술가편_두산연강예술상수상자_이연주신작_두산아트센터 / 고득용기자 ⓒ뉴스타운
인정투쟁;예술가편_두산연강예술상수상자_이연주신작_두산아트센터 / 고득용기자 ⓒ뉴스타운

이 연극엔 일곱 명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무대를 지켜온 이 배우들은 자신이 예술가라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만 연극 속에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그저 배우와 무대의 관계를 드러내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은 증명을 권하는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래서 마침내 증명에 성공했다고 믿게 된 예술가들에 대한 연극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관객이 연극을 거부하고 무대가 죽음을 고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여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배우들이 있다. 무대가 끝나지 않는 것은 축복인가? 도대체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가는 무엇을 하기에? 아니, 어쩌면 답은 ‘예술가와 예술’에서가 아니라 ‘존재와 세계’ 그 자체로부터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관객들은 이 연극을 보는 동안 네 가지 서로 다른 층위의 세계가 뒤섞이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 이하 서로 다른 네 개의 세계 사이에 혼돈을 피하고자 편의상 바깥쪽에 있는 세계를 진한 글씨로, 안쪽에 있는 세계를 밑줄로 표기한다 ─ <인정투쟁; 예술가 편>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배우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연극을 만들어간다. 좀 더 익숙한 개념을 따르자면, 연극 속의 연극, 즉 ‘극중극’을 연기한다는 의미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배우들은 ‘연극 속의 연극’과 ‘연극’ 사이를 들락거리며 자기 자리를 찾는다. 물론 관객들은, 아직까지는 안전하다. 배우들이 어떤 세계에 존재하든 관객들이 두산아트센터의 객석에 앉아 ‘연극’을 보고 있는 ‘지금, 여기의 현실’은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극 속 연극’이 공연되는 ‘연극 바깥의 현실’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실은 ‘연극 속 연극’이 알고 보면 ‘연극 속 현실 속 연극’이었다는, 이제까지는 인지할 필요가 없었던,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당연한 진리가 갑자기 도래하는 것이다. 물론 그곳에도 관객들이 있고, 배우들은 그 관객들에 반응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고 ‘현실’의 객석이 ‘연극’의 무대로 편입되면, 이제 관객도 더는 객석의 어둠에 몸을 숨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의 대사를 빌려 말하면, “조명이 켜지면 무대는 살아난다. 그것이 무대의 법칙이다”.

처음부터 너무 어지러운 말들로 글을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어 망설여지면서도, ‘현실 속 연극 속 현실 속 연극’이라는 화두를 굳이 꺼내든 이유는 <인정투쟁; 예술가 편>이 던지고자 하는 큰 질문이 ‘존재와 세계’라는 꽤나 본질적인 물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이연주가 추적하는 인정투쟁이란 존재와 세계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그려진다. 연극 이야기를 하기 위한 이 글의 제한된 지면에서 인정투쟁 개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는 없겠으나, 본디 서구 사상사에서 ‘인정’은 상호적인 것, 즉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고 화해하는 관계를 의미했다. 하지만 동시대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정투쟁이란 말은 자기를 내세우는 것,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성과로써 평가받는 것으로 축소 해석되기 일쑤고, 이로 인해 끊임없는 피로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쟁 기제 정도로 인식된다. 이 연극은 그러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풍자하는 것을 넘어, 다양한 존재들 사이에 발생하는 긍정적인 동력과 그 존재들이 구성하는 세계의 촘촘한 역학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러니 ‘현실 속 연극 속 현실 속 연극’이란, 말하자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꺼내놓기 위한 하나의 재료라 할 수 있다. 진한 글씨와 밑줄까지 써가며 풀이했지만, 실제 연극에서 이 네 개의 세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각각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을뿐더러, 배우들은 그 경계를 자유롭게 미끄러지면서 그로부터 발생하는 미묘하고도 섬세한 감각을 쫓아간다. 그렇게 해서 배우들의 몸과 말, 공간의 소리와 텍스트가 조응해 만들어내는 내러티브는 이 시대 우리 사회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을 유쾌하게 포착해낸다. ‘연극 속 연극’은 국가의 제도에서부터 학교와 예술계, 동료 관계에 이르기까지 한 예술가가 인정투쟁의 여정에서 만나고 상호작용하는 온갖 세계를 탐색한다. 특히 이 작품은 단순히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관객들이 그것을 바라보는 장소로서 무대를 상정하지 않는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의 ‘무대’는 그 자체로 자기 호흡과 목소리를 가진 또 하나의 존재로 등장해 다분히 연극적인 방식으로 세계가 끊임없이 유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무대 위 배우들이 ‘연극 속 연극’에서 하나의 인물을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그 인물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한 예술가의 복잡다단한 내면을 반영하기도 하고, 이 시대 예술가들의 서로 다른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욕망과 꿈, 자존심, 확신, 강박과 불안이 뒤엉켜 그렇게 한 명의 예술가가 탄생하는가 싶더니, 웬걸, 황당하게도 인물이 ‘나’에서 ‘너’로, 그러더니 ‘그’로 이름을 바꾼다. 여기서 다시 한번, 창작자 이연주가 제안하는 인정투쟁의 실체가 드러난다. ‘연극 속 연극’의 예술가는 어떤 제도나 권위에 기대어 인정받음으로써 단순히 누군가의 대상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관계 맺기를 수행할 상대를 찾아 나선다. 한데 세상의 모든 존재란 ‘나’로 시작해, 나를 ‘너’라고 불러주는 타자를 만나고, 결국 ‘그’로 불리게 되니 우리는 이름을 바꾸지 않아도 현상적으로 언제나 같은 결과에 도달하게 마련이다. 아니, 심지어 ‘나’, ‘너’, ‘그’는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이름이 아니지 않은가! 하여 이 연극은, 이름을 바꾸는 그 능동적인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 관객이 함께 목격하고 증언하길 기다린다.

그러니 이 모든 가능성의 담지자로서 배우들은 생동하는 감각으로 무대를 누벼야 했다.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유지하는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의 유기적인 호흡에 익숙해져야 했다. 극단 애인의 단원들과 객원 배우 김원영이 합류해 4월부터 6월까지 이어진 신체워크숍에서는 자기 몸의 균형점 찾기, 동사와 형용사를 움직임으로 표현해보기, 일상의 평범한 것들로부터 리듬 발견해내기, 다른 이의 움직임을 따라 하거나 변주하기, 짝을 지어 그림 만들기 등을 수행하면서 자극에 반응해 몸을 깨우기 위한 여러 종류의 워밍업을 시도했다.

그리고 8월, 대본이 나오자 배우들은 여럿이 하나의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구현 방식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장면을 쌓아나가는 동안 지금 나의 말과 몸이 향하는 곳을 지각하고, 감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보다는 각자가 처한 상황과 입장을 인지해 그로부터 추동되는 태도를 찾는 것이 먼저였다. 때로는 가쁜 숨이 전염되었고, 서로 어긋나는 시선 속에 조화로운 이미지가 생겨나는 순간도 있었다. 매일의 연습은 오랫동안 무대를 떠돌아 몸이 기억하는 여유를 입는 과정이자, 인정투쟁의 근원적 불안을 체현하는 과정이었다.

한편으로 배우들의 연기만큼이나 ‘무대’의 수행도 중요했다. 장면의 제목이 서사를 이어갔고, 알 수 없는 곳에서 들려오는 말이 배우들을 가로막거나 기다리게 했다. 시(詩)는 명언이 되고 노래가 되었으며, 거리의 소음은 극장 밖 세계를 무대로 끌어들였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에 들어와 있는 모든 요소는 도구적 쓰임을 벗어나 연극의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행위자로 존재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무대의 말이 배우의 말보다 일찍 도착한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찾아가고 있다.

<인정투쟁; 예술가 편>을 만드는 내내 이 연극이 이 시대 예술가들을 특정 방식으로 대상화하거나 전형적인 예술가 이미지 같은 것을 생산해내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은 예술가의 인정투쟁이 아니라 연극 그 자체의 인정투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현실’─‘연극’─‘현실’─‘연극’ 사이에 생겨날 수 있는 무수한 매개와 상호 참조에 대해 고민한다. 연극은 그 자체로 살아있는 유기체다. 연극은 그 시간 그 공간에서 그것을 공유하는 관객과 배우는 물론, 그것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이해관계가 부딪히고 조정된 결과이며 그래서 절충된 염원이 반영된 세계다. 연극은 예술가들의 욕망이 투사된 작품이고, 예술계의 자율성이 작동하는 현장이다. 어찌할 수 없이 돈이 개입되는 일터이자 시장이다. 이 모든 에너지가 각축을 벌이는 곳으로서의 연극, 이제 그 인정투쟁을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화해와 환대로써 시작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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